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 <무의미의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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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밀란 쿤데라 <무의미의 축제>

by 브린니 2020. 8. 23.

 

밀란 쿤데라는 우리 시대 최고의 작가라는 데 의문을 품을 수 없는 독보적인 작가이다. 다만 그가 체코 출신임에도 파리에 정착한 뒤로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점이 그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이름을 올리는 것을 조금 더 뒤로 미루고 있다. 노벨문학상은 대체로 파란만장한 삶을 산 작가들에게 후한 점수를 주는 편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민주화 운동 등에 헌신한 작가들에게.

 

밀란 쿤데라는 삶의 허위에 매스를 대서 인간의 치부를 드러내는 데 매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다. 그런데 그가 드러내는 허위는 단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본질적 속성을 드러낸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농담 하나 때문에 예기치 않는 핍박을 경험하는 체코인의 삶을 다룬 <농담>에서부터 바람둥이 노릇을 하며 시대의 아픔을 비켜가는 의사를 통해 인간의 삶의 가벼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년여성의 손짓 하나에서 인간을 규정하는 상징적 기표를 발견하고 그 무의미한 기표가 지닌 삶의 가치를 예리하게 파헤치는 <불멸>에 이르기까지 그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가장 깊은 의미를 찾아내는 데 놀랄만한 재능을 발휘하고 있다.

 

그가 드러내는 것은 인간의 영웅적인 모습, 삶에 최선을 다하며 인생을 치열하게 사는 모습등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의 비겁하고, 저열하고, 영웅답지 못한 삶의 행위들을 통해서 역으로 인간 삶의 고귀함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은 어렵다고 느껴진다. 일단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 스토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쉽게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 속 사건들이 역설적인 의미를 띠고 있기에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사건이 가리키는 지점이 분명 이것인데 막상 돌아보면 그것과 다른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면서 당혹감에 빠져 드는 경우가 많다. 쿤데라는 세상의 부조리를 부조리한 방식으로 그리고 있지도 않고, 인간 삶의 무위를 비판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인생의 부조리를 긍정하지도 않고, 삶의 허위에도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기까지 한다. 독자들이 이렇게 생각하면 다른 방향으로 초점을 돌리고, 이런 이야기에는 뻔히 이런 결론이 뒤따를 것 같은데 전혀 다른 이야기가 이어진다.

 

소설과 현실이 겹치는 소설 <불멸>은 모든 게 소설일 뿐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독자들이 소설을 읽는 재미 가운데 하나인, 소설 속 사건을 현실처럼 경험하는 것의 허위를 드러내면서 소설 자체의 의미(그 반대로 현실의 현실로서의 의미)를 새롭게 펼친다.

 

소설 <무의미의 축제>는 제목에서부터 무의미한 인생의 의미를 이야기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2000년대 사람들은 어떠한 진지한 영역에도 몰입하지 않는다. 인생을 어떤 대의명분에 헌신하지도 않는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열정과 사랑을 쏟아 붓지 않는다. 감정의 과잉도 별로 없다. 차분하고, 조용하게, 자신의 일을 처리하고 남는 시간에 자신의 취향대로 레저를 즐길 뿐이다.

 

그들은 농담이나, 거짓말, 말줄이기 등과 같은 언어유희를 즐긴다. 우리나라의 경우엔 말줄이기가 대표적이다. ‘팔치올’이란 롯데 야구팀이 팔월에 치고 올라갈 것이라고 말한 감독의 인터뷰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한 말이다. 그런데 롯데가 8월에 좋은 성적을 내자 팔치올이 야구팬들 사이에 널리 회자되고 있다.

 

이런 식의 말줄이기, 농담, 거짓말 등 언어유희는 사람들이 자신의 열정과 사랑 등을 과잉으로 투여하지 않는 생활패턴의 방어기제로 작동한다. 진지한 영역에 대한 몰입 대신, 가벼운 언어유희를 통해 에너지를 다른 것에 쓰는 것이다. 말을 새롭게 만들고, 그 새로운 언어에 (진지하지 않은) 의미를 부여하고, 그 새로운 언어를 널리 퍼뜨리면서 재미를 재생산하는 것이다. 재미가 의미를 대체하고 있다고나 할까. 2000년대 사람들에게 재미 없는 것은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무의미의 축제>는 알랭이 여성들이 배꼽을 드러내는 짧은 티셔츠를 입고 공원을 활보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에로스적인 기호를 발견한다. 배꼽은 그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고,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떠난 어머니가 10살 때 그의 집을 다시 방문해서 마지막으로 그의 배꼽을 만졌던 사건을 기억나게 한다.

