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 <자크와 그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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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밀란 쿤데라 <자크와 그의 주인>

by 브린니 2020. 8. 30.

운명과 역사의 반복에서 벗어나기 위해 앞으로 가는 인생들

 

 

소설 <불멸>은 도저히 영화로 만들 수 없는 소설을 쓰려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고 쿤데라 자신이 밝히고 있다. 어쩌면 디드로의 소설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 역시 다른 것으로 만들 수 없는 소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일관된 이야기가 연대기적으로 서술되지 않고, 하나의 이야기가 다른 여러 갈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하나의 이야기가 진행되고 되어 있을 때 전혀 다른 이야기가 끼어드는 식의, 구성 아닌 구성의, 소설이라는 집을 완성하기에도 부적합해 보이는 소설. 그러니 다른 것으로 각색하기도 힘들 것이다. 이런 디드로의 소설을 쿤데라는 <자크와 그의 주인>이라는 희곡으로 다시 썼다.

 

 

<자크와 그의 주인>은 각색이 아니라 ‘변주’이며 디드로에게 바치는 ‘오마주’라고 쿤데라는 말한다.

디드로의 소설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이 자크와 주인 등 여러 인물들의 잡다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 때문에 쿤데라는 이를 아예 연극 무대로 가져와 인물들의 대사만으로 이루어지는 장르인 희곡으로 다시 썼는지도 모른다.

 

디드로는 그 이전에는 소설 역사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공간인 배경 없는 무대를 창조해 낸다. (……) 디드로는 우리에게 그의 인물들이 실제로 정해진어느 순간에 존재한다고 믿게 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세계 소설의 역사 속에서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은 사실주의적 허상과 이른바 심리 소설의 미학에 대한 가장 철저한 거부다.

 

대체로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사건들을 인과관계에 의해 구성한 것'을 소설의 특성 중 하나로 꼽는다. 하지만 디디로의 소설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는 이를 거부하고 있으며 심지어 주인공들의 심리 묘사조차 외면하면서 장황한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진행시키고 있다.

 

쿤데라 역시 연극 무대를 사실적인 배경이 아니라 그저 텅 빈 연단 위에 의자나 테이블만 놓고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그곳이 어디인지 암시할 뿐이다. 그러나 그곳이 실제 어디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뿐더러 인물들 또한 여러 역할을 맡아 연기한다.

 

쿤데라는 반복이 아닌 변주로서 원래 텍스트에 대한 존경을 표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어쩌면 이미 쓰인 텍스트가 하나의 ‘운명’이라면 새로 쓰는 텍스트는 그 운명에 대한 선택으로서 새로운 운명을 여는 것일 수 있다.

 

주인   자크, 나는 우리가 어디를 가는지 아는 게 겁이 나는구나.

자크   나리께서 겁이 나신다고요?

주인   (슬프게) 그래. 그렇지만 내 슬픈 책무를 너한테 알리고 싶지는 않구나.

자크   나리, 우리는 절대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제 말을 믿으세요! 제 대위님이 늘 말했듯이 그런 건 저기 높은 곳에 씌어 있으니까요.

 

운명이란 저기 놓은 곳에 씌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크   나리께서는 우리가 무대에 있다는 걸 잊으셨군요. 여기 어떻게 말이 있겠습니까……?

주인   형편없는 공연 때문에 우리가 걸어서 가야 한다니. 우리를 만들어 낸 주인은 우리에게 말을 주지 않았더냐!

자크   주인이 너무 많으면 이런 위험이 있지요.

주인   우리가 좋은 창작물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종종 드는구나. 너는 사람들이 우리를 잘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느냐?

자크   사람들이 누굽니까. 나리? 저 높은 곳에 있는 사람 말입니까?

주인   이 아래 세상의 누군가가 우리의 이야기를 쓸 것이라고 저 높은 곳에 씌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이야기를 잘 썼는지 모르겠구나. 적어도 글재주는 있는 사람이었겠지?

