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고네의 주장 : 죽음충동을 통과한 정치·윤리적 행위
안티고네Antigone는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가 낳은 딸이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 눈을 찔러 멀게 했다. 안티고네는 여동생 이스메네와 함께 오이디푸스가 테베에서 추방되어 아테네 근처에서 죽을 때까지 아버지를 보살폈다. 안티고네가 테베로 돌아왔을 때 오빠들인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가 서로 싸우다 둘 다 죽은 뒤였다.
오이디푸스가 왕위에서 물러난 뒤 두 아들 사이에 권력 투쟁이 일어나 서로 일 년 씩 번갈아 가며 통치하기로 합의한다. 형 폴리네이케스는 일 년을 통치한 후에 동생 에테오클레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지만 동생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형을 테베에서 추방한다. 폴리네이케스는 아르고스로 가서 아르고스의 왕 아드라스토스의 딸 아르게이아와 결혼한 뒤 세력을 모아 군사를 이끌고 테베를 공격한다.
전쟁은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았고,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는 일대일 결투로 왕위 계승을 결정짓기로 하고 결투를 벌였지만 서로의 칼에 찔러 둘 다 죽고 만다. 그 사이 삼촌 크레온이 아르고스 군대를 물리치고 테베의 왕이 된다.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의 장례식은 성대히 치러주고는 폴리네이케스는 반역자이므로 매장하지 못하게 했고 이를 거역하는 사람은 사형에 처한다고 포고한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안티고네가 이스메네에게 함께 폴리네이케스의 장례를 치러야 한다고 말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이스메네는 국가의 법을 어길 수 없다고 간곡하게 거절하면서 안티고네를 만류한다. 하지만 안티고네는 크레온의 명령을 어기면 죽게 될 줄 뻔히 알면서도 고집을 꺾지 않고, 몰래 폴리네이케스의 장례를 치른다.
크레온은 파수꾼으로부터 누군가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흙으로 덮었다는 소식을 듣고 반드시 범인을 잡아오라고 명령한다. 파수꾼은 안티고네를 범인으로 잡아온다.
크레온은 안티고네를 질책하지만 안티고네는 자신의 행위는 신의 법을 이행한 것이라며 스스로를 변호한다. 크레온은 죽지 않을 정도만 음식을 주게 하고 안티고네를 동굴 감옥에 가둔다.
곧 안티고네와 약혼한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이 나와서 아버지와 다툰다. 크레온에게 안티고네에게 내린 명령을 철회하라고 요청하지만 크레온은 듣지 않는다.
이어 테이레시아스가 와서 크레온에게 신들의 저주를 예고하며 명령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자 그제야 크레온은 자신의 명을 거두고 안티고네를 살리려고 달려간다. 그러나 이미 신들의 재앙이 먼저 도착해 안티고네가 목을 매 죽고, 곧바로 하이몬도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자기 심장에 칼을 찔러 따라 죽는다. 아들 하이몬의 죽음 소식을 들은 어머니 에우리디케도 따라 죽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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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들어 안티고네는 그녀의 아버지 오이디푸스 못지않게 유명하다. 헤겔이나 라캉과 같은 사상가들이 그녀를 숭고하고 고결한 윤리의식을 실천한 인물로 칭송했기 때문이다. 안티고네는 인류가 오랫동안 지켜온 인간 사이의 윤리를 가로막는 국가의 법을 위반함으로써 일종의 자연법이자 가족과 공동체 윤리를 지킬 수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국가의 법이 상위법이기 때문에 가족 윤리에 가까운 죽은 사람의 매장은 일시적으로 정지해도 될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더욱이 매장이 금지된 사람은 다름 아닌 적의 군대를 이끌고 조국을 침범한 반역자이니까 말이다.
크레온이 조국을 배반하고 국가 해를 끼친 폴리네이케스를 매장하지 못하게 한 것은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역사적으로 볼 때 반역자의 목을 참수해 성문 어귀에 걸어놓은 일은 고대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며 육시나 부관참시도 일어났던 판에 매장을 하지 말라는 명령은 그렇게 가혹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고대국가에서 참수 후 전시나, 육시나 부관참시 등이 빈번히 일어났다고 해서 그것이 옳은 일일 수는 없다. 고대의 왕들처럼 크레온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보편적인 윤리를 무너뜨리고 있다. 크레온은 국가를 통치하기 위한 공리주의적이고 세속적인 법을 따르고 있으며 다수의 공익을 우선시 하고 있다.
