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병민 콩쿠르 참가곡 <돈키호테에 대한 4개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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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일상생활

길병민 콩쿠르 참가곡 <돈키호테에 대한 4개의 노래>

by 브린니 2020. 9. 12.

다섯 때부터 콩쿠르 인생을 시작했다는 국가대표 성악가 길병민에게 돈키호테는 어떤 인물로 해석될지 흥미롭습니다.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줄줄이 우승의 경력을 쌓은 것으로 유명한 그이지만, 사실은 꼴찌의 자리에도 있었고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며 도전을 이어왔다고 말하곤 했기 때문입니다.

 

세계 최초의 근대소설로 꼽히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17세기 출간 초기에는 현실감각이 없고 우스꽝스러운 기사의 모습을 풍자한 것으로 이해되었지만, 18~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는 남들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이상을 추구하는 인물로서 재평가되었습니다.

 

<돈키호테> 여러 작가, 음악가들에 의해 재해석되었지만, 길병민이 2015 몬트리올 콩쿠르에 참가하여 연주한 곡은 프랑스 작곡가 자크 이베르Jacques Ibert <돈키호테에 대한 4개의 노래Quatre chansons de Don Quichotte>(1932)였습니다.

자크 이베르는 순간적인 감정이나 분위기를 표현하는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작곡가로 잦은 변박을 사용하여 자유롭고 재치가 있으며 불규칙하고 다양한 선율을 구사하되 서정성을 띠는 독특한 곡들을 작곡하였습니다.

 

<돈키호테에 대한 4개의 노래> 1 출정의 노래 Chanson du départ 2 둘시네 공주에게 바치는 노래 Chanson à Dulcinée 3 공작의 노래 Chanson du Duc4 죽음의 노래 Chanson de la mort 이루어져 있습니다. 곡들은 영화사의 의뢰로 돈키호테를 주제로 영화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으로 작곡한 것입니다.

 

돈키호테의 내용은 알려져 있듯이 시골 마을의 늙은 기사가 편력기사에 대한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나머지 현실과 이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녹슨 갑옷과 볼품없는 말을 타고 모험을 떠나 어수룩한 시골뜨기 산초를 꼬드겨 하인으로 삼고 농부의 딸을 둘시네 공주라 칭하고 수도사들을 공주를 납치하려는 마법사라고 여기며 싸움을 벌입니다.

 

마술에 걸린 배에 얽힌 모험을 겪기도 하면서 우스꽝스러운 여행을 계속하다가 마지막 결투에서 패하고는 꿈에서 깨어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고향으로 돌아와 병상에서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어리석은 기사의 이야기가 2002 노벨연구소가 세계 최고의 작가 100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문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 선정되었다니 놀랍습니다.

 

이는 이상을 추구하는 돈키호테와 현실적인 하인 산초의 대립과 병존이야말로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개의 자아의 치열한 갈등을 보여주기 때문인 같습니다.

 

이베르가 작곡한 4곡의 돈키호테 역시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며 매우 진지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거기에 진정성있게 공들여 연주하는 길병민의 목소리가 더해져 매우 매력적이고도 비극적인 돈키호테가 탄생합니다.

 

먼저 1번곡 출정의 노래 Chanson du départ 돈키호테가 둘시네 공주에 대해서 얼마나 충만한 사랑과 충정심을 지녔는지 보여줍니다. 매우 자유로우면서도 분명하고 독특한 스페인 민속음악의 분위기가 담겨 있습니다. 플라멩고를 연상케 하는 이국적인 연주가 멋집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Ce château neuf, cenouvelédifice

이 새로 지은 성, 신성한 사원은

Tout enrichi de marbre et de porphyre

대리석과 암석들로 가득 찼네

Qu' amour bâtit château de son empire

사랑으로 보호하려 세웠소

Où tout le ciel a mis son artifice

모든 하늘의 기묘함으로 채웠고

Est un rempart, un fort contre le vice

악마들로부터 지켜줄 단단한 방벽이라오

Où la verto maîtresse se retire

그곳에서 정결한 여왕은 안전할 수 있다오

Que l'oeil regarde et que l'esprit admire

그녀의 눈은 깊고 영혼은 고귀하여

Forçant les coeurs à lui faire service

모든 충정을 그녀에게 바치오

 

C'est un château, fait de telle sorte

이 요새는 아무도 다가설수 없도록 지어졌네

Que nul ne peut approcher de la porte

위대한 왕을 제외하곤

Si des grands Rois il n'a sauvé sa race

그는 그의 백성들을 보호할 것이라오

Victorieux, vaillant et amoureux.

