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두 노인>, 데이비드 짐머만 <뜻밖의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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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톨스토이 <두 노인>, 데이비드 짐머만 <뜻밖의 손님>

by 브린니 2020. 8. 17.

진정한 삶의 변화란 무엇인가?

 

 

【데이비드 짐머만 <뜻밖의 손님>】

 

짐머만의 짧은 소설 <뜻밖의 손님>은 주인공 ‘나(이십대 직장 여성)’에게 어느 날 낯선 남자가 찾아오면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단번에 그가 누군지 알아본다.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들어가도 되겠니? 묻고, 나는 당연히 집안으로 모셔 들인다. 어린 시절부터 잘 알고 있는 예수님이 현실에 나타났다고 해서 거절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날부터 나는 예수님과 한 집에서 살게 된다. 예수님은 집안 청소를 도와주고, 말벗이 되어주고, 함께 식사를 나눈다. 며칠 후 직장에서 돌아오니 낯선 사람 셋이 집안을 차지하고 있다. 어린 딸이 내가 아끼는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다. 나는 눈물이 핑 돈다. 예수님은 내가 불편해하고 있다는 걸 아시면서도 이 사람들이 며칠 묵을 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나는 그들에게 숙소를 마련해주고 식사도 대접한다.

 

다음날도 그다음날도 나의 집엔 손님들이 많이 찾아온다. 노숙자는 물론이고 이웃에 사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초대를 받아 온 것이다. 나는 그들을 위해 식사를 대접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나의 집은 외로운 장소였지만 어느덧 사람 냄새가 나는 곳으로 바뀌고 있었다.

 

어느 날 예수님은 나의 직장에 함께 가길 원했다. 나는 직장을 끔찍하게 생각한다. 밥줄이 걸려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다니긴 하지만 어이없는 상사와 뒷담화를 즐기는 동료들은 딱 질색이다.

 

예수님은 내게 자신의 일거리를 떠넘기는 과장의 속사정을 알게 하시고, 다른 동료들의 일 스트레스와 그들의 성품 등을 들여다보게 하신다. 예수님은 나에게 직장 사람들 역시 좋은 사람들이지만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기에 돌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신다.

 

나는 그들과 금요일 점심식사를 함께 하고 기도모임도 갖는다. 직장이 밥줄에 얽매인 어쩔 수 없이 다니는 골치 아픈 곳이 아니라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소중한 장소로 바뀐다.

 

어느 날 퇴근하고 오니 예수님이 내 사진첩을 들여다보고 계신다. 이 사람은 누구니? 하고 물으신다. 나는 이 사람 저 사람에 대해 대답해 드리면서 옛 추억을 떠올린다. 예수님은 나에게 상처를 준 옛 애인을 가리키며 그가 누군지 물으신다. 나는 눈물이 핑 돈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 대해 물으시고, 내가 상처받아 괴로워하는 동안 가족이나 친지들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지도 물으신다.

 

나는 그 시절 아무도 모르게 혼자 상처입고 고통당한 사실을 떠올리며 마음이 더 아프다. 눈물이 고인 나의 눈을 바라보며 예수님도 울고 계신다. 예수님은 상처받은 날 도우시겠다고 말씀하시며 예수님 말고도 나의 아픈 과거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상대들을 찾으라고 권하신다.

 

나는 친구와 가족들, 그리고 심리상담사에게 나의 숨은 이야기를 하며 상처를 치유한다. 나는 아직 아프지만 그 상처는 더 이상 나의 인간관계를 해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은 나에게 경고장을 보내신다. 예수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지만 둘 말고 다른 사람, 이 집에서 나와 함께 살 수 있는 배필?과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나의 집의 주인이 되셨다. 그러나 나는 함께 살 ‘이웃’이 필요하다. 그 이웃은 내가 내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제 예수님을 내 마음의 집에 모신 것처럼 다른 사람을 내 마음과 현실 집에 데려와 함께 살면서 사랑을 나눠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예수님게 그러겠다고 약속한다. 아직 내가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언젠가 그 사람이 ‘뜻밖의 손님’처럼 찾아올 것을 믿는다.

