바람이 분다 …… 가을밤 산책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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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일상생활

바람이 분다 …… 가을밤 산책길에서

by 브린니 2020. 9. 18.

바람이 분다 …… 가을밤 산책길에서

 

코로나 때문에 확!찐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점점 허리가 두꺼워지고 아랫배는 둥근 타원형을 이루고, 운동 부족으로 다리는 가늘고 힘이 없습니다. 저녁을 먹고 이삼일에 한 번 정도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헬스장에서 한 시간씩 러닝머신을 타곤 했는데 이마저도 할 수 없으니 그럴 수밖에요.

 

장마가 길어지고, 무더위도 번갈아 찾아오는 바람에 산책을 나가는 일도 드물어졌습니다. 마음먹고 나가려고 하면 비가 오고, 아니면 너무 덥고, 도무지 손발이 맞지 않아 그냥 집에 죽치고 앉아 있을 수밖에요.

 

하지만 어느덧 9월 중순, 햇살이 밝지만 뜨겁지 않고, 저녁엔 바람이 솔솔 불고 있습니다. 오늘 밤엔 저녁을 먹고, 잠시 시간을 내서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밤 9시를 조금 넘긴 시간, 아파트 주차장을 빠져 나오는데 벌써 바람이 불어옵니다. 아직 쌀쌀하지는 않고, 그렇다고 후텁지근하지도 않은 꽤 선선한 바람입니다.

 

문득 시 구절이 떠오릅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정말 걷기 좋은 날씨입니다. 옅은 어둠이 깔리고, 서늘한 바람이 불고. 그래서인지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많이 보입니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부부들이 꽤 됩니다. 아빠 손을 붙잡고 아장아장 걷는 꼬마 아이는 무어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아이들을 보면 저절로 기분이 밝아집니다.

 

한때는 모두 다 저렇게 작은 아이였을 때가 있었겠죠. 기억할 수 없는 인생의 한때가 가장 행복한 날들이었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망각이 축복인지 아니면……

 

기억할 수 없는 날들의 행복이여! 아무튼 행복한 시절이 있었다고 믿을 수밖에요. 그 대신 저렇게 어린 아이들을 보면서 왠지 모를 기쁨에 젖어봅니다.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돌고 큰 길로 나와 작은 연못이 있는 공원으로 향합니다. 공원 주위로 개천이 흐르고 개천을 따라 나무들이 서 있습니다. 봄에 희고, 분홍빛 꽃을 피웠던 벚꽃나무들은 이제 아이들 손바닥만 한 잎사귀들을 물들이고 있습니다.

 

가을이 좀 더 깊으면 더 짙은 주홍빛으로 손을 물들이고, 바람이 일 때마다 안녕! 하면서 손을 흔들겠지요.

 

개천을 따라 끝까지 걸어갔다가 큰 도로를 만나는 길에서 다시 되돌아옵니다. 산책길 끝에는 반달이 떠 있습니다. 달은 해와 달리 모양이 변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눈썹달, 반달, 보름달, 위로 불룩한 달, 아래로 불룩한 달…… 모양을 바꾸는 게 여인들이 자기 모습을 가꾸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여성의 생리를 월경, 달거리라고 하는 것이지도 이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은 퀵보드를 타고 쌩쌩 달립니다. 어둠이 더 짙어오기 전에 집으로 발길을 재촉하는 것이겠지요. 돌아오는 길에도 여전히 바람이 붑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폴 발레리가 쓴 해변의 묘지의 끝부분입니다. 그는 바닷가 주변에 있는 무덤을 보고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더 짙게 들었나 봅니다.

 

 

해변의 묘지

               ―폴 발레리

 

                          사랑하는 혼이여, 불사의 삶을 얻으려 하지 말고, 가능한 영역을 규명하고자 하라.

                                                                ―핀다로스「퓌티아 축첩가」Ⅲ

 

 

고요한 저 지붕은 비둘기들이 거닐고,

소나무 사이, 무덤 사이에 요동치고,

한낮은 불길로 그곳에 모양을 만든다

바다, 바다,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바다!

오 하나의 생각 뒤에 오는 대가

신들의 고요함에 오래 쏠린 시선!

 

미세한 번갯불이 아주 순수한 작업으로 전부 불태운다

미세한 거품의 무수한 금강석,

그리고 어떤 평화가 잉태되는 것만 같다!

심연 위에 하나의 태양이 쉴 때,

영원한 원인이 낳은 순수한 두 작품,

‘시간’은 번쩍이고 ‘꿈’은 바로 아는 것이 된다.