승리와 용맹과 자비로써

Nul chevalier tant soit aventureux

어떤 늠름한 기사라도

Sans être tel ne peut gagner la place

왕이 아니면 들어 갈 수 없다오

 

스페인 플라멩고의 리듬이지만 잔잔한 피아노로 연주되는 분위기는 신성한 사원의 고요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길병민은 잔잔하고도 위엄있게 곡을 시작하다가 악마들로부터 정결한 여왕을 지켜줄 방벽이라는 부분에서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단단한 힘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고귀한 영혼의 여왕을 위하여 모든 충정을 바치겠다고 나직히 속삭이듯 다짐합니다. 저음이지만 스페인 리듬의 기교가 세밀하게 들어있습니다. 충정을 다짐한 마음은 기쁨으로 벅차 얼굴에 미소가 번집니다.

요새는 왕이 아니면 아무도 들어갈 없는 곳이라는 강한 집념을 표현할 때는 다시 위엄있게 기사로서의 용맹함을 보여줍니다. 또한 음운을 맞추어 소절의 마지막 ‘e’ 발음에서 특유의 민요조 선율이 꺾이는 기교가 아주 매력적인 곡입니다.

2 둘시네 공주에게 바치는 노래 Chanson à Dulcinée 애틋한 사랑을 담은 연애편지와도 같은 고백입니다. 특히 시작부의 'Ah' 스페인 민요의 리듬으로 짙은 그리움을 표현합니다.

 

Ah, Un an, me dure la journée

내게는 하루가 일 년과 같소

Si je ne vois ma Dulcinée.

나의 둘시네 공주를 보지 못하면

Mais, Amour a peint son visage,

하지만, 사랑은 그녀의 얼굴을 그렸네

Afin d'adoucir ma langueur,

나의 우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Dans la fontaine et le nuage,

샘과 구름에

Dans chaque aurore et chaque fleur.

새벽 하늘과 꽃들의

 

Ah, Un an, me dure la journée

내게는 하루가 일 년과 같소

Si je ne vois ma Dulcinée.

나의 둘시네 공주를 보지 못하면

Toujours proche et toujours lointaine,

가까이 있건, 멀리 있건

Etoile de mes longs chemins.

별과 함께하는 나의 긴 행로에

Le vent m'apporte son haleine

바람이 그녀의 숨결을 전하오

Quand il passe sur les jasmins

쟈스민 꽃향기 풍기는

Ah, un an, me dure la journée

내게는 하루가 일 년 같소

Si je ne vois ma Dulcinée.

나의 둘시네 공주를 보지 못하면

 

곡을 시작하기 전에 피아노에 한쪽 손을 얹은 채 기대어 입과 턱 부분을 쓸어내리는 모습이 사랑하는 여인에 대해 묘사하기 전 마치 잠깐의 여유를 두며 무어라 말할까 생각하는 남자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나의 둘시네 공주를 보지 못하면 Si je ne vois ma Dulcinée” 내게는 하루가 같다고 표현할 , 둘시네를 부르는 여린 소리가 애틋하고 아름답습니다. 표정 또한 꿈을 꾸듯 아련하여 사랑에 빠진 행복한 모습입니다.

특히 둘시네를 부르는 마지막 부분의 가성은 묵직한 투포환 베이스의 매력과는 또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꿈처럼 여린 소리를 따라 둘시네의 환상이 얼마나 향기로운 것인지 짐작하게 합니다.

3 공작의 노래 Chanson du Duc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둘시네 공주에 대한 사랑을 지키겠다는 돈키호테의 맹세를 담은 세레나데입니다.

 

Je veux chanter ici la Dame de mes songes

나의 꿈속의 여인에게 노래하오

Qui m'exalte au dessus de ce siècle de boue

그녀는 더러운 세상에서 나를 구했소

Son cœur de diamant est vierge de mensonges

그녀의 다이아몬드 같은 마음은 순수하고

La rose s'obscurcit au regard de sa joue

그녀의 뺨은 분홍빛으로 물들었소

 

Pour Elle, j'ai tenté les hautes aventures:

그녀를 위해서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소

Mon bras a délivré la Princesse en servage,

나의 모든 힘은 공주께 바쳤고

J'ai vaincu l'Eenchanteur, confondu les parjures

마녀와 거짓 맹세하는 자들을 물리치고

Et ployé l'univers à lui rendre l'hommage

그녀 앞에 모든 세상이 경배하게 하겠소

 

Dame par qui je vais, seul dessus cette terre,

내가 떠나면 그녀는 세상에 홀로 남아

Qui ne soit prisonnier de la fausse apparence

적들에게 둘러싸인다오

Je soutiens contre tout Chevalier téméraire

어떤 못된 기사들이 나타나도 당신의

Votre éclat non pareil et votre précellence

빛나는 이지와 우아함을 지키려오

 

곡은 여인에 대한 찬사와 충성의 맹세답게 단호하고 용맹하게 시작됩니다. 속의 여인이더러운 세상에서 자신을 구했다 Qui m'exalte au dessus de ce siècle de boue” 모티브는 서양 문학에서 매우 고전적인 것입니다.