 

<불멸>이 그렇듯 쿤데라는 작가가 직접 자기 목소리를 내면서 이것이 한낱 소설일 뿐임을 알린다. 마찬가지로 <자크와 그의 주인>에서도 이것이 연극이며 이것을 쓴 사람이 있고, 등장인물들도 자신이 하나의 창작물임을 안다. 그러면서 이 희곡을 쓴 사람이 글재주가 있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이 세상엔 형편없는 시인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주인   (……) 그러자 젊은 시인이 대답했어. “압니다. 선생님께서는 위대한 디드로이시고, 저는 형편없는 시인이라는 걸 압니다. 그렇지만 우리 형편없는 시인들 수가 더 많아서 언제나 다수일 것입니다! 온 인류가 형편없는 시인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정신으로 보나 취향으로 보나 감정으로 보나 대중은 형편없는 시인들의 집합일 뿐입니다. 어떻게 형편없는 시인들이 다른 형편없는 시인들을 기분 나쁘게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형편없는 시인인 인류는 형편없는 시를 미친 듯이 좋아합니다! 바로 제가 형편없는 시를 쓰기 때문에 언젠가는 인정받는 위대한 시인이 될 것입니다.”

 

쿤데라는 일목요연한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혐오를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목요연하게 글을 쓴다는 것은 작가의 생각을 독자에게 강요할 위험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건이 시작해서 긴장을 고조시킨 뒤 대단원의 막을 내리면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진정한 사건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진짜 사건이란 흥미로운 이야기거리가 아니라 그것을 보고 들은 사람들의 삶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쿤데라는 이 작품을 러시아 침공 시기에 썼으며 그 시기가 모든 것이 끝장난 시대로 인식했기 때문에 더욱이 하나의 일목요연한 사건으로 작품을 구성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러시아의 탱크들은 이미 그렇게 운명지어진 것이 아니라면 설명될 수 없을 정도로 인과관계도 없이 벌어진 사건처럼 생각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사건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는 그 사건을 직접 당하고 목도한 사람들의 몫일 것이다. 쿤데라는 이런 치명적인 사건 앞에서 디드로 식의 방식을 택한다. 다수가 따르는 획일화된 미학을 거부하고 작가만의 특이한 글쓰기로 이런 형편없는 전체주의를 돌파하는 것이다.

 

쿤데라는 잘 짜인 구성과 완결된 결말이 소설의 특징이라는 것도 파괴한다. 이미 내려진 결론도 다른 인물을 통해 뒤바꾸기까지 한다. 자크에게 후작의 역할을 다시 맡김으로써 새로운 결말을 도출한다.

 

자크   입 다무시오. 포므레 부인! (딸에게) 난 당신을 용서했고, 내가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걸 당신이 알았으면 하오. 저 여자는 (여인숙 여주인을 가리키며) 복수를 한 게 아니라 내게 큰 호의를 베풀어 주었소. 당신이 저 여자보다 훨씬 젊고, 훨씬 아름답고, 그리고 백배나 더 헌신적이지 않소? 우리 함께 시골로 떠나 멋진 세월을 보냅시다 (그는 여자와 함께 연단을 가로질러 가다가 여인숙 여주인을 향해 돌아서더니 후작 역할에서 벗어난다.) 주인장, 두 사람이 아주 행복했다는 말을 당신에게 해야겠네. 이 세상에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은 바람이 불듯 방향이 바뀌는 법이지. 그리고 바람은 쉬지 않고 부는데, 당신은 그걸 알지 못하는 거요. 바람이 불면 행복은 불행으로 바뀌고, 복수는 보답으로 바뀌지, 그리고 가벼운 여자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숙한 여자가 되고…….

 

쿤데라는 또 인간관계 혹은 신분제도에 대해서도 자기의 소신을 이야기한다. 마치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자크   우리 주인이 우리를 만들어 낸 순간에 이 모든 게 정해진 겁니다. 우리 주인은 나리께서는 겉모습을, 그리고 저는 본질을 갖도록 결정했어요. 나리께서는 명령을 내리지만, 저는 명령을 선택하도록 말이지요. 나리께서는 권리를 갖지만, 저는 그 권리에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말이지요.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노예는 자신의 노동을 통해 자기 정체성이 확증되지만 주인은 노예에게 의존하는 방식으로 자기 정체성을 인정받기에 오히려 더 자유로운 사람은 노예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주인과 노예는 상호인정의 관계에 갇혀 있지만 노동이라는 관점에서는 노예가 더 자유롭다.

 

쿤데라는 이를 주인은 “겉모습”을 하인인 자크는 “본질”을 갖는다고 해석하고 있다.

 

쿤데라는 <자크와 주인>을 통해 반복과 변주에 대한 자신의 견해도 밝힌다. 디드로의 작품에서는 주인이 말을 타고 다니지만 <자크와 주인>에서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느냐! 프랑스 귀족이 걸어서 나라를 돌아다닌단 말이냐! 너 우리를 다시 쓴 작자를 아느냐?

