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체 게바라 <선택>
본문 바로가기
독서 리뷰

[명시 산책] 체 게바라 <선택>

by 브린니 2020. 9. 3.

선택

 

 

적의 급습을 받은 동지 하나가

상황이 위급하다며 지고 가던

상자 두 개를 버리고

사탕수수밭 속으로 도망가버렸다

하나는 탄약상자였고

또 하나는 구급상자였다

 

그런데,

총탄에 중상을 입은 지금의 나는

그 두 개의 상자 가운데

하나밖에 옮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과연,

의사로서의 의무와

혁명가로서의 의무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나는

내 생애 처음으로 깊은 갈등에 빠졌다

 

너는 진정 누구인가?

의사인가?

아니면,

혁명가인가?

지금

내 발 앞에 있는

두 개의 상자가 그것을 묻고 있다

 

나는

결국 구급상자 대신

탄약상자를 등에 짊어졌다

 

                          ―체 게바라(Che Guevara | Ernesto Guevara de la Serna 아르헨티나, 쿠바 1928-1967)

 

 

【산책】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교 의학 박사 학위를 갖고 있는 체 게바라는 왜 탄약 상자를 지고 가야 했을까.

 

의사를 버리고 혁명가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강요된 선택의 순간.

구급상자 대신 탄약상자를 등에 짊어지고 중상을 입은 채 적을 피해 후퇴하고 있는 혁명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는 그 순간에 혁명가의 마음은 어떻게 요동치고 있었을까.

 

누구나 어떤 선택의 순간이 오면 자신의 인생을 걸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탄약과 의약품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 어떤 것을 우선해야 하는가.

 

요즘처럼 코로나의 시대엔 의약품이 더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혁명의 시대, 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체 게바라 자신이 중상을 입고 달아나고 있음에도 탄약을 짊어져야 했을까?

 

그는 아군을 살리는 의약품보다 적을 죽이는 탄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혁명의 시대가 요구하는 선택일 것이다.

 

총으로 적을 제압해야 혁명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혁명이 피를 요구하고, 그 피는 아군이나 적군이나 상관없이 평등하게 흘릴 수밖에 없다.

 

죽음이 코앞에 있기에 한 사람은 상자 두 개를 모두 버리고 달아났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상자 두 개 중 하나밖에 들고 갈 수 없어 고민한다.

그리고 그 중 하나를 들고 총알을 피해 절뚝거리며 달아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달아나고 있으나 역사는 한 사람만을 기억한다.

한 사람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고, 한 사람은 어느 것 하나라도 선택했다.

 

 

선택이란 언제나 강요된 선택이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선 선택 자체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미 선택이 강요된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이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 강요된 선택은 언제나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설령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었을지라도 선택은 불가피하다.

선택은 결과의 잘 잘못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강요되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간혹 사람들은 그것을 운명의 장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