 

단테가 <신곡>에서 천국과 연옥과 지옥을 그려낼 , 천국으로 인도해주는 순수하고 고귀한 영혼을 가진 여인 베아트리체를 등장시킵니다. 이후 기사문학에서도 기사들의 숭배를 받는 여인들은 이처럼 고결하여 타락한 세상으로부터 영웅의 용기와 정신을 지키는 존재로 형상화됩니다.

 

전통은 근대까지 이어져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도 싱클레어가 주점에서 술과 거친 농담에 빠져 지낼 , 산책 우연히 거리에서 만난 여자에게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녀의 얼굴을 그리면서 서서히 타락에서 벗어나 정결한 생활로 돌아오는 계기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기사에게 순결한 여성에 대한 충성과 사랑은 자신의 영혼을 지키는 행위와 같습니다. 언제 악한 것에 의해 해를 입을지 모르는 연약한 여인을 지키는 것은 언제 유혹과 타락에 빠질지 모르는 연약한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길병민은 자신의 모든 힘을 여인에게 바쳤고, 그를 해하려는 마귀와 나쁜 기사들과 싸우겠다는 의지를 보일 때는 강하고 위엄있게, 그리고 그녀의 빛나는 뺨과 다이아몬드 같은 순수와 우아함을 노래할 때는 여리고 애틋하게 표현합니다.

특히 마지막 음절이 1절은 ‘ges’ ‘oue’ , 2절은 ‘ures’ ‘age’, 3절은 ‘re’ ‘ence’ 동일하게 끝나면서 소리의 아름다움을 더하는 매력을 줍니다.

 

4 돈키호테의 죽음의 노래 Chanson de la mort de Don Quichotte 집념과 용기로 추구해 왔던 모든 일들이 현실 속에서 이루어질 없는 이상향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 비통해하는 비극적인 노래입니다. 비통한 감정을 잡기 위해 잠시 고개를 숙이고 곡을 시작합니다.

 

 

Ne pleure pas Sancho,

울지마라, 산쵸

Ne pleure pas, mon bon,

울지마라, 친구야,

Ton maître n'est pas mort,

네 주인은 죽지 않는다.

Il n'est pas loin de toi,

그리 멀지 않은,

Il vit dans une île heureuse

행복의 섬에 살리라

Où tout est pur et sans mensonges.

그곳은 거짓 없는 순수함의 세상

Dans l'île enfin trouvée

그 섬은 내가 만들었고

où tu viendras un jour,

너도 언젠가는 올 것이다.

Dans l'ile désirée,

동경하던 섬으로

O mon ami Sancho,

나의 친구 산쵸,

Les livres sont brulés

책들을 불태워

Et font un tas de cendres.

숯을 만들어라

Si tous les livres m'ont tué

온갖 책들이 나를 죽였다면

Il suffit d'un pour que je vive

그것이 나를 살리는 유일한 길

Fantôme dans la vie,

삶의 유령

Et réel dans la mort

죽음의 실제

Tel est l'étrange sort

그것이 기묘한 운명이다

du pauvre Don Quichotte. Ah!

이 불쌍한 돈키호테의. 아!

처음부터 끝까지 여린 소리를 유지하면서 비통한 감정의 선을 놓지 않는 긴장미가 있어 감탄스럽습니다.

병들어 죽어가지만, 죽음은 그가 추구해온 세상으로 넘어가는 문일 자신처럼 산초 역시 그곳으로 넘어오게 것이며, 그곳은 거짓이 없고 순수한 행복으로 가득한 섬이라고 노래하는 눈빛이 이미 현실 너머의 어딘가를 바라보는 듯합니다.

고요한 비장미가 흐르는 노래에서 유일하게 강한 어조를 보이는 부분은 책들을 불태워 숯으로 만들어 버리라는 유언을 남길 때입니다. 자신을 한없는 이상향으로 이끌어 현실 속에 이룰 없는 꿈을 꾸고 행동하게 만든 책들이 오히려 자신을 죽인 것과 같다면 그것을 불태워 버리라는 명령은 듣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많은 책을 짓고 읽는 것은 피곤하고 헛되다는 솔로몬의 애가처럼 오히려 삶의 어떤 경지를 넘어선 이의 허무함을 맞닥뜨리는 같은 비장한 슬픔을 느끼게 합니다. 이를 표현하는 길병민의 목소리 역시 잔잔하면서도 목이 메어 깊은 감정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기묘한 운명을 지닌 불쌍한 돈키호테의 죽음이 마지막 매우 여린Ah!’라는 음절로 표현될 청중들은 우스꽝스러운 늙은 기사의 죽음이 아니라 현실에 온몸으로 부딪히며 역경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슬픈 영웅의 한스러운 자취가 연기처럼 사라지는 비장한 아름다움을 맛봅니다. 누가 돈키호테를 비웃을 있을까요?

감상은 아래 동영상 12 10초부터 22 30초까지입니다.

www.youtube.com/watch?v=BIG2Ab0QXVA

 

*한유호 가사 번역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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