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원 이광수의 <도산 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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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춘원 이광수의 <도산 안창호>

by 브린니 2020. 8. 17.

친일 행적으로 인해 쉽게 외면당하는 춘원 이광수는 해방 직후에 도산 안창호의 전기를 썼습니다. 그가 역사상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이순신과 도산 안창호라고 말한 것을 보면, 언제 올지 모른다고 믿었던 해방이 실제로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을 충격적으로 맞이한 후에 가장 먼저 그가 사랑하고 존경했던 민족 지도자 안창호 선생을 떠올렸을지도 모릅니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조선의 해방은 요원하다 믿었고 일본의 대동아 단결에 발맞추어 변절했을 안창호는 반드시 독립이 거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당대 많은 지식인들은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고국의 해방에 대해 확답하지 못했으나 안창호는 학생들을 향하여 반드시 해방이 온다고 확답하였다고 합니다.

 

이유인즉슨 일본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야욕은 식민제국주의이면서 마치 동양 평화와 발전의 기수인 거짓말을 하며 조선인들을 총알받이로 내몰려하는 것은 거짓이라는 사실, 그리고 거짓은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다는 매우 순수한 논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일본은 반드시 패망하고 조선은 독립할 거라고 안창호 스스로 믿었으며 학생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고 합니다.

 

참으로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믿음입니다. 거짓은 패망하고 진실은 승리한다! 누구나 그렇다고 믿고 그래야 한다고 믿지만, 아무도 현실에서 그렇게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순수한 진리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창호는 단순한 진리를 믿었고 믿는 대로 실천했으며 믿는 대로 가르쳤습니다.

 

단순한 믿음대로 정말 해방이 왔을 , 이광수가 안창호의 전기를 것은 일종의 뉘우침이었으며, 변명이었으며, 자신에게 쏟아질 비난에 대한 방패막이 되어줄지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였을까요?

 

아무튼 지금도 도산 안창호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은 누구나 가장 읽어볼 만한 책으로 이광수가 <도산 안창호> 추천받습니다. 그만큼 책은 이광수의 진심어린 애정으로 안창호에 대해서 자세히 제대로 쓰여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편으로 안창호는 친미파로 분류하는 사람들이 습니. 역시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류여서 비판의 목소리도 있지만, 대체로 안창호가 땅에 펼쳤던 교육 정신에 대해서는 아무도 반박하지 합니.

 

안창호는 나라를 독립시킬 있는 힘은국민이 도덕 있는 국민이 되고 지식 있는 국민이 되고 단합하는 국민이 되어서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남에게 멸시를 받도록 하는 이라고 믿었습니.

 

사람 사람이 바르게 서야 나라가 바르게 선다는 진리는 누구도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나 그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독립이 이루어지냐고 묻는 이들도 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안창호는 자신의 거북이 같은 사상을 믿었고, 직접 몸소 실천했습니.

 

도산 안창호는 22세때 미국에 유학하였으나 막상 미국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인 인삼 장수와 노동자 사람이 상투를 마주 잡고 싸우는 모습을 미국인들이 구경거리로 삼아 웃는 보고 미국 재류 동포가 문명인다운 모습을 보여야 조선의 독립을 인정해 거라 믿어 미국 동포의 생활 향상을 위한 활동에 몸바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거창하게 앞에 나서서 연설로 사람들을 일깨우려 것이 아닙니다. 도산은 스스로 청소 인부가 되었습니다. 청소부가 되어서 동포의 숙소를 청소하고 미화하는 일에 매진하였습니다. 재류 동포들의 거처는 불결하여서 유리창이 더럽고 불쾌한 냄새가 나서 서양인들이 회피하였고, 이웃에 사는 서양인들은 때문에 이사를 지경이었습니다.

 

안창호는 몸소 청소를 시작했습니다. 손수 비로 쓸고 창을 닦고, 헝겊과 철사를 사다가 커튼을 달고, 문가에 화분을 놓고 꽃씨를 뿌리고 주방과 화장실까지 깨끗이 청소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동포들도 그가 하는 일을 의심하여 거부했지만, 차차 신임하게 되었습니다.

 

의관을 정제히 하면 중심이 필칙(必飭:단단히 경계하거나 다스림)한다 그의 소신대로 환경이 깨끗해지자 동포들의 정신생활까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어느새 그들은 면도를 자주 하고, 칼라와 의복을 깨끗이 하며,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말투와 태도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동포들의 신뢰를 얻게 되자 인삼 판매 구역을 공정히 정하고 가격 협정을 하여 경쟁을 없애 협동과 단합을 이루어 냈습니다. 이는 신용과 안전으로 이어져 미국인들에게 거래의 신뢰도를 높이게 되었습니다. 또한 노동력을 통합하여 공급하는 기관을 만들어서 미국인들에게 노동력 주문을 받고 공급함으로써 최저 임금을 보장하고 실직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원리가 도산 안창호가 평생 일을 해나가는 원리였습니다. 먼저 낮고 작은 일부터 시작하여 민중이 자각하도록 기다리며, 민중 스스로 지도자를 발견하여 민심을 결합하게 하는 것입니다. 도산은 결코 자신이 스스로 지도자의 자리에 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재미 동포들의 마음이 모아져대한인국민회 만들어졌는데, 지도자인 안창호의 인격처럼 그것은 일종의 민족수양운동이었고 독립을 위한 혁명운동이며, 민주주의 정치를 실습하는 정치운동이었습니다.

