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이병률 <정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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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이병률 <정착>

by 브린니 2020. 8. 30.

정착

 

 

만약 내가 여자였다면 집을 지었을 것이다

아프리카 마사이 여부족처럼

결혼해서 살 집을 내 손으로 지을 것이다

 

꽃을 꺾지 않으려는 마음도 마음이지만은

꽃을 꺾는 마음도 마음이라고 말할 것이다

 

내가 여자라면 사랑한다고 자주 말할 것이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신을 매번 염려할 것이다

 

내가 여자라면 칼을 들고 산으로 빨려 들어가 춤을 출 것이다

 

그러다 작살을 쥐고 한 사내의 과거를 헤집을 것이다

외롭다고 말한 뒤에 외로움의 전부와 결속할 것이다

 

내가 여자로 태어난다면 고아로 태어나

이불 밑에다 북어를 숨겨둘 것이다

 

숨겨 두고 가시에 찔리고 찔리며 살다

그 가시에 체할 것이다

 

생애 동안 한 사람에게 나눠 받은 것들을

지울 것이다

생략할 것이다

 

                                                        ―이병률

 

 

【산책】

지금까지 많은 여자들은 스스로 집을 짓기보다 집을 지을 수 있는 남자를 선택해왔다. 그러므로 시인의 말처럼 자신이 여자라면 집을 짓겠다는 말에 적극 찬성한다. 이제 여자들은 직접 집을 지어야 한다. 그래야 한 인간이 된다. 이제 여자들은 스스로 혼자 설 수 있는 온전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꽃을 꺾는 마음도 마음이라면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 말을 염려하는 짓은 이제 하고 싶지 않다. 지금까지 많은 여자들이 그렇게 해온 일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시인 존 던은 이렇게 말하였다.

“소녀들이여, 언제 남자가 먼저 시작했던 적이 있었던가.”

 

많은 여자들이 먼저 남자의 몸에 손을 대지는 않지만, 눈빛으로 나의 꽃을 꺾어달라고 뜨겁게 말함으로 남자들의 손이 움직이게 만든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계속 염려한다. 이 남자가 날 갖고 나면 날 버리면 어떡하지, 걱정하고 불안해한다.

 

그러니 여자들이여, 솔직해지면 좋겠다. 내가 먼저 다가와도 괜찮다는 눈빛을 보냈다는 것을 인정하자. 그리고 함부로 사랑한다고 말하지 말고, 일단 사랑한다고 말했고 사랑했다면 염려하지 말자. 사랑하였으므로 후회 없다고 말하자. 제발!

 

왜 시인이 여자라면 칼을 들고 산으로 들어가 춤을 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에게 칼은 무엇일까, 산은 무엇이며 왜 산에 들어가 춤을 출까. 마녀를 연상시킨다. 물론 여성 정체성을 자각하던 많은 여자들은 스스로 “나는 마녀다”라고 외치기도 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과거 여성을 마녀사냥으로 죽이던 수많은 남성들에 대한 분노를 나타내기도 했지만, 시인이 그것을 연상하며 썼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작살을 쥐고 한 남자의 과거를 헤집겠다는 시인의 발상은 너무 남자다운 발상이다. 이미 수많은 여자들은 그런 방식으로 사랑을 해왔다. 이미 그렇게 해왔고 그렇게 하기를 바랐지만, 남자들은 스스로의 동굴 안으로 기어들어가며 여자들이 원하는 두 외로움의 결합을 거부했다.

 

아니, 그것은 인간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동성 간이든 이성 간이든 어떤 인간도 다른 인간을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그 과거를 완전히 헤집을 수는 없으며, 서로의 외로움을 완전히 이해할 수도 완전히 감싸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의 이 발상은 다분히 남자의 소망에 가깝다. 남자들은 이 소망을 동경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이렇게 되기를 거부한다. 그래서 여자들은 남자를 사랑할수록 그의 등 뒤에서 더 외로워하는 법이다.

 

시인은 여자로 태어난다면 고아로 태어나겠다고 했다. 시인의 인식이 여성에 대해서 매우 깊어서, 여성은 누구나 무의식 안에서 이미 고아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쓴 것이라면 대단하다고 칭찬할 만하다. 성경에 두 남녀가 그 부모를 떠나서 하나로 연합하라고 쓰여 있는데, 여성들은 대개 이런 방식으로 남자를 사랑한다.

 

남자들은 서양이나 동양이나 그 부모에게서 떠나지 못해 고아의식을 갖지 못한다. 동양에서는 유교적 질서의 영향 때문에 그렇고, 서양에서도 남성은 부모의 성을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가지만 여성들은 결혼을 하면 남성의 성을 따른다. 이 질서 안에서 여성들은 어차피 혼자다. 그래서 그 부모에게서 잘 떠나고 한 남자를 향해 돌진한다. 남자들은 몸이 돌진한다면 여자들은 마음이 돌진한다.

 

그래서 고아인 여성은 이불 속에 복어 한 마리를 둔 것처럼 그 내면 안에 한 남성을 두고 찔리고 찔리고 계속 상처받아 체하는 인생을 산다. 그리고 다시 태어난다면 그 남자와 또 결혼하겠냐고 하면 안 할 거라고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다.

 

생략하고 싶을 만큼 사랑했지만 상처받았으니까.

 

고아로서 모든 외로움을 걸고 돌진하며 사랑했지만, 그 남자의 현재뿐 아니라 과거의 모든 것까지에도 하나가 되고 싶었지만, 결코 그리 될 수 없어 찔리고 찔리고 체하고 상처받아 할 수만 있다면 생을 싹 지우고 싶은 그런 한 많은 인생을 살았으니까.

 

이 시는...... 여자의 일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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