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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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by 브린니 2020. 9. 3.

저명한 생물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과학적 사고에 익숙했던 올더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1932) 과학의 발달로 인간이 모두 인공적으로 제조되는 미래 사회를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으며, 20세기에 쓰여진 미래소설 가운데 가장 현실감이 있는 작품으로 지금까지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책은 가상의 9년간의 세계 대전쟁이 끝난 세계가세계국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된 뒤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공동체, 동일성, 안정성이라는 표어 그대로 세계인들이 모두 공동체가 되어 안정되고 동일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목적하에 모든 것이 획일적으로 조직되어 있습니다.

 

우선 인간을 자연출산하지 않고 인공배양하여 다섯 계급으로 나누되 계급이 각자의 자리에서 매우 만족한 상태에서 안정적으로 일하고 살아갈 있도록 수면중에 계속해서 세뇌교육을 실시합니다.

 

모든 인간은 결혼이라는 속박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성생활을 즐기며, 고독하지 않고 즐거운 기분을 느낄 있도록 소마라는 약물을 수시로 복용합니다. 즐거움을 위해 실제 상황처럼 느껴지는 촉감영화를 보고 스포츠를 즐깁니다.

 

자연 상태에서 일어나는 삶의 억압과 고독과 불만족을 모조리 제거하고 오로지 행복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모든 조건을 충족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삶에도 회의를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버나드와 헬름홀츠는 상위권 계급이지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이런 행복에 오히려 억압을 느끼고 강요당하고 있는 듯한 불만을 느낍니다.

 

이들 사이에는 레니나라는 여성이 있는데, 여성은 버나드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레니나와 버나드는 야만인 보호구역에 가서 자연출산으로 태어난 존을 만나 함께 신세계로 돌아옵니다.

 

야만인 존은 자연적인 인간의 모습을 지닙니다. 신세계 인간들에게는 없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미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슬픔의 감정을 지니며, 보다 고귀한 가치들을 좇는 영혼의 그리움을 가진 인간입니다. 존은 버나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같으면 당신이 누렸던 거짓되고 기만적인 행복을 맛보느니 차라리 불행 쪽을 택하겠습니다.”

 

존은 틈만 나면 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읽습니다. 그에게 사랑은 목숨을 만큼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존에게 매력을 느낀 레니나가 그렇듯 쉽게 육체적 사랑을 나누려 하자 존은 토할 같은 거부감을 느끼고 화를 냅니다.

 

존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하는 소마를 먹으려고 하자 무서운 것을 먹지 마십시오. 그것은 독입니다. 신체의 독일 아니라 영혼의 독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자유를 주러 왔습니다. 여러분은 노예 신분이 좋습니까? 여러분은 갓난아기 상태가 좋습니까?”라고 말하며 창문 밖으로 소마를 줌씩 버립니다. 그러곤이제 인간들이 되었어! 여러분은 자유로워진 것입니다.”라고 외칩니다.

 

하지만 경찰관들에게 잡혀 수사를 받게 되며 총통의 서재에 끌려가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사실 총통과 나누는 대화야말로 올더스 헉슬리의 내면에 가득한 사상이라고 있습니다.

 

총통은 세익스피어의 <오셀로>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오셀로> 훌륭하지. 이곳의 촉감영화보다 훌륭해. 하지만 그것은 안정을 얻기 위해 지불해야 희생인 것이야. 우리는 행복과 소위 말하는 고도의 예술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 우리는 고도의 예술을 희생시킨 셈이지.”

 

그러자 야만인 존이 묻습니다. “그밖에 희생한 것은 없습니까?”

총통은 대답합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종교지.”

 

총통은 인간은 나이가 듦에 따라 격정이 진정되고 종교감정이 성장하게 되며 신이 마치 구름 뒤편으로부터 나오듯 자태를 드러내어 인간의 영혼은 모든 빛의 원천인 신을 느끼고 보고 그곳으로 향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또한 인간은 영속성이 있는 무엇, 인간을 배신하지 않을 무엇, 다시 말해서 절대적이고 항구적인 진리 같은 어떤 것에 의지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기 때문에 어쩔 없이 신에게 눈을 돌리지 않으면 되며, 종교적 감정은 그것을 경험하는 영혼에게 순수한 것이고 매우 행복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쯤 되면 총통은 신세계적 인간이라기보다는 자연 상태의 인간에 대해 매우 정통한 지식을 갖고 있는 인간이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종교적 깨달음의 험난하고 좁은 길을 매우 쉽게 건너뛸 있는 방법을 고안하였습니다. 그것은 소마입니다. 총통의 말을 다시 살펴봅니다.