안티고네는 반역자를 매장하지 말라는 국가의 법을 어기고 오빠를 매장한다. 제대로 된 매장은 아니고, 그저 흙을 덮어주는 정도였다. 안티고네는 자신의 행위가 친족으로서 당연한 일이며 죽은 자를 매장하는 것은 신들의 불문율이라고 주장한다. 안티고네는 자신의 행위가 국가의 입장에서는 범죄가 분명하지만 신들이 원하는 것이기 정당하다고 당당히 크레온에 맞선다. 굳이 신들을 불러오지 않아도 죽은 자의 시신을 매장하는 것은 산 자의 의무이자 윤리이다.
그리스시대의 문화에서도 그렇지만 죽은 자를 매장하지 않고, 즉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않는 것은 죽은 자를 죽은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렇게 되면 망자의 혼이 저승으로 갈 수 없다는 속설도 있다.
트로이 전쟁에서 죽은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달라는 트로이의 요청에 그리스 군대도 기꺼이 시신을 인도했다. 또한 시시포스는 아내가 자신을 매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은 진짜 죽은 것이 아니니까 다시 지상으로 올라가 아내에게 자신을 매장하라고 말하고 오겠노라며 저승에서 나오기도 했다. 저승의 신이 그 말에 속아 넘어갈 정도로 죽은 자의 매장은 꼭 필요한 장례 절차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은 자의 매장과 장례는 산 자들의 중요한 몫이다. 그런데 크레온은 국가의 법이라는 명목하에 폴리네이케스의 장례를 막았고, 안티고네는 시신에 흙을 덮어 장례를 치렀다.
크레온의 행위에 잘못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안티고네의 행위가 잘못되었다고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크레온은 반역에 대한 일벌백계一罰百戒로써 매장을 금지했고, 안티고네는 사람이 해야 할 도리를 다했다.
최소한 크레온은 안티고네를 벌주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티고네를 벌주지 않는다면 왕으로서 내린 명령을 철회해야 하며, 명령 철회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왕이 내린 명령을 쉽사리 철회할 경우 통치에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헤겔은 안티고네가 오빠를 매장한 것은 가족 공동체의 선을 뜻하며 크레온은 국가의 선을 도모하고 있기에 선과 선이 대립한 것이라고 보았다.
크레온이 죽은 자의 장례식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더 나았을 수 있다. 전쟁은 테베의 승리로 끝났다. 적에게 덕을 베푸는 것도 통치의 좋은 방식이 될 수 있으며 장례식은 가족의 손에 맡기는 것은 더 좋다. 더욱이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는 형제들이고 한 사람만을 매장한다는 것은 불공평하고, 가족의 인륜을 위반하는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크레온의 명령은 ‘과잉행동’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헤겔 입장에서 볼 때 크레온은 오직 자신이 추구하는 법의 정당성만을 믿는 완고한 자기의식의 소유자이며 자신의 행위를 통해 법이 실현되는 것만을 추구하고 있다. 크레온에게 있어 모든 것은 자기로 시작해서 자기로 끝난다고 볼 수 있다. 자기의식, 자기행위, 자기 법에 대한 숭배인 것이다.
반대로 안티고네는 자신의 행위가 국가의 법에 저촉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에 대한 책임을 진다. 이것은 법을 넘어서는 윤리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크레온은 아들 하이몬과 논쟁을 펼치지만 뜻을 굽히지 않는다. 급기야 테이레시아스까지 나서서 이 일로 신들이 재앙을 내릴 것이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돌이킨다. 그만큼 크레온의 명령은 통치를 위한 공리적인 수단이었으며 법으로서는 그럴싸할지 몰라도 결코 정의롭지 않다는 것이 판명난다. 크레온의 명령은 오로지 왕으로서 국가를 잘 통치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그 명령을 철회하는 이유 역시 국가를 잘 통치하려는 목적일 뿐이다.
안티고네는 신의 법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국가의 법 아래에서는 숨겨져 있는 자연적이고 무의식적인 법으로서 가족에게 속해 있다. 가족이란 국가의 핵심적 요소이기는 하지만 가족 윤리는 국가의 법과 상충될 수도 있다. 가족은 국가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면서 동시에 배제되어야 하는 속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가족 윤리는 국가의 법보다는 자연법, 혹은 신의 법에 더 가까울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안티고네는 가족 윤리 안에 있으되 국가의 법 바깥에 선 인물이 되는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크레온에게 자신의 행위에 대한 안티고네의 주장이다.
크레온 : 너는 그렇게 하지 말라는 포고가 내려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느냐?