 

<무의미의 축제>에는 알랭을 비롯해 라몽, 샤를, 칼리방, 다르델로 등 파리 남자들이 겪는 인생의 자질구레한 삽화들을 늘어놓고 있다. 특별한 구성도 결말도 없다.

 

다르델로가 암에 걸린 줄 알았으나 검사 결과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으로 밝혀지지만 그는 라몽에게 자신이 암에 걸렸다고 거짓말을 한다. 여기서 관심을 끄는 것은 암도 아니고 죽음의 의미 따위도 아니다. 그저 죽을병에 걸렸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 혹은 죽을병에 걸린 남자의 은밀한 매력 등에 대한 이러저런 생각일 뿐이다. 암이란 테마는 죽음이란 진지한 영역에 대한 고민 따위를 불러일으킬 법하지만 밀란 쿤데라는 오히려 지지부진한 쪽에 현미경을 들이댄다. 독자들은 그의 이런 소설 기법이 낯설고, 불편하고, 의미 없게 느껴질 수 있다.

 

알랭은 자신이 태어나자 마자 떠나버린 어머니의 사진을 집에 걸어두고 대화를 자주 한다. 이 부분이 소설에서 가장 인간다운 면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좀 센티멘털하기까지 하다. 물론 알랭이 떠난 어머니를 그리워하거나 못 잊어하거나 보고 싶어 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짓을 하면서 자신의 에너지를 쏟는다. 감정을 과잉 몰입하지는 않지만 사진으로 남은 어머니와의 대화라는 환상을 즐기는 것이다.

 

이 환상은 그가 어머니의 부재를 방어하는 방어기제인 것은 분명하지만 현실 속 어머니와의 대화를 넘어선, 대화 이상의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환상에 빠지는 것은 무의미한 것인데 그것이 현실에서는 결코 획득할 수 없는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환상은 방어기제이면서 알랭의 인생을 가로지르는 획기적인 전환이 되기도 한다.

 

지지부진한 에피소드가 나열되던 소설은 알랭이 오토바이를 운전하는 동안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면서 인생의 진지한 면을 건드린다.

 

“모두가 인간의 권리에 대해 떠들어 대지. 얼마나 우습니! 너는 무슨 권리에 근거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야. 자기 의지로 삶을 끝내는 일까지도 그 인간의 권리를 수호하는 기사들은 허락해주지 않아.”

 

알랭의 어머니는 인생이란 어떤 권리에도 근거하지 않고, 죽으려고 한다고 해서 그 권리를 사용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사람은 태어나거나 죽는 것 모두에 아무런 권리가 없다는 것을 일깨운다.

 

“…… 네 성(姓)도 마찬가지로 네가 선택한 게 아니야. 네 눈 색깔도, 네가 태어난 시대도, 네 나라도, 네 어머니도, 중요한 건 뭐든 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권리들이란 그저 아무 쓸데없는 것들에만 관련되어 있어. 그걸 얻겠다고 발버둥치거나 거창한 인권선언문 같은 걸 쓸 이유가 전혀 없는 것들!”

 

알랭의 어머니는 중요한 것들은 나의 선택이나 권리와 관련이 없고, 모두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인간들은 아무 쓸데없는 것들을 얻으려고 권리를 내세우고 있다고 주장한다.

알랭은 어머니가 자신을 임신했을 때 아이를 낳기 싫어했다고 믿고 있다. 그러니까 떠난 것이라고. 어머니 역시 아이가 태어나고 싶어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아이의 의지와 무관하게 아이를 낳는 것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확인해준다.

 

“네가 지금 여기 이렇게 있는 건 내가 약했기 때문이다. 내 잘못이었어. 미안하다.”

어머니가 미안하다고 하자 알랭은 소리친다.

 

“뭘 잘못했다고 느끼시는 거예요? 제가 태어나는 걸 막을 힘이 없었던 거요? 아니면 제 삶, 어쩌다 그리 썩 나쁘지는 않은 제 삶과 어머니가 화해하지 않았던 거요?”

 

어머니는 자신이 두 배로 죄인이라고 말하면서도 알랭이 너무 선량한 것이 문제라고 비난한다.

