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송찬호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는 과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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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송찬호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는 과수원>

by 브린니 2020. 8. 29.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는 과수원

 

 

노란 택시를 타고 가을이 왔다 그런데 그렇게 앳된 가을은 처음 보았다 가을은 최신 유행의 결혼 예복을 입고 있었다 새 손목시계 새 구두 노랗고 산뜻한 나비넥타이가 따분한 인생으로부터 달아나려는 그를 간신이 붙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새 구두에 달라붙는 흙을 피해가면서 그 얼뜨기 가을은 길을 몰라 한동안 과수원 입구에서 서성거렸다 그때 나는 보았다 탱자나무 울타리 너머 사과의 이마가 발갛게 물드는 것을

이윽고 가을이 울타리 너머 손을 뻗었다 찌를까, 찌를까, 탱자나무 가시의 망설임이 역력해 보였다 그럴 법도 했다 사과를 키운 건 가시이고 그 가시의 손으로 바람 속에서 요람을 흔들고 과육을 씻겨주었다

 

                 ―송찬호

 

 

【산책】

가을이 빨리 왔으면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코로나, 장마, 폭염, 태풍……

여름은 참으로 길었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

 

가을 과수원…… 보다 더 아름다운 시간이 있을까.

풍요로움과 고즈넉함, 곱게 물든 나무들의 풍경.

 

아직 가을은 과수원까지 밀려들지 못하고, 마을 어귀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폭염과 장마와 태풍이 막아서고 있다.

 

서늘한 가을 햇볕과 바람을 느끼며 과수원길을 걷고 싶다.

노란 은행나무 길을 지나 단풍으로 붉게 물든 산기슭을 돌아

과수원으로 접어들면 빠알갛게 뺨을 붉히는 사과와

둥그런 배를 내밀고 있는 배를 볼 수 있다.

 

마지막 햇볕이 필요하다.

우울한 마음에도 커튼을 열고 따스한 햇볕의 위로가 필요하다.

 

신경이 곤두서고, 짜증이 자주 밀려드는 시간

더는 못 견디겠다고 한계를 드러내는 시간

 

그러나 가을은 오고 있다.

미래에서 우리를 향해 고요하게 스며들고 있다.

 

아직 느낄 수 없지만 아직 다 오지 않았지만

하지만 가을은 뜻밖의 방문자처럼 우리 집,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릴 것이다.

 

가을이 오는 소리를 들어보라.

마음이 조용해져야 들릴 수 있다.

 

그가 오는 소리는 너무나 고요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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