안티고네 : 알고 있었습니다. 포고인데 어찌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크레온 : 그런데도 너는 감히 법을 어겼단 말이냐?
안티고네 : 네. 포고를 내게 알려주신 분은 제우스가 아니었으며
하계의 신들과 함께 사시는 정의의 여신께서도
사람들 사이에 그런 법을 세우시지는 않았기 때문이지요.
나는 또 그대의 명령이 신들의 확고부동한 불문율을
죽기 마련인 한낱 인간이 무시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그 불문율들은 어제 오늘에 생긴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 있고,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나는 한 인간의 의지가 두려워서 그 불문율들을 어김으로써
신들 앞에서 벌 받고 싶지가 않았어요.
나는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어요.
어찌 모르겠어요? 그대의 그 포고가 없었다 하더라도 말이에요.
하나 내가 때가 되기도 전에 죽는다면, 나는 그것을 이득이라고
생각해요. 나처럼 수많은 불행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어찌 죽음을 이득이라고 생각지 않겠어요?
그러니 내가 이런 운명을 맞는다는 것은 나에게는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아요. 그러나 내가 내 어머니의 아들이
묻히지 않은 시신으로 밖에 누워 있도록 내버려 두었더라면,
그것은 나에게
고통이 되었을 거예요. 하지만 이것은 나에게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아요.
그리고 만약 그대의 눈에 내 행동이 어리석어 보인다면
나를 어리석다고 나무라는 자야말로 아마도 어리석은 자일 거예요.
많은 철학자들이 주목한 바로 ‘안티고네의 주장’이다. 안티고네가 주장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포고를 내린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 크레온일 뿐이다.
둘째, 죽은 자를 매장하지 않는 것은 신의 불문율을 어기는 것이다.
세째, 안티고네 자신은 신의 법을 어겨서 벌을 받고 싶지 않아서 죽은 자를 매장했다.
넷째, 안티고네 자신은 죽음이 고통이 아니라 어머니의 아들이 묻히지 않은 시신으로 밖에 누워 있는 것이 더 큰 고통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안티고네가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고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프로이트의 쾌락원칙에 따르면 인간은 대개 고통(불쾌)을 멀리하고 쾌락을 원한다. 그런데 안티고네는 이 원칙을 넘어서 죽음을 원하고 있다.
“나처럼 수많은 불행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어찌 죽음을 이득이라고 생각지 않겠어요? (……) 하지만 이것은 나에게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아요.”
죽음이 고통이 아니라고 거듭 강조하면서 안티고네는 자신의 행위가 죽음을 불러오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듣기에 따라서는 자신이 죽음을 원하기에 이런 일을 했다는 것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쾌락원칙을 넘어선 죽음충동이라고 할 수 있다.
라캉에게 안티고네는 법의 위협 앞에서도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인물이다. 라캉이 말하는 정신분석의 윤리란 자신의 욕망을 타협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녀는 크레온이 상징하는 공리주의적이고 합리적인 질서를 거부하고 신의 법이라는 보다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원칙을 따른다. 안티고네의 행동은 이해득실과 무관하고, 누구에게나 보편타당하다. 따라서 안티고네는 사랑하는 오빠의 시신을 매장하겠다는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윤리적 행동의 가능성을 구현하는 인물인 것이다.
안티고네는 처음부터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오빠의 장례를 시도한다. 동생 이스메네가 거부한 것도 장례가 아니라 그 결과가 죽음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메네 : (……) 유일하게 살아남은
우리 주 자매도 법을 무시하고 왕의 명령이나 권력에 맞서다가는
누구보다도 가장 비참하게 죽고 말 거예요.
아니, 우리는 명심해야 해요. 첫째, 우리는 여자들이며
남자들과 싸우도록 태어나지 않았어요.
그 다음 우리는 더 강한 자의 지배를 받고 있는 만큼,
이번 일들과 더 쓰라린 일에 있어서도 복종해야 해요.
그래서 나는 이번 일은 어쩔 도리가 없는 만큼
지하에 계시는 분들께 용서를 빌고
통치자들에게 복종할 거예요.
지나친 행동은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까요.
안티고네 : (……) 그래도 나는 그분을 묻겠어.
그렇게 하고 나서 죽는다면 얼마나 아름다우냐!
그러면 나는 그분의 사랑을 받으며 사랑하는 그분 곁에 눕게 되겠지.
경건한 범행을 저지르고 나서, 그것은 내가 여기 살아 있는 이들보다도
지하에 계시는 이들의 마음에 들어야 할 시간이 더 길기 때문이지.