 

이 소설이 독자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 두 가지를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예수님이 문밖에서 두드리실 때 문을 열고 모셔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을 내 집의 주인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마음에 들어오신 예수님이 나를 통치할 수 있도록 삶의 주인 자리에서 나 스스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 내 삶에는 변화가 찾아오는데 그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예수님이 오신 뒤 나는 내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그러나 변화시켜야 한다는 당위성으로 접근하면 변화에 실패한다. 그저 예수님이 주도하는 방식대로 내 삶이 변화되기에 저항하지 말고, 그 변화의 물결에 몸과 마음을 맡기면 된다.)

 

셋째, 그 변화의 내용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을 만나면 내 삶이 영적으로 변화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부흥회나 수련회를 다녀와서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한 은혜를 이어가기 위해 성경읽기와 기도, 예배와 각종 교회 모임에 열성을 다한다. 전도와 선교에도 앞장선다. 그런데 이 소설엔 그런 이야기가 한 줄도 없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주인공 나의 삶은 인간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즉 예수님을 만나면 먼저 나의 인간관계, 즉 이웃과의 교제와 직장 생활 등이 변한다. 그리고 나의 내면이 치유된다. 곧이어 내가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게 된다.

 

이 소설이 궁극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 나는 전인격적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영적인 변화는 잘 나타나지 않는데 그것은 내가 예수님을 나의 집에 모시는 순간 구원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구원이 시작되면 바로 이어지는 것이 삶의 구체적인 변화이다. 그것은 우리가 구원을 이루는 과정(성화라고 부른다)이며, 언뜻 보기에 매우 육신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 자신을 숭배하고 예배하고 제사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첫째 계명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이 같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더욱이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새 계명으로 주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난 뒤 내 삶은 이웃관계에서부터 변화가 생기고, 내가 내 삶의 주체로서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실 때 역으로 나는 내 삶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나 죄로 인해 온전한 형상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타락한 형상으로 살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면서 점차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나는 죄와 상처로 얼룩진 형상을 벗고 진정한 주체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진정한 주체로서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는 온몸으로 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뜻밖의 손님>의 주인공 ‘나’는 예수님의 방문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예수님이 주도하는 새 삶의 프로젝트에 동참하고, 이웃관계를 회복하고, 내면의 상처를 치유한 뒤 온전한 주체로 거듭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게 된다.

 

 

【톨스토이의 <두 노인>】

 

러시아의 대문호 레오 톨스토이의 <두 노인>에는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떠나는 예핌과 예리세이라는 두 노인이 나온다. 예핌은 부유하고, 매사에 똑 부러지는 성격에 영적인 일에도 아주 열성이다. 예리세이는 부유하지 않지만 화목한 가정의 가장이며,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로 술과 담배를 끊지 못한다.

 

두 사람은 여행경비로 100루블씩을 마련해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떠난다. 매사에 정확한 예핌은 자신이 없을 때 가족들이 가사 일을 망칠까 걱정이지만 예리세이는 모든 걸 가족에게 맡긴 채 홀가분한 마음으로 순례를 시작한다.

 

길을 가다가 예리세이는 물을 얻어 마시기 위해 시골집으로 들어가고 예핌은 먼저 길을 재촉한다. 예리세이가 들어간 집은 가뭄과 열병에 가족들이 쓰러지고 엉망진창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예리세이는 물을 마시러 갔다가 오히려 그 집 살림살이를 돕게 된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고, 자기 배낭에서 빵을 꺼내 식구들을 먹인다. 그렇게 며칠 동안 그 집에서 머물면서 가지고 있던 돈을 거의 다 쓰고 말았다. 가난해서 부잣집에 넘긴 쌀보리밭과 풀밭과 말까지 새로 사 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그 집이 되살아나는 것을 본 뒤 다시 순례길에 올랐는데 여행 경비가 모자라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고 여기고 발길을 돌린다.