 

안창호는 흥사단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인격, 단결, 수양 운동을 펼쳤는데, 이것이 유일무이한 독립운동이요 모든 정치 운동의 모체라고 보았습니다. ‘수양 독립 안창호의 근본 사상이었습니다. 그의무실역행이란 참된 행실에 힘쓰자는 것으로, 건전한 인격과 건전한 삶이 우리에게 독립과 발전을 가져다 준다는 근본 원리에 입각한 것이었습니다.

 

1 세계대전이 휴전되자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안창호 명의의 신임장으로 이승만 박사를 워싱턴으로 파견하여 독립운동을 개시하였습니다. 회원의 성금을 모아 이승만 박사의 워싱턴 위원부의 경비를 부담하고 상해 임시정부 경비의 절반과 중경 체재 중인 임정 요인의 생활비를 보내었습니다.

 

안창호는 이렇게 이승만의 활동을 도왔는데, 국민회 내부에서는 이승만에 대한 불만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승만이 하와이 국민회를 중앙 총회에서 분리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창호는 이러한 대립을 더 큰 아량으로 품고 싶었던 같습니다.

 

안창호는 이승만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아내가 밉다고 버릴 수는 없다고, 화장을 시켜서라도 데리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는 도산의 신념, 즉 저편이야 인사를 받거나 말거나 이편에서는 인사를 한다는 태도에 따른 것이기도 합니다. 이승만이 안창호에게 불편한 행동을 하더라도 안창호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마땅히 그에게 해야할 도리를 하는 것입니다.

 

민족운동을 하는 자가 도덕적으로 시비를 들어서는 아니 된다는 신념으로 활동 자금을 받을 때도 재물의 출처를 제대로 알기 전에는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라 일은 신성한 일이오. 신성한 일을 신성치 못한 재물이나 수단으로 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오라는 마디로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독립운동에 대하여도준비 없는, 계획 없는 운동-즉흥적 운동 결점이요, 습관이라고 보고 독립 운동 방략을 제정하여 강령과 실천 계획을 뒤에 남겨 독립의 날까지 일관된 주의와 방침하에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도산은 이러한 방략 제정의 일환으로 여기저기에 산재한 임시정부들을 하나로 모아 상해 임시정부로 통합하는 일조하였습니다. 한일병합 이후에 기미년 3.1운동까지 이르기까지 그저나가자, 죽자 식으로 민력이 소모된 것을 안타까워하면서나갈 준비를 하고 죽을 있는 준비를 하자 것을 상해에 모인 사람들에게 주장하였습니다.

 

이렇게 산재된 세력들을 통합하여 상해 임시정부를 세우는 방략을 제시하고 여러 지역의 지도자들을 임시정부의 주요한 자리에 배치시킨 도산은 작은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단체의 지도자들에게 주요 자리를주어야 그들을 하나로 모을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도산 자신의 본래 신념에 의한 처리 방식이 그랬다는 것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한편으로 당시 일제 치하에서 우리 한인들이 보여준 좋지 않은 모습들을 바꾸려 하다보니 안창호가 우리 민족성을 폄하하고 있었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많이 있지만, 짓밟힌 나라의 민족이 살아남기 위해 비굴한 모습을 많이 보였을 거라는 점도 감안하고 본다면, 그러한 모습을 바꾸려고 노력한 그의 삶에 대해 비판하기보다는 가치를 깊이 들여다보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듭니다.

 

심지어 이광수는 책에서 애국가의 가사조차 안창호가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본래 교육 계몽 운동을 하면서 안창호는 여러 가지 노래 가사를 많이 써서 사람들이 부를 있도록 하였는데, 애국가의 가사도 그렇게 쓰여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애국가가 널리 알려져서 많이 불리게 되자 사람들이애국가는 선생님이 지으셨다는데?”라고 물어도 도산은 대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인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앞에 나서기보다 뒤에서 받쳐주는 삶을 도산의 성품에 따른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당시 지식인들이 얼마나 힘겨운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는지 느껴집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친일로 혹은 독립지사로 혹은 민족성을 폄하하는 것으로 나타날지라도 그들 마음속에는 하나같이 깊은 아픔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소원은 하나같이 독립이었으며 나라가 바로 서는 것이었음을 느낍니다.

 

비록 누군가는 그렇게 것을 믿지 못해 잘못된 길로 나아갔고, 누군가는 죽는 순간까지 끝까지 믿었지만 말입니다. 가장 단순한 진리에의 믿음, 그것이 우리의 삶을 지키는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삶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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