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페르난두 페소아 <송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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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페르난두 페소아 <송시들>

by 브린니 2020. 9. 10.

송시들 – 첫 번째 책

 

                                                              리카르두 레이스 Ricardo Reis

 

I

“굳건한 기둥에 나를”

 

나로 남을 시들의

굳건한 기둥에 나는 단단히 앉는다.

망각과 시간들의

끝없는 미래의 쇄도도 두렵지 않다.

정신이 그 안에서 집중해, 세계의 투영들을

사색할 때,

그것들은 혈장으로 변한다. 그리고 세계가 예술을

창조하지, 정신은 아니다.

바로 그런 식으로 찰나의 외부는 자신을 비석에

새긴다. 그 안에 존속하면서.

 

“고통스러워, 리디아”

 

고통스러워, 리디아. 운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내 자동차의 부드러운 바퀴들을

한순간 들어 일으키는 가벼운 조약돌이, 나의

심장을 무섭게 하네.

 

나를 바꾸려 위협하는 그 모든 것

나아지는 것이라 해도, 나는 증오하고 피해 다녀.

신들이 나의 인생을 항상

새로움 없이 그냥 두길

 

나의 날들이,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도

나를 거의 한결같은 사람으로 머물게 하기를,

하루가 어스름으로 저물 듯이 노년에

이르도록.

(1917년 5월 26일)

 

“신들에게 유일하게 바라는 건”

 

신들에게 유일하게 바라는 건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나는 자유로울 거야 – 행운도 불행도 없이,

삶이라는 바람처럼

아무것도 아닌 공기 중에.

 

증오와 사랑은 똑같이 우리를 찾지, 양쪽 다,

각자 자기 식으로, 우리를 억누르지.

신이 아무것도 베풀지 않는 자

바로 그에게 자유가 있지.

 

“셀 수 없는 것들이 우리 안에”

 

셀 수 없는 것들이 우리 안에 산다.

내가 생각하거나 느낄 때면, 나는 모른다

생각하고 느끼는 사람이 누군지.

나는 그저 느끼거나 생각하는

하나의 장소.

 

나에게는 하나 이상의 영혼이 있다.

나 자신보다 많은 나들이 있다.

그럼에도 나는 존재한다

모든 것에 무심한 채.

그들이 입 다물게 해 놓고, 말은 내가 한다.

 

내가 느끼거나 느끼지 않는

엇갈리는 충동들이

나라는 사람 안에서 다툰다.

나는 그들을 무시한다.

(1935년 11월 13일)

 

                                     ―페르난두 페소아 Fernando Pessoa(포르투갈, 1888-1935)

 

                                           * 리카르두 레이스 Ricardo Reis : 페소아의 필명 중 하나

 

【산책】

 

'가시나무'라는 노래엔 이런 구절이 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타자가 들어올 틈도 없이 나의 내면을 꽉 들어차 버린 ‘나’

과연 내가 몇 개까지 들어 있는 것일까.

 

내 속에 내가 12개까지 있어도 병원에 가지는 않는다고 한다.

12개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을 수 있는 수.

하지만 좀 많은 게 사실이다.

 

나에게는 하나 이상의 영혼이 있다.

나 자신보다 많은 나들이 있다.

 

시인에게도 나를 넘어서는 나들이 있다.

내가 아니라면 점에서 그들은 타자이다.

하지만 내 속에 있는 것들이므로 나인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내가 아니면서 나인 그들이 나에겐 있다.

 

내가 느끼거나 느끼지 않는

엇갈리는 충동들이

나라는 사람 안에서 다툰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무시한다.

 

나는

모든 것에 무심한 채.

그들이 입 다물게 해 놓고, 말은 내가 한다.

 

그리고

내가 아는 나에게 그들은

아무것도 불러 주지 않지만, 나는 쓴다.

 

페소아는 자기 속에 많은 내가 있지만 그들을 무시고, 입다물게 하고, 내가 주체로 말하고 글을 쓴다.

 

수많은 나는 갖가지 충동과 욕망으로 서로 싸운다. 하지만 주체인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잠잠하게 한다.

그들은 시인인 나에게 아무것도 불러줄 수 없다. 시는 오직 나만이 쓸 수 있다.

 

그들은 내 속에 있지만 주체인 내가 그들을 추방해 버리기 때문에 사실상 그들은 나의 외부에 있는 것과도 같다.

 

가끔은 그들이 내 속을 다 차지하고 내가 마치 바깥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흔히 말해 소외라는 것. 자기 소외. 내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는 것.

 

어떻게 내가 나의 바깥에 존재할 수 있는가.

아주 짧은 순간 내가 내가 아닐 때가 있다.

 

주체와 에고(자아)의 분리라고나 할까.

 

내가 잘 아는 나를 에고(자아)라고 할 때

시를 쓸 때처럼 스스로 시를 쓰는 주체가 있다.

 

에고(자아)는 시를 마치 내가 아닌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어떤 것이 쓰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이때 시를 쓰는 ‘나(주체)’는 나의 바깥에 존재한다.

 

세계가 예술을

창조하지, 정신은 아니다.

 

바로 그런 식으로

찰나의 외부는 자신을 비석에

새긴다. 그 안에 존속하면서.

 

나의 정신이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시를 쓴다.

세계는 나의 외부에 있다.

 

그러나 시를 쓰는, 아주 짧은 순간 그것은 내 속에 있다.

그러므로 시를 쓰는 주체는 나의 내부에 있으면서 동시에 밖에 있다.

 

찰나의 외부.

 

예술을 한다는 것은, 예술을 직업으로 하는 예술가들은, 가끔 주체가 존재의 바깥에 있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넋이 나갔다고 놀리곤 한다.

 

그렇다. 예술가들은 영혼이 자주 외출 나가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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