그곳에 나는 영원히 누워 있게 될 테니까. 그러나 너는
원한다면 신들께서는 존중하시는 것을 경멸하려무나.
또 하나의 ‘안티고네의 주장’이다.
이스메네는 왕의 명령에 맞서면 죽는다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여자들은 남자들과 싸워서는 안 되면 피지배자는 지배자의 통치를 받으며 복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나친 행동’은 죽음을 불러올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안티고네는 “나는 그분을 묻겠어. 그렇게 하고 나서 죽는다면 얼마나 아름다우냐! 그러면 나는 그분의 사랑을 받으며 사랑하는 그분 곁에 눕게 되겠지.”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안티고네는 오빠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지칭하고 있으며 함께 죽어서 같이 누워 있는 것을 욕망하고 있다.
또한 자신의 행위를 ‘경건한 범행’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이 “살아 있는 이들보다도 지하에 계시는 이들의 마음에 들어야 할 시간이 더 길기 때문”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안티고네는 살아 있는 자보다 죽은 자들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스메네는 전통적인 여성상을 대변하고 있다. 남자에게, 통치자에게 복종하는 동시에 보호받는 약자의 모습 그대로이다. 사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길들여지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스메네는 자아심리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자아심리학은 개인의 자아(ego)를 강화하고 보다 성숙한 자아를 발달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 이때 성숙한 자아 만들기란 자칫 사회의 요구에 맞추어, 개인의 욕망을 어떻게 제어하고 현실에 어떻게 적응시킬 것인가에 관심을 기울이는 쪽으로 흐를 수 있다. 예컨대 경제발전을 위해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라는 식이 요구가 제기될 때 자아심리학적 윤리는 기존 질서의 현상유지에 이바지하는 체제 순응적인 윤리가 될 수밖에 없다.
자아심리학은 사회적 요구에 적응해서 성숙한 자아를 만드는 데 관심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욕망을 억압하는 권력의 폭력성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안티고네는 보편적인 인간 윤리 혹은 신의 법을 존중하면서 죽음도 불사하는 윤리적인 행위를 실천한다. 여기엔 분명히 죽음충동이 작용하고 있다. 죽음충동이란 쾌락원칙을 넘어서는 것인데 인간은 불쾌를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지만 쾌락을 추구하면서 여러 가지 장애를 만난다. 그래서 쾌락이 완전히 만족된 상태 혹은 역설적으로 욕망과 쾌락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원하게 된다. 쾌락도 고통도 없는 열반의 세계를 열망하는 데 그것은 오직 죽음만이 가져다 줄 수 있다. 충동이란 나는 이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을 꼭 해야만 하는 원리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안티고네에겐 죽음이 결코 고통일 수 없다. 안티고네에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며, 사랑하는 사람 곁에 영원히 눕는 것이며, 죽은 자의 마음에 드는 것이다. 그리고 신들이 존중하는 것을 경멸하지 않는다.
이렇게 안티고네의 열반에 대한 열망, 죽음충동은 역설적으로 신들의 법을 향한 보편적 윤리를 실천하는 것이 된다.
또한 안티고네는 순종하는 여성을 넘어서 권력과 투쟁하는 여성이다. 그녀의 죽음충동은 윤리적 행위이자 정치적 투쟁이 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이 많은 페미니스트의 눈길을 끌어모으고 있다.
이스메네가 순종적인 여성상, 자아심리학적 윤리를 대변한다면 안티고네는 죽음충동과 함께 정신분석적인 윤리를 대변하면서 권력에 순응하지 않는 새로운 여성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안티고네의 죽음충동은 크레온의 질서를 파괴하고 국가의 법을 무력하게 만든다. 그것은 문명사회를 심각하게 뒤흔들고, 문명 이전으로 되돌리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일종의 스캔들, 이런 단절과 공백은 새로운 질서의 탄생으로 가는 세계의 균열이라고 볼 수 있다. 일종의 무정부 상태는 새로운 사회로 가는 징검다리인 것이다. 이같은 무로부터의 창조가 시작되는 것이 죽음충동이 갖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자아심리학에서 별 의미가 없는 ‘과잉행동’이 정신분석의 측면에서는 ‘경건한 범행’이 되고, 세계와 사회에 균열을 내고 새로운 질서의 탄생을 알리는 정치·윤리적 행위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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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오히려 피하려는 자에게 닥치고, 현실이 되었을 때 자신이 운명임이 증명한다. 그래서 운명은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운명을 피해 달아나는 중에 진짜 아버지를 만나고 그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다. 모든 것이 그가 알지 못하는 중에 벌어진 일이고,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눈을 찌르고 죽게 된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그렇지 않다. 안티고네는 자신이 무슨 행위를 하고 있는지 알고 있으며 자신의 행위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알고 있다. 안티고네는 ‘알고 있는 자’이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는 투사는 결국 죽게 된다. 성공하는 혁명은 매우 드물고 그 와중에 죽는 사람은 부지기수다. OO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는 혁명적 행위는 죽음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안티고네는 운명을 알고 있으며 그 운명을 향해 돌진한다. 그것은 라이오스에게서 오이디푸스에게로 그리고 이제 오이디푸스의 자녀들에게로 이어지는 ‘가문의 저주’라는 운명이다. 라이오스의 납치와 강간이라는 죄악이 아들 오이디푸스에게 저주로 넘어가고, 오이디푸스의 근친상간의 죄가 그의 자녀들에게 저주로 이어진 것이다.
