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싯 몸 <달과 6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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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by 브린니 2020. 9. 7.

고등학교 1학년 때 짝꿍은 수녀가 되고 싶다던 조그만 여자아이였습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견습 수녀 마리아처럼 짧은 커트머리를 한 그 아이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한 며칠 학교를 안 나왔는데 수녀가 되겠다고 집을 나갔다가 부모님과 선생님께 붙잡혀 다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그 친구와 세계 고전문학을 한 권씩 읽어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그 시절 가장 즐거운 추억이었죠. <유리알 유희> <수레바퀴 아래서> 같은 책들을 잃었는데, 그 때 이 책 <달과 6펜스>도 읽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 일생일대의 역작을 집 안쪽에 벽화로 그려놓고 주인공 화가가 죽으면서 유언으로 그 집을 불태워 달라고 부탁하여 활활 타올라 재로 변했다는 부분이 그리도 가슴 아프고 낭만적이며 예술적으로 느껴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이 책을 읽으면서는 화가 나서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며 읽었답니다. 그렇게 감상의 느낌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게 세월이 주는 변화인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의 작가 서머싯 몸은 의사였다가 안정된 생활을 뒤로 하고 작가의 길에 들어서 화가들과 보헤미안적 삶을 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 자신의 삶이 <달과 6펜스>의 주인공인 화가 찰스 스트릭랜드에게 투영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화가 고갱의 삶을 모티브로 하여 쓴 소설인데 고갱도 실제로 증권 중개인이었다가 안정된 삶을 버리고 35세에 직업화가로 전향한 것을 보면, 예술가로서 고갱과 서머싯 몸 자신의 모습을 동일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스트릭랜드도 런던의 증권 중개인이며, 결혼 생활을 17년 동안 하면서 아들과 딸을 낳고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다가 갑자기 그림을 그리겠다며 훌쩍 파리로 떠나는 인물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가정을 등지고 떠난 그는 아내와 아이들에 대해서 그 어떤 죄책감이나 미안함을 보이지 않습니다. 평소에 아내는 자기 남편이 정말 지루하고 따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것은 스트릭랜드의 내면에서 가정이 차지하는 비중이 많지 않았고 그만큼 생각할 여지도 없었고 무관심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스트릭랜드의 성품과 말과 행동은 철저히 서머싯 몸이 꿈꾸는 예술가에 대한 무의식적 소망이 투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스트릭랜드는 순수하게 예술을 위한 예술로서 그림을 그립니다. 누구에게 보이려고도 하지 않고, 그림을 팔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현실을 넘어서는 무한한 세계, 영원하고 우주적인 세계를 방황하는 그의 정신이 추구하는 것을 그릴 뿐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서머싯 몸 자신이 꿈꾸는 예술가의 자세일 것입니다. 이 책에서 교양있는 삶을 살려 노력하는 스트릭랜드의 부인이 주최하는 파티에 모인 작가들은 글을 쓰고 나면 어느 출판사에서 책을 내야 원고료를 많이 받을 수 있는지, 어느 출판사가 광고를 많이 해주는지 등에 끊임없이 신경을 쓰고, 한 작가가 자리를 뜨면 다른 작가들이 그의 험담을 하고 약점을 잡기에 바빠 상대방을 낮춤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붙들려 발버둥을 치는데, 화가 스트릭랜드는 그저 묵묵히 그림을 그릴 뿐입니다. 그저 그리고 나면 그 이후에 그 작품이야 어떻게 되든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이 태도야말로 서머싯 몸이 흠모하는 모습인 것 같습니다. 그는 이 책에 이렇게 썼습니다. “작가란 글 쓰는 즐거움과 생각의 짐을 벗어버리는 데서 보람을 찾아야 할 뿐, 다른 것에는 무관심하여야 하며, 칭찬이나 비난, 성공이나 실패에는 아랑곳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무의식 안에는 이처럼 초연하고 초월적인 것을 향한 소망이 있는가 하면, 어둡고 침침한 야만적 본능 또한 막강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서머싯 몸은 그러한 모습도 여과없이 스트릭랜드에게 투영합니다. 스트릭랜드는 사회적인 통념하에 도덕적 기준과 잣대로 정해진 당위에 대해서 전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어떻게 가정을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는가, 양심도 없는가, 라는 질문에 아무렇지도 않다고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지극히 이기적인 대답이지만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본능에 충실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더 이상 직장생활을 하며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일에 끌려다니고 싶지 않다는 소망, 자신의 모든 삶을 그림 그리는 데 불태우고 싶다는 욕망 하나로 모든 도덕적 비난을 다 감수합니다. 그에게 가정에 대한 사회적 책임은 6펜스에 불과합니다. 가장 작은 단위의 화폐에 불과한 것을 위해 일생을 바치고 싶지 않다는 내면의 욕구를 온전히 따릅니다.

 

그는 6펜스가 아니라 ‘달’을 택합니다. 하늘의 달을 바라보는 일 외에는 신경을 쓰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잡히지 않으나 고개를 우러러 희구하는 달로 상징되는 것은 그가 도달하고 싶은 최고의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현실을 바라보는 눈으로는 그려낼 수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가 인생 말년을 남태평양 타히티 섬에서 보낼 때 문둥병에 걸려 결국 장님이 되면서 앞이 보이지 않자 오히려 눈으로는 볼 수 없었던 이상향 최고의 낙원을 그림으로 그려냅니다. 그것은 천지창조의 낙원과도 같은 아름다움을 담은, 평생을 찾아 헤맨 진리의 시원이었습니다.