 

우리에게는 분노를 진정시키고 적과 화해시키고, 인내하고 수난을 참도록 하는 소마가 있다 말이야. 옛날에는 대단히 어려운 노력을 거치고 오랜 수양을 쌓아야 겨우 도달되는 미덕이었지. 그러나 이제 그램짜리 두세 알만 삼키면 그러한 수양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말일세. 참회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도 기독교 정신을 터득하는 -그것이 소마의 본질일세.”

 

이에 야만인 존은 대답합니다.

저는 안락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원합니다.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

 

진정한 참회는 죄를 회개하는 눈물로 시작된다는 것을 알기에 존은 위험과 고통과 죄의 어둠을 통과할 있는 자유의지를 원합니다.

 

그러자 총통은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말할 것도 없이 나이를 먹어 추해지는 권리,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먹을 것이 떨어지는 권리, 이가 들끓을 권리,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끊임없이 불안에 권리, 온갖 표현할 없는 고민에 시달릴 권리도 요구하겠지?”

 

침묵이 흐른 , 야만인 존은 대답합니다. “저는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일이 있은 후에 야만인 존은 문명을 거부하고 인적이 드문 곳에서 살아가다가 어느 등대 꼭대기에서 죽어갑니다.

 

그렇다고 해서 올더스 헉슬리가 야만인 존을 무슨 영웅처럼 묘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2차세계대전을 경험한 대부분의 지성인들이 그렇듯 헉슬리 역시 서양 기독교 역사와 사상에 대한 심한 회의를 느꼈고, 존에게 부여된 모습 또한 다소 기괴해 보일 만큼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말미에 야만인 존이 사람들에게 채찍으로 맞고 조롱을 당하긴 하지만, 모습이 수난당하는 예수의 모습과는 다른 형태로 그려집니다. 자신을 찾아온 여인 레니나에게 매춘부라고 욕하고 채찍을 들어 때리려 하다가 레니나가 도망을 가자 자기 자신의 몸에 학대하듯 채찍질을 하는 모습은 오히려 광신적인 형태로 잘못되어간 수도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혐오스럽게 느껴집니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 통해서 과학과 종교 모두에 회의를 보여줍니다. 그가 자라면서 사상적 배경으로 익혀왔던 과학과 기독교 모두 그에게 배신감을 느낄 정도의 어두운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핵무기를 만드는 사용되었고, 하늘의 별을 탐험하기 위해서 우주를 꿈꾸며 만들었던 로켓은 적진을 공격하는 미사일 로켓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과학이 꿈꾸는멋진 신세계 기독교가 말하는 하늘과 땅의 낙원인멋진 신세계모두 그에게는 고통을 안겨주는 헛된 꿈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성인이 자신을 이루고 구성하는 커다란 사상 줄기에 타격을 입는다는 것은 정체성과 존재 자체에 위협을 당하는 일입니다. 그의 고뇌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갑니다.

 

결국 올더스 헉슬리는 2차세계대전이 끝난 새로운 3세계를 꿈꿉니다. <멋진 신세계>에서는야만이냐, 문명이냐라는 양자택일의 구도였다면, 이제는 문명국으로부터의 망명자나 도망자들이 건설하는 3사회의 존재를 설명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3 사회에서 종교는 인간의궁극적 목적 자각적 지적탐구가 되고, 우주는 내재하는 () 또는 로고스, 초월적인 브라만의 조화적 지식이 된다고 합니다. 결국브라만이라고 하는 힌두교의 이름이 등장하는군요.

 

2차세계대전을 겪은 많은 지식인들이 서양의 기독교 사상에 회의를 느끼고 새로운 길을 찾아 동양의 종교를 탐구하여 새로운 인식으로 나아갔는데, 올더스 헉슬리 역시 길에서 예외가 아닌가 봅니다.

 

그는 이후 동서고금의 신비사상에 몰입하였고 동양적인 무집착의 덕을 지도원리로 추천한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다소 현실도피적 색채를 가공의 소설 <원숭이와 본질> 발표했습니다. 아직 책을 읽어보지 못해 유감입니다. 책을 읽어보고 이어 리뷰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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