 

예핌은 예리세이를 기다렸으나 만나지 못하고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순례를 마친다. 예핌은 그리스도의 관 앞을 비롯해 중요한 성지마다 예리세이가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그런데 참배객들에 밀려 그와 대면하지 못한다. 예핌은 그것이 환상인지 실제인지 구분할 수 없지만 친구가 먼저 순례 장소에 도착한 것이 분명하다고 여긴다.

 

성지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예핌은 친구 예리세이가 물을 마시러 간 집에 들어가게 된다. 그 집 사람들은 순례객을 극진히 맞이하며 예리세이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는다. 어느 순례객이 물을 마시러 들어왔다가 자신의 전부를 내놓고 집안사람들을 살리고 집을 부흥시켰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 순례객이 사람인지 천사인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제야 예핌은 그가 바로 예리세이였으며 하나님은 그의 순례를 미리 받으시고 순례 장소마다 그가 기도하는 모습을 환상으로 보여주셨다는 것을 깨닫는다.

 

예핌은 고향으로 돌아와 집에 들어갔으나 집안일은 제대로 되지 않고, 아들은 돈을 흥청마청 써버렸다. 예핌을 화가 나서 아들을 때린다. 예핌은 예리세이에게 가서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지만 예리세이가 선행을 한 일을 말하려니까 친구는 손사레를 치며 말머리를 돌렸다. 예핌은 자신은 성지 순례를 하고 헌금을 하면서 참배를 했지만 과연 자기 정성은 하나님께서 받으셨는지 알 수 없지만 정작 성지 순례는 하지 못했지만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선행을 한 예리세이는 인정하셨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소설은 이렇게 끝이 난다. <두 노인>에서 톨스토이는 과연 누가 진정한 성지 순례를 한 것인가, 누가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가 묻고 있다. 그것에 대한 대답은 이미 소설 곳곳에 드러나 있다.

 

예리세이는 성지 순례를 가야 하는데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암초, 어느 가난한 시골집을 만난다. 그냥 지나치면 그만이었을 텐데 그는 그 집에 머물고 만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내일은 쌀보리밭과 풀밭을 도로 사주자. 그리고 말도 사고, 햇보리가 나기까지 먹을 밀가루와 아이들에게 우유를 먹일 젖소도 사줘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바다를 건너서 그리스도를 찾아간다고 해도 자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잃어버리게 된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지.”

 

예핌의 말에서도 대답을 찾을 수 있다. 예핌은 성지 곳곳에서 예리세이를 환상으로 보고 그를 대면하려고 했지만 만날 수 없었다. 그러다 돌아오는 길에 예리세이가 물 마시러 간 집을 찾아간 뒤 그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렇구나. 그 영감은 여기서 나는 앞질렀던 것이다. 내 정성을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친구는 하나님께서 쾌히 받아들이신 것이다.’

 

두 노인이 성지 순례를 떠났지만 예리세이는 도중에 돌아왔고, 예핌은 순례를 마쳤다. 그러나 예핌은 성지 순례를 도중에 포기한 예리세이가 자신을 앞질렀으며 하나님께서 그의 선행을 쾌히 받아들이셨다고 인정한다.

 

왜일까?

 

예리세이는 성지 순례를 계속하는 대신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 예리세이는 그것을 자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잃어버리지 않는 일이라고 믿는다. 성지에 죽은 그리스도를 참배하는 것보다 내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선한 일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짜 성지 순례라고 믿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받은 이후에 영적인 일에 매달리기 쉽다.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배하고 각종 교회 모임에 참석하고 성경 읽기와 기도 제자훈련에 매진하고 전도와 선교에 열심을 낸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 삶이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 안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핌은 성지 순례를 다녀온 뒤 이렇게 돌이킨다.

 

이 세상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죽는 날까지 사랑과 선행으로 자기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것이 하나님의 분부시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주라고 부탁하신다. 또 새 계명을 주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주시면서 사랑하셨다. 우리고 그렇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이웃에게 무엇을 주는가.

 

예리세이는 성지 순례 경비로 모은 100루블 가운데 거의 90%를 가난한 사람을 돕는 데 쓴다. 하지만 예핌은 돈을 움켜쥔 채 도둑맞을까 전전긍긍하며 함께 순례를 하는 순례자가 꿔간 돈 1루블을 돌려받지 못해 속상해한다.