 

부동의 보물, 미네르바의 간소한 신전,

고요 더미, 눈에 보이는 축적이여,

우뚝 솟은 물이여, 네 안에서

불꽃 베일 속에 그렇게 많은 잠을 간직한 ‘눈’이여,

오, 내 침묵! …… 영혼 속의 전당,

그러나 천 개의 기와로 이루어진 황금 ‘지붕’이여!

 

단 하나의 한숨이 요약하는 ‘시간’의 신전,

그 순수한 점으로 나는 올라가 익숙해진다,

바다를 두루 살피는 나의 시선에 둘러싸여서

그리고 신들에게 바치는 내 최고의 공물처럼,

맑은 번쩍임이 씨를 뿌린다,

바다 깊이 최고의 경멸을.

 

과일이 녹아서 기쁨이 되고,

자신의 부재가 환희로 바뀌면서

입속에서는 그 형태가 죽어 가듯,

나는 여기서 내 미래의 연기를 들이마시고,

하늘은 다 타버린 넋에게 노래를 불러 준다.

웅성거리는 해변의 변화를.

 

아름다운 하늘, 진정한 하늘, 변하는 나를 보라!

그 많은 오만 끝에, 그 많은 기묘한

그러나 능력이 넘치는 무위 끝에

나는 이 빛나는 공간에 내 몸을 맡긴다,

죽은 자의 집 위를 내 그림자는 지나가고

그 연약한 움직임으로 나를 익숙하게 만든다.

 

(………………)

 

제논! 잔혹한 제논! 엘리아의 제논이여!

너는 날개 돋친 화살로 나를 꿰뚫었다

떨리고, 날고, 또 날지 않는 화살로!

소리가 나를 낳고 화살이 나를 죽인다!

아! 태양…… 넋에게 이 무슨

거북의 그림자, 큰 걸음에도 움직이지 않는 아킬레우스!

 

아니, 아니다! …… 서라! 여전히 계속되는 시대 속에서!

부숴라, 내 육체여, 생각에 잠기는 이 형태를!

마셔라, 내 가슴이여, 태어나는 바람을!

시원한 기운이 바다에서 불어와,

내게 혼은 되돌려 준다…… 오 짜디짠 힘이여!

파도를 향해 달려가서 다시 세차게 솟구쳐라!

 

그렇다! 열광을 타고난 큰 바다여,

표범의 가죽이여, 태양의 수천의 우상에게

구멍 뚫린 고대 그리스의 외투여,

제 푸른 살에 도취되어서,

침묵을 닮은 떠들썩함 속에서

반짝이는 네 꼬리를 물어뜯는 절대적 히드라여!

 

바람이 분다! …… 살아야겠다!

거대한 대기는 내 책을 펼쳤다 다시 닫고,

파도는 산산이 부서져 바위에서 세차게 용솟음친다!

날아가라, 온통 눈부신 페이지여!

부숴라, 파도여! 부숴라, 기쁨에 용솟음치는 물로

삼각돛이 먹이를 쪼아 먹는 고요한 저 지붕을!

 

 

그런데 왜 시인은 바람이 불었을 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릴 때, 햇살이 뜨겁게 내리쬘 때가 아니라, 왜 하필 바람이 불 때.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우리나라 시인이 쓴 시에도 이 구절이 반복해서 쓰였습니다. 현학적인 제목이 달린 신춘문예 당선작입니다. 젊은 시인의 패기가 넘치는 시입니다.

 

 

로트레아몽 백작의 방황과 좌절에 관한 일곱 개의 노트 혹은 절망 연습

                                                                                      ―남진우

 

 

1

그 겨울 내 슬픈 꿈은 18세기 외투를 걸치고 몇 닢 은전과 함께 외출하였다. 목조의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며 사랑하지 않는 여인의 흰 살결, 파고드는 쾌감을 황혼까지 생각하였다. 때로 희미한 등불을 마주 앉아 남몰래 쓴 시를 태워버리고 아, 그 겨울 내 슬픈 꿈이 방황하던 거리, 우울한 샹송이 정의하는 토요일과 일요일을, 그 숱한 만남과 이 작은 사랑의 불꽃을 나는 가슴에 안고 걷고 있었다.

 

2

밤 열 시, 시계의 태엽을 감으며 그녀의 살 속으로 한없이 하강하는 헝가리언 랩소디. 따스한 체온과 투명한 달빛이 적시는 밤 열 시의 고독. 머리맡에 펼쳐진 십이사도의 눈꺼풀에 주기도문이 잠시 머물다 간다.