 

“잘못했다는 소리 그만해라! 네가 내 삶에 대해서 뭘 아니, 이 바보야! …… 네 멍청함의 근원이 뭔지 아니? 선량함! 네 그 터무니없는 선량함이라고!”

 

그러나 알랭은 자신의 정체성을 강조한다.

“저는 사과쟁이예요. 어머니하고 아버지가 저를 이렇게 만드셨어요. 그래서 사과쟁이로서 저는 어머니하고 저하고 서로 사과할 때 기분이 좋아요. 서로 사과하는 거, 참 좋은 일 아니에요?”

 

알랭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한 없이 가벼운 인생에서 조금은 진지한 어떤 것. 그것은 서로 사과하는 것이다. 서로 사과하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일까. 하지만 그것은 가벼운 인생의 행위로서 참 좋은 의미를 갖는다. 사과한다는 것은 상대를 향한 가장 밑바닥 인정행위이다. 사과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내가 너를 인간으로 인정하고 너의 인격을 존중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아들을 낳지 않으려고 했던 어머니와 자신을 임신하는 바람에 인생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버린 어머니에게 서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는 것. 그것에서부터 서로를 인정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고, 화해하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리고 사과하는 것은 어떤 선량함에 근거하는 행위이다. 선량함은 이기적인 것을 인간의 권리 주장으로 여기고 사는 이 시대에 멍청한 것에 불과할지라도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성품이라고 할 수  있다. 

 

밀란 쿤데라는 중요한 것 거창한 것 진지한 것 등이 사라진 이 시대에 선량함은 아무런 힘을 행사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최소한의 양식이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알랭은 라몽에게 소설의 끝부분에서 배꼽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자의 관능적인 몸에는 황금 지점이 몇 개가 있는데, 나는 늘 그게 세 개라고 생각했어. 허벅지, 엉덩이, 가슴.”

 

“허벅지, 가슴, 엉덩이는 여자들마다 다 형태가 달라. …… 배꼽은 다 똑같거든.”

 

“…… 허벅지나 엉덩이, 가슴하고는 다르게 배꼽은 그 배꼽을 지닌 여자에게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고, 그 여자가 아닌 어떤 것에 대해 말한다는 거야.”

 

알랭은 배꼽은 형태가 다 똑같기 때문에 개체로서의 한 여자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고, 그 여자가 아닌 어떤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배꼽의 형태가 다 똑같다는 점에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배꼽이 그 여자가 아닌 어떤 것을 말한다는 데에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마도 칸트가 말한 ‘물자체Ding an sich’를 뜻하는 것처럼 보인다. 쿤데라는 소설 곳곳에서 이런 철학 용어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배꼽은 태아를 떠올리게 하고, 배꼽은 반복을 불러온다. 배꼽의 징후는 인간이 모두 같다는 것을, 개체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로서의 인간을 상징하는 것이다. 배꼽이 에로스의 기호라면 사람들은 배 가운데 조그맣게 난 똑같은 구멍을 바라보게 한다. 즉 아무것도 아닌 그저 구멍에 불과한 것에 시선을 보내게 되는데―여기에 에너지, 열정과 사랑을 보낸다―그러나 이것은 그저 에로틱한 시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무의미한 것의 축제이란 것이다.

 

개별적인 인간이 아닌 인간 그 자체를 보는 것은 그만큼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별적인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인간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은 실체가 없는 환상에 불과할 수 있다. 그것은 가장 의미 있는 어떤 것이 허무하게도 가장 의미 없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플라톤이 현상은 단지 눈에 보이는 것에 불과하고, 현상 너머에 진짜 본질이 있다고 말한 이래로 철학은 객관적 실체에 대해 끊임없이 의미를 부여해왔다. 그러나 밀란 쿤데라의 소설 <무의미의 축제>은 구멍을 아무리 들여다봐야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 구멍은 그저 텅 빈 채 구멍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상 너머에 본질 같은 것이 있다고 믿었던 적이 있고, 현상 그 자체에서 의미를 찾던 시대가 있었고,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그저 구멍일 뿐인 것에 의미를 두는 시대가 된 것일까. 아니면 이 모든 것들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는 것은 부질없는 행위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아무튼 밀란 쿤데라는 <무의미의 축제>에서도 그의 특유의 역설의 언어로 독자들을 현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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