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이근화 <단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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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이근화 <단추>

by 브린니 2020. 9. 2.

단추

 

 

몇 개의 단추로

몸을 가릴 수 있는 건 고마운 일

단추를 채우면 따뜻하고

덜 부끄럽고

자신감이 솟아오른다

 

단추는 단단하고

단추는 부드러워

열을 맞추어 매달려 있는 것이 목숨 같네

간신이 매달려 있는 것 같지만

뜯어내지 않아도 좋다

 

차례대로 단추를 끄르거나

성급히 단추를 채울 때

부끄럽고 무안하고

자꾸만 작아지는 단추가

손끝에서 미끄러진다

 

바닥에 떨어진 단추를 집어 올릴 때

반으로 쪼개진 단추를 볼 때

단추는 가엾구나

단추는 없구나

누가 나를 지키나

 

단추는 나를 놀리고

나의 눈을 바닥에 깔고

나의 손가락을 농락한다

단추를 매달 때는 여유를 주어야 한다

실을 돌돌 감아 단추의 목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이근화

 

 

【산책】

언젠가, 아마 광주 비엔날레인가, 아니면 어느 큰 전시회에서 단추로 커다란 회화 작품을 만들어 놓은 것을 본 적이 있다.

 

Augusto Esquivel 작품과는 전혀 다른, 그냥 단추로 색을 대신한 회화였다.

 

그림의 형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커다란 캔버스에 온통 단추가 갖가지 크기로, 각양각색의 색깔로 빛나고 있었다.

 

분명 한국 작가의 작품이었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기억이란 것이 언제나 배반하는 것을……

 

아무튼 단추로 만든 회화작품은 멋있고 아름다웠다.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랬으리라.

 

멋있고, 아름답고.

 

단추는 단단하고

단추는 부드러워

열을 맞추어 매달려 있는 것이 목숨 같네

 

그래서

 

실을 돌돌 감아 단추의 목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그런데 목이 생기면 목이 달아나거나 목을 치거나 목을 매달거나 할 수 있으니 정말 더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아끼는 옷을 입고 외출했는데 단추가 떨어져나갔을 때의 낭패감이란……

단추를 주우려는데 단추가 굴러가 맨홀로 빠져 버렸을 때의 절망감이란……

 

단추를 우표수집 하듯이 모으는 사람도 있고,

단추로 복식사 학위 논문을 쓰는 사람도 있다.

 

단추 구멍만한 눈을 가진 사람도 있고,

단추 구멍으로 다른 사물을 보는 사람도 있고,

 

단추 구멍 사이로 보이는 사람도 있다.

 

단추는 대개 4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혹은 2개의 눈을 가진 것도 있다.

 

두 개의 눈을 가진 단추는 사람하고 닮았다.

 

눈이 하나밖에 없는 단추는 없다.

실이 들어가고 나가는 구멍이 2개는 있어야 바느질이 가능하다.

 

들고 나는 숨구멍

들어왔으면 빠져 나가야 한다.

 

들숨 날숨

단추는 두 개의 심장으로 호흡한다.

 

두 개 혹은 4개로 된 구멍 난 심장을 단추는 갖고 있다.

그래서 단추는 실연당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음에 구멍이 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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