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진은영 <달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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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진은영 <달팽이>

by 브린니 2020. 8. 31.

달팽이

 

 

집을 등에 이고 사는 것들은

모두 달로 가야 한다

나뭇잎 위에 앉아 있는 달팽이를 본 적이 있는가

배경으로 언제나 달이 뜬다

집이 아니야 짐이야

그 짐 속에는 아버지가 주무시고

어머니가 손톱을 깎으신다

동생은 수학 문제를 풀고

아버지 돌아가셨으면 좋겠어요

어머니 외출하셨으면 좋겠어요

꿈속에서 나는 자주 아버지를 총으로 쏴 죽였다

제발 나타나지 마세요 아버지 자꾸 죽어요

내 집이 피로 붉어요

얘야 노을이 져야 달로 간다

나는 너에게 가르쳐주고 싶다

달이 창백한 건 일찍 나왔기 때문이 아니야

달은 출혈의 산물이야

 

내가 얼마나 피 흘리고서야 잔잔히 떠오르겠습니까

 

                                                               ―진은영

 

 

【산책】

달팽이가 집을 메고 기어가는 걸 보고 있으면 시간이 한 없이 잘 간다.

달팽이가 몇 밀리 집을 옮기자 시계 바늘은 몇 눈금 지나갔다.

 

비가 오면 달팽이의 집이 굴러 떨어져 어디론가 떠내려간다.

그러나 달팽이는 집을 잃지 않는다.

 

집과 몸이 하나니까.

다행이다.

 

달팽이가 기어서 달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몇 억 광년쯤?

 

과연 그 몇 억 광년이란 도대체 얼만큼일까?

세상엔 알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잴 수 없는 시간도 많고 헤아릴 수 없는 수치들도 많다.

 

서울 집값은 수십 억한다고 한다.

그런데 1억을 본 적도 세어본 적도 없다.

 

그런데 왜 달팽이는 달로 가는 것일까.

어느 소설가는 달의 뒤편으로 자전거를 타고 떠났다.

 

왜 뒤편일까?

우리가 매일 밤 바라보는 달은 앞쪽이란 말인가.

 

매일 매일 앞만 보며 산단 말인가.

그녀의 옆모습이 예쁘지 않아서 선 본 여자와 더 이상 진도를 빼지 못한 선배가 있다.

앞얼굴은 예뻤어. 근데 항상 앞만 볼 순 없잖아. 선배가 말했다.

 

그 말이 타당한지 생각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말이 맞는 것인지 사실 아직 잘 모르겠다.

 

옆이나 뒤가 예쁘지 않는 여자는 어떤 여자일까, 잘 떠오르지 않는다.

앞만 예쁜 여자는 또 어떤 여자일까.

 

보지 않고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

 

달이 창백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너무 피를 많이 흘려서?

 

마녀들은 대체로 얼굴이 창백하다.

피에 굶주려서?

아니면 마녀들은 달거리를 너무 세게 하나?

 

달팽이가 집을 메고 살듯 여자들은 달을 품고 산다.

어쩌면 머지않아 여자들은 모두 달로 외출할지도 모른다.

 

집에는 아버지들만 남아서 서로를 향해 총질을 해댈 것이다.

아버지 제발 죽어주세요. 매일 두 번씩 죽는 아버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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