 

하지만 예핌은 죄를 짓지도, 술 담배를 하지도 않는다. 늘 매사에 정확하고, 일도 열심히 잘 한다. 그리고 부자다. 예핌은 현재 우리 교회의 중산층 신자들을 예표하고 있는 듯하다. 예배와 각종 교회 행사와 모임에 열심이고, 죄를 짓지도 술 담배도 하지 않는다. 일도 열심히 해서 부를 축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웃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주는 일에는 인색하다.

 

우리는 영적인 것에 열심을 낸다. 그것이 구원을 가져다주리라 믿기 때문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믿는 일에 열심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시기에 유대 백성들도 제사에 지극 정성이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다고 말씀하셨고, 예루살렘은 처참하게 무너졌다. 예수님 시대에도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모두 지키고 제사에 목숨을 걸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탄과 독사의 자식으로 버림받았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은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이다(호6:6).

 

많은 사람들이 인애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을 더 잘 알기 위해 성경공부에 매달린다. 그것이 틀린 것이 아니지만 인애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포괄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의 뜻을 온전히 아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성품과 뜻은 무엇일까? 그분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성품을 지니셨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을 제사보다 더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이다(잠언 21:3).

 

정의란 무엇인가? 바로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다. 굶주린 사람을 보고도 돕지 않는 것은 정의로운 것이 아니다. 정의를 어렵게 생각하고, 만화나 영화의 주인공처럼 나쁜 놈의 악행을 처단하는 것쯤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정의는 복수도 아니고 법의 심판도 아니다. 정의는 그 위에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뜻에 맞게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며 우리도 우리 자신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그분의 뜻이다.

 

예핌도 신앙인이며 그가 비록 예배나 율법, 성지 순례와 같은 종교 행위에 몰두했을지라도 그는 성지 순례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계시받았다. 그는 예리세이의 선행을 하나님께서 받으셨으며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죽는 날까지 사랑과 선행을 자기의 의무로 여기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아마도 그도 친구처럼 변화될 것이라고 이 소설은 암시하고 있다. 

 

짐머만의 소설 <뜻밖의 손님>과 톨스토이의 소설 <두 노인>은 한결같이 구원받은 뒤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진짜 그리스도인의 삶이 될 수 있는가를 말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바대로 우리의 삶은 영적인 행위에 몰두하기보다는 전인격적인 변화 즉 삶의 구체적인 모든 부분에서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는 삶, 그리스도처럼 서로 사랑하는 삶으로 변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덧붙여서】

여기서 의문을 제기하는 기독교인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선행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배웠습니다.”

 

그렇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그 믿음을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가.

 

삭개오가 토색한 것을 4배로 갚고, 재산의 반을 가난한 자와 나누겠다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말씀하셨다(눅19:89).

 

작은 자에게 물 한 잔을 주지 않은 것에 대해 예수님은 책망하셨다(마25:35-46). 왜일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구원받을 만한 믿음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 작은 자가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이웃을 사랑해야 할까. 이웃은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며, 그 이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입술로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외치면서도 이웃의 어려움을 돌보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님을 돌보지 않는 것이며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선행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교리는 틀린 말이 아니지만 좀 더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입술로 믿는다고 외칠 것이 아니라 선행(이웃사랑)으로 자기 믿음을 증명해야 한다. 야고보서 2장을 다시 읽어보라.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요즘 식으로 하면 형제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약2:14-18)

 

야고보서(약2:14)의 ‘행함(deeds선한업적)’과 로마서(롬3:28)의 ‘행위(observing율법준수)’를 같은 말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의 행위는 율법을 지키는 행위 즉 율법적인 신앙을 뜻하는 것이지 선행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오셨는데도 믿지 않고, 모세의 율법에 얽매여 율법을 지키는 것이 진짜 신앙이라고 믿는 유대인을 책망하기 위해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했던 것이다.

 

오히려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고 말했다. 구원은 거저 믿는다고 입술로 떠드는 것에 주어지는 값싼 사은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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