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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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알베르 카뮈 <페스트>

by 브린니 2020. 8. 21.

다시 코로나가 2 대유행을 시작했습니다. 지난 2 신천지 사태가 터지면서 학교의 개학을 연기하고 TV에서 종일 코로나 뉴스가 터져나올 전문가가 “1 유행은 시간이 흐르면 잡힐 거다, 하지만 전염병은 반드시 2 대유행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야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1 유행만으로도 벅찰 시기라서 말이 실감나지 않았는데, 이제 2 유행을 목도하니 말이 닿습니다. 게다가 1 유행은 이단 신천지가 시발점이었지만, 2 유행은 기독교 보수교단에서 촉발되었기에 심각성이 더하다 하겠습니다.

1 유행 때도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읽었지만, 이제는 리뷰를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것은, 바로 책에서도 페스트를 바라보는 종교적 관점이 부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 베르나르 리외는 의사로서 작가의 실존주의적 관점이 투영된 인물입니다. 그는 일선에서 페스트와 싸우는 역할을 맡으면서 전염병에 대한 종교적 관점에 대립합니다.

 

사람들은 무서운 전염병 앞에서 종교 지도자에게 어떠한 해석을 내려주기를 기대합니다. 페스트가 창궐한 오랑 시의 파눌루 신부는 예상할 있듯이 죄에 대한 신의 심판이라고 설명하며 회개의 기도를 하기를 권합니다.

 

설교 앞에 리외는 불편함을 느낍니다. 신의 심판이라고 말하기에는 자신이 돌보는 환자들 중에는 어린아이와 선한 이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고통받고 죽어가는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의사로서의 고통이 심한데, 도시가 폐쇄된 가운데 돈벌이를 하며 오히려 전염병이 것을 좋아하는 악한 이들도 있는 것을 발견하며, 도대체 신의 형벌이라는 것이 어디로 향하는 것인가 하는 거부감을 느낍니다.

 

도리어 실존주의 사상가 알베르 카뮈의 사상이 형상화된 인물이기도 리외의 성실한 모습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보입니다. 때때로 그의 시니컬한 태도와 선인과 악인에 대한 차별없는 태도 등을 보면 전통적인 선한 주인공의 모습과는 다른 차이가 있는데, 모습이야말로 카뮈가 빚어낸 새로운 인간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그가 타인에게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등의 자기 생각을 주입하지 않는 사람이고, 자신이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내리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와 지속적으로 교제를 해온 사람들이 결국은 자신들의 판단에서 옳지 않은 점을 깨닫고 스스로 전염병 앞에서 성실하고 진실한 인간이 가야할 길을 찾아서 가는 것을 있습니다.

 

특히 사랑하는 연인을 두고 오랑 시에 왔다가 길이 폐쇄되는 바람에 떠날 없게 되어 어떻게든 연인에게 돌아가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찾던 랑베르는, 사실 리외의 아내도 오랑 시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요양소에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고 깜짝 놀라 자신도 리외와 함께 환자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이야기합니다.

 

파눌루 신부 역시 설교단에서는 목소리를 높여 신의 형벌이라고 주장하다가 리외와 함께 임시 병원으로 쓰이는 학교 교실에 와서 어린아이가 밤새 고통받다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는 고통스러워합니다. 파눌루 신부가주여, 아이를 구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만 아이는 줄곧 고통에 비명을 지르다가 마침내 맥을 놓아 숨을 거둡니다. 리외는 파눌루에게 마디를 던집니다. “ 아이는 적어도 아무 죄도 없습니다. 당신도 아시지요!”

이후 파눌루 신부는 위생반에 들어가 최전선에서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설교를 당신들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들이라고 말하면서 페스트라는 고통스러운 사실을 인정하고 신을 증오할 것인지 아니면 신을 사랑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참으로 힘겨운 사랑이며, 전적인 자기 포기와 자기 존재에 대한 부정을 전제로 하며, 자기 포기와 자기 부정에 도달하기 위한 믿음은 불의로 보이는 것으로부터 솟아나는 진리에서 나온다고 이야기합니다.

 

파눌루 신부는 강연을 마지막으로 몸에 열이 올라 갑자기 사망합니다. 그에게는 페스트의 증상이 없었고 병명을 없는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의 죽음은 전염병이 신의 형벌이라는 전통적인 종교적 해석의 죽음을 의미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페스트로 죽지 않습니다.

 

파눌루 신부의 마지막 강연의 내용은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온 코로나라는 전염병은 자기 포기와 자기 부정의 과제를 던져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특히 다른 종교가 아니라 기독교계에 던지는 의문 부호로서 기능하고 있는 부분을 생각해 보아야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단 신천지에서 퍼지기 시작했으니 “당신들 잘못이라고 말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2 유행은 한기총 회장의 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기독교계에서 이상당신들이라고 말할 없고우리들이라고 말해야 것입니다.

 

적어도 파눌루 신부는 마지막 강연에서 자기 포기와 자기 부정의 믿음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힘겨운 교훈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눈에는 잔인하게 보이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결정적인 것으로 보이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에 다가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두려운 심상에 우리는 도달해야 합니다. 이 절정의 경지에서는 모든 것이 녹아들고 동등해지며 겉으로는 불의로 보이는 것으로부터 진리가 솟아날 것입니다.”

 

“그리하여 프랑스 남부 지방의 수많은 성당에서 페스트로 죽은 사람들이 수세기 전부터 성가대석의 포석 아래에 잠들어 있는 가운데, 사제들은 그들의 무덤 위에서 이야기하고 그들이 선포하고자 하는 정신은 그 재 속에서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물론 이 재 속에는 아이들의 몫도 있습니다.”

 

코로나 19라는 세계적 전염병 앞에서 아직도 자기 고집을 내려놓지 않고자기 부정, 자기 포기신앙의 근본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들이 안타깝습니다. 자기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기 위해 모였던 집회로부터 코로나가 더욱 퍼지기 시작했다는 점도 매우 상징적입니다.

 

특히 자기에게도 딸이 있다면 일본군 위안부로 보냈을 거라고 망언을 하며 자기 확신, 자기 고집에 차 있던 엄마 부대의 대장 코로나로 확진되어 기침을 하면 가슴이 결리고 아프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번자기 부정, 자기 포기의 기독교 신앙 근본을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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