 

3

날개를 준비할 것. 낢, 혹은 우리의 좌절에 대한 대명사. 솟아오름으로 가라앉는 변증법적 사랑의 이중성.

 

4

가로등이 부풀어 오른다. 흐느적거리는 밤 공기 사이로 킬킬대는 불빛의 리듬. 안개는 선술집 문 앞에 서성이고 바람은 취한 얼굴로 비틀거리며 걸어나온다. 쉬잇 설레는 잠의 음계를 밟고 내가 바다에 이르렀을 때, 보았다. 아득히 밀려오는 파도와 살 섞으며 한잎 두잎 지워지는 뱃고동소리, 조용히 모래톱에 속삭이는 잔물결을 깨우며 한 여인이 꽃을 낳는 것을.

 

5

물결치는 시간의 베일을 헤치고 신선한 과일처럼 다디단 그대 입술은 그대 향기로운 육체는 깊은 혼수로부터 꿈을 길어오른다.

날아오르라 날아오르라 박수를치며

젖은 불꽃의 옷을 벗으라 나의 하아프여

가만히 촛불켜고 기다리자, 누군가 휘파람을 불며 지중해의 녹색문을 열고 거울 속으로 들어간다. 피어나는 연꽃 속에 눈뜨는 보석을 찾아.

 

6

자정이 되면 그대와 함께 방문하는 러시아의 설해림. 모닥불 옆에 앉아 우리는 수평선 너머 사라지는 선박을 그 긴 항해를 바라보았다. 눈이 내리는 군요. 바람 부는 해안 푸른 고요 속에, 목마른 자 홀로 남아 기도하는 자정의 해안 그 어둠 속에 눈은 내리고, 유년의 마을 어디쯤 떠오르는 북두칠성. 지상의 불빛이 고개 숙인다.

 

7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겠다.

 

 

젊은 시인은 바람이 불지 않아도 살아야겠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렇죠. 일상은 바람이 불거나 불지 않거나 살게 되는 것이니까요.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도 바람이 분다는 것은 인생에 닥치는 수많은 풍파를 뜻하는 게 아닐까요? 그래서 바람이 불 때마다 옷깃을 여미면서 더 악착같이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람이 분다’를 노래한 가수가 있습니다. 이소라가 직접 가사를 쓰고 부른 ‘바람이 분다’. 한때 정말 많이 흥얼거렸습니다. 노래방에서 부르면 정말 고음의 끝이었죠.

 

 

바람이 분다

              ―이소라

 

바람이 분다 서러운 마음에 텅 빈 풍경이 불어온다

머리를 자르고 돌아오는 길에

내내 글썽이던 눈물을 쏟는다

하늘이 젖는다 어두운 거리에 찬 빗방울이 떨어진다

무리를 지으며 따라오는 비는

내게서 먼 것 같아 이미 그친 것 같아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바람에 흩어져 버린 허무한 내 소원들은

애타게 사라져 간다

 

바람이 분다 시린 향기 속에 지난 시간을 되돌린다

여름 끝에 선 너의 뒷모습이

차가웠던 것 같아 다 알 것 같아

내게는 소중했던 잠 못 이루던 날들이

너에겐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나의 이별은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치러진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내게는 천금 같았던 추억이 담겨져 있던

머리 위로 바람이 분다

눈물이 흐른다

 

 

사랑이 끝나고 난 뒤 마음에 휑하니 부는 바람을 느끼며 쓴 시일 것 같습니다. 이별 뒤에 두 연인이 느끼는 감정은 서로 다를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건에 대한 기억조차 다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고 노래합니다.

 

헤어진 연인들은 서로 다른 추억을 지닌 채 살아가겠지요. 다른 사람을 또 만나고, 또 다른 사랑을 하면서.

 

가을밤, 산책은 3편의 시를 읽는 것으로 끝을 내렵니다. 가을에는 정말 시를 읽고, 또 한 편의 시를 쓰고 싶어집니다. 좀 더 바람이 쌀쌀해지면 바바리코트를 입고 깃을 세우고 걷고 싶어질 것 같습니다.

 

시인처럼 ― 우울하고, 좀 병약해 보이는, 왠지 쓸쓸하고 고독한 시인처럼.

 

서늘한 바람이 부는 가을밤, 시와 함께 산책을 즐겨보시길 …… 사랑하는 사람과 때론 나 홀로.

 

 

이소라 바람이 분다

www.youtube.com/watch?v=mRWxGCDBR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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