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적의 급습을 받은 동지 하나가
상황이 위급하다며 지고 가던
상자 두 개를 버리고
사탕수수밭 속으로 도망가버렸다
하나는 탄약상자였고
또 하나는 구급상자였다
그런데,
총탄에 중상을 입은 지금의 나는
그 두 개의 상자 가운데
하나밖에 옮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과연,
의사로서의 의무와
혁명가로서의 의무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나는
내 생애 처음으로 깊은 갈등에 빠졌다
너는 진정 누구인가?
의사인가?
아니면,
혁명가인가?
지금
내 발 앞에 있는
두 개의 상자가 그것을 묻고 있다
나는
결국 구급상자 대신
탄약상자를 등에 짊어졌다
―체 게바라(Che Guevara | Ernesto Guevara de la Serna 아르헨티나, 쿠바 1928-1967)
【산책】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교 의학 박사 학위를 갖고 있는 체 게바라는 왜 탄약 상자를 지고 가야 했을까.
의사를 버리고 혁명가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강요된 선택의 순간.
구급상자 대신 탄약상자를 등에 짊어지고 중상을 입은 채 적을 피해 후퇴하고 있는 혁명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는 그 순간에 혁명가의 마음은 어떻게 요동치고 있었을까.
누구나 어떤 선택의 순간이 오면 자신의 인생을 걸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탄약과 의약품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 어떤 것을 우선해야 하는가.
요즘처럼 코로나의 시대엔 의약품이 더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혁명의 시대, 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체 게바라 자신이 중상을 입고 달아나고 있음에도 탄약을 짊어져야 했을까?
그는 아군을 살리는 의약품보다 적을 죽이는 탄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혁명의 시대가 요구하는 선택일 것이다.
총으로 적을 제압해야 혁명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혁명이 피를 요구하고, 그 피는 아군이나 적군이나 상관없이 평등하게 흘릴 수밖에 없다.
죽음이 코앞에 있기에 한 사람은 상자 두 개를 모두 버리고 달아났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상자 두 개 중 하나밖에 들고 갈 수 없어 고민한다.
그리고 그 중 하나를 들고 총알을 피해 절뚝거리며 달아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달아나고 있으나 역사는 한 사람만을 기억한다.
한 사람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고, 한 사람은 어느 것 하나라도 선택했다.
★
선택이란 언제나 강요된 선택이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선 선택 자체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미 선택이 강요된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이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 강요된 선택은 언제나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설령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었을지라도 선택은 불가피하다.
선택은 결과의 잘 잘못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강요되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간혹 사람들은 그것을 운명의 장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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