 

반면 작가 서머싯 몸은 스트릭랜드의 선택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당하는가를 자세히 묘사합니다. 마치 무의식적 우상을 갈망하지만, 그로 인해 현실이 어떻게 될 걸 아는 자아의 언어 같습니다. 이 작품에서 화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작가 ‘나’는 현실 속에서 스트릭랜드에 의해 상처받은 주변 인물들을 변호하고 대변하며 그들의 심부름으로 스트릭랜드에게 말을 전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화자인 작가 ‘나’는 자아의 역할에 합당하게 때로는 심하게 스트릭랜드를 비난하고 욕하고 무시하고 혐오합니다. 하지만 그에게 끌리는 마음을 억제하지 못합니다. 자아의 아랫부분을 구성하는 엄청나게 큰 무의식의 욕망을 모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트릭랜드는 때때로 야수적인 본능을 드러냅니다. 자신에게 매력을 느껴 사랑하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친구의 아내를 오히려 범합니다. 이유는 자신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몹시도 큰 존재로 인정한다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그 자신이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숭고한 사랑의 자리는 없습니다. 사랑처럼 이율배반적인 대극의 행위가 섞여 있는 것이 없습니다. 사랑은 가장 추상적이며 숭고한 것인 동시에 가장 본능적이고 육체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머싯 몸이 비판을 받는 지점이 여기에서 등장합니다. 그에게는 여성혐오의 기운이 있다는 것입니다.

 

스트릭랜드는 여성을 욕망의 배출구로 여길 뿐 ‘사랑’이라는 감정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가 하는 말을 보면 여성주의자들은 이 책을 금서로 여기고 말 것입니다. “여자란 알 수 없는 동물이요. 개처럼 취급하고 팔이 아프도록 두들겨 패도 여전히 사내를 사랑한단 말이오. 그러니 여자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건 기독교의 망상 가운데도 제일 터무니없는 망상이죠.”

 

타히티 섬에서 머물면서 나이 오십에 가까운 스트릭랜드는 겨우 십칠 세 소녀 아타와 결혼을 하는데, 그녀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나는 너를 때릴 거야.” 그러자 소녀는 대답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를 사랑하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인지, 자신을 때려야만 자신을 사랑하는 줄 알 거라는 이 말에 대해서 현대 여성들은 혐오감을 느낄 것입니다. 오늘날 같으면 뉴스 기사를 장식할 만한 발언이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성 일반에 대해서 말도 안 되는 편견을 보여줍니다. “남자의 정신은 우주의 저 머나먼 곳에서 방황하는데 여자는 그걸 자기 가계부 안에다 가둬두려고 하는 거요.”

 

여성의 지성과 영혼과 감성이 어떻게 우주적 생명과 연결되어 있는지 그림으로 잘 나타낸 레메디오스 바로와 같은 여성 미술가는 서머싯 몸의 이러한 발언을 들으면 코웃음을 칠 것입니다. 여성이야말로 진정 우주를 떠도는 생명과 진리의 시원에 맞닿아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서머싯 몸은 1874년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때 우리나라는 고종이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섭정에서 막 벗어나려던 참이었으니, 여성에 대한 차별이 이보다 더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성 참정권만 보아도 영국은 1928년에, 프랑스는 1944년에 주어졌으니 여성이 인간이 된 지 아직 100년도 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가끔 잊고 삽니다.

 

이 책은 작가 화자를 통해 아주 지성적으로 쓰여졌으나 사실은 아주 원색적이고 야성적이며 본능에 충실한 작품입니다. 아마도 고갱의 그림이 원색적이듯 서머싯 몸은 철저히 그 불타오르는 감각을 그대로 살리고 싶었겠지요. 그렇다면 이 책은 성공적인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작가 서머싯 몸은 스트릭랜드를 통해 모든 현실의 굴레를 벗어나 본능적인 예술혼을 불태움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우주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이 가능했다고 아름답게 그렸지만, 인류 정신사에서 그런 방식으로 가장 높은 정신의 경지에 도달한 경우를 찾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그런 방식은 정신병으로 발전하여 자살하거나 방탕한 생활 끝에 오는 매독으로 사망하였습니다. 고갱 또한 매독으로 고생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었고, 니체와 고흐는 정신병으로 고생하다 죽었습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서양 역사를 짓눌러온 기독교 사상에 대한 회의로 신의 죽음을 온몸으로 외치거나 이성 계몽주의에 대한 반발로 욕망과 몸의 이론을 내세우는 사상적 경향성의 가치도 인정할 만한 부분이 있으나 결국 인간은 윤리의 길을 버리는 한 파멸로 향하게 된다는 단순한 인과율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거듭 확인하게 됩니다.

 

화가 박수근은 가정에 충실한 가장이었으며 길가의 노점상 할머니들을 안쓰러이 여겨 각 노점상들을 지나면서 한 가지씩 물건을 사주었다는 일화를 듣습니다. 6펜스의 가치가 무엇인지 아는 이의 선함입니다.

 

물론 삶의 부조리함 때문에 분노에 불타오를 수도 있고, 메마른 책임의 무게가 견디기 힘들어 벗어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 사랑의 대극은 가장 높고 추상적이며 가장 낮고 동물적인 육체성을 동시에 띠듯이 우리의 삶 역시 두 대극의 합일과 조화를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굶주림과 가난을 무릅쓰고 예술혼을 불태우는 삶의 고결한 의지보다 결코 낮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어려운 좁은 길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머싯 몸의 예술에 대한 가치관은 많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싶습니다.

 

오늘날도 '예술가의 삶은 망쳐질 필요가 있다'며 도덕의 선을 넘어 스스로 어둠의 길을 걸어가면서 파멸로 향하는 예술가들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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