과거의 죄들은 반드시 청산되어야 한다. 문제는 당대에 그 빚이 청산되어야 하는데 온전히 청산되지 못할 경우 후대로 이어지게 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정말 여실히 증명되는 것이다. 혈연이란 죄와 벌, 부채 등이 모두 유전되는 무서운 것이다. 가족이란 이런 식으로 모든 책임을 같이 지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안티고네는 오빠를 매장함으로써 가족 공동체의 빚을 청산하려고 한다. 안티고네 는 자신이 모든 책임을 떠맡고 죽으려는 것이다. 안티고네는 가문의 죄와 부채를 알고 있는 자로서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책임 있는 행동으로 이를 청산하는 윤리적 인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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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고네는 사랑하는 여성이다.
그녀는 오이디푸스의 마지막을 함께 한다. 근친상간을 저지르고 자신의 눈을 찔러 장님이 된 아버지를 끝까지 보살피는 사랑을 실천한다. 동시에 죽어서도 애도 받지 못하는 오빠를 장례하면서 그에 대한 사랑을 보여준다.
안티고네는 폴리네이케스가 반역자라는 속성을 거부하고, 그의 존재 자체를 사랑한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사랑의 윤리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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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죽음을 무릅쓰고 오빠의 장례를 치르고, 결국 자살하고 마는 안티고네의 행위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이런 일을 하는 인물도 거의 보기 어렵다.
여기서 안티고네가 신화적 인물이라는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해서 근친상간으로 낳은 딸이다. 그러므로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는 형제자매간이다. 안티고네는 이 사건 바로 직전 아버지이자 오빠인 오이디푸스의 장례를 치렀다.
장례란 애도의 행위의 끝이다. 우리는 장례를 치름으로써 죽은 자에 대한 우리의 애도의 행위를 끝낸다.
애도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에 대하여 깊이 슬퍼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장례를 치름으로써 우리는 애도를 끝낸다(완성한다). 그런 면에서 애도란 일종의 배신 행위인 것이다. 슬퍼하라, 그러나 완전히 잊어라! 이것이 애도의 진면목인 것이다. 우리는 장례를 끝내고 국밥을 먹으며 서로 웃는다. 산자는 계속 살아야 하니까.
그런데 문제는 아버지이자 오빠를 묻는 뒤 얼마 후에 안티고네는 또 한 명의 오빠를 직접 자기 손으로 묻는다. 애도와 애도의 반복, 거듭되는 장례와 장례.
어쩌면 안티고네에게 폴리네이케스 장례는 오이디푸스의 두 번째 매장이 아닐까. 폴리네이케스의 장례에 집착하는 것은 오빠이자 아버지인 오이디푸스에 대한 애도일 수 있다.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폴리네이케스, 그리고 에테오클레스까지, 이들 모두 같은 어머니 이오카스테가 낳은 자식들이다. (안티고네의 사랑 역시 근친상간적 욕망이라고 폄하될 가능성도 있다.)
애도는 궁극적으로 잊는 것이며 배신하는 것이다. 애도는 죽은 자를 저승으로 보내고 자신은 계속 사는 것이다. 하지만 안티고네는 애도를 끝내지 않는다. 안티고네는 죽은 자들 곁에 눕고자 한다. 어쩌면 안티고네의 애도는 실패한 애도일지도 모른다.
오이디푸스에 대한 끝나지 않는 애도, 폴리네이케스의 죽음과 매장하지 못함에 대한 고통 등이 안티고네로 하여금 죽음충동으로 이끈다. 이로써 인생의 모든 불행을 다 겪은 한 여성은 죽음을 통해 더 아름답고, 쾌락과 고통을 넘어선 열반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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