자크   웬 바보입니다, 나리. 그렇지만 이제 우리가 다시 씌었으니 우리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

주인   우리 이야기를 다시 쓴 사람을 사람들이 믿는다고 생각하느냐? 우리가 진짜 어떤 사림인지 보려고 원래 ‘텍스트’를 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자크   나리, 사람들은 우리 이야기말고도 많은 것들을 다시 썼습니다. 이 아래 세상에서 일어난 모든 것은 이미 수백 번 다시 씌었고, 실제로 일어난 것을 확인할 생각은 누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들의 이야기가 너무 자주 쓰이는 바람에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더는 알지 못합니다.

 

쿤데라는 반복을 경멸하지만 변주는 옹호하면서 변주가 반복의 의미를 한층 더 깊게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주인   너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잖느냐!

자크   제가요? 반복을 해요? 나리, 자기 말을 반복한다는 말보다 더한 모욕은 없습니다. 그런 말을 저한테 하시면 안 되죠. 맹세코 저는 공연이 끝날 때까지 입을 열지 않을 겁니다…….

 

(……)

 

주인   (생각에 잠긴 얼굴로) 꼭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구나. 아이와 의자와 그 모든 것이 계속 반복된다는 생각을 하면 이따금 불안해진단 말이다……. 어제저녁에도 포므레 부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난 속으로 생각했다. 늘 똑같이 변함없는 얘기가 아닌가? 결국 포므레 부인도 생투앙의 모사품에 지나지 않느냐. 그리고 나는 네 가련한 친구 비그르의 다른 버전에 불과하고, 비그르는 잘 속아 넘어가는 후작과 비슷한 인간일 뿐이지. 게다가 쥐스틴과 아가트의 차이점도 도무지 모르겠어. 아가트는 후작이 결국 결혼할 수밖에 없었던 저 창녀의 분신이야.

 

쿤데라가 주인공의 입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모든 이야기는 즉 스토리, 줄거리라고 부르는 것들은 모두 반복되는 것일 뿐이라는 뜻이다. 이야기, 줄거리, 스토리 등은 모두 반복되는 것인데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이 작가의 개성 혹은 독창성, 천재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현대소설에서는 작가의 스타일은 작가의 세계관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은 그 작가가 어떤 작가인가를 드러내주는 자기 증명이다. 

 

쿤데라는 연애 이야기가 치정으로 얽히면서 복수로 결말을 맺는 것처럼 보이지만 복수야 말로 반복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한다. 복수는 복수를 부르는 반복이다. 자크와 주인은 복수의 드라마의 희생자로서 감옥에 가거나 사형집행을 당하는 고초를 겪은 뒤 다른 곳을 향해 나아간다. 즉 복수의 반복에서 벗어나 혹은 이야기의 반복에서 벗어나 새로운 곳을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 그곳은 앞이다. 앞은 알 수 없는 곳이어서 규정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한 발을 내딛고 나가는 곳이 앞일 뿐이다.

 

자크   나리께 큰 비밀 하나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인류가 태곳적부터 알아 온 계략이죠. 어느 쪽으로 가도 앞입니다.

주인   (주위를 빙 둘러보며) 아무 쪽이나?

자크   (팔을 크게 돌려 원을 그리며) 나리께서 어디를 보건 사방이 앞이죠!

주인   (열의 없이)멋지구나, 자크! 멋져!

 

(그는 천천히 몸을 돌린다.)

 

자크   (침울하게) 네, 나리. 저도 아주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주인   (적절한 연기를 잠깐 한 뒤 슬프게) 자, 가자, 앞으로!

 

(두 사람은 무대 안쪽을 향해 대각선으로 걸어간다…….)

 

(막)

 

쿤데라는 이 작품을 1971년 7월, 프라하에서 썼다. 러시아는 1968년 8월에 체코에 침공했다. 쿤데라는 이를 두고 모든 것이 끝장난 것 같았다고 느꼈다. 그 와중에 이 작품을 썼는데 아마도 그의 머릿속에서는 희망이 없는데도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역사에 대한 생각이 가득 차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크와 그의 주인>의 두 주인공은 복수라는 반복의 사슬을 끊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지만 앞을 알 수 없다. 앞이란 인류가 어디든 발을 내딛는 곳이기 때문에 어느 쪽으로 가든 상관없다. 그러나 그 앞이란 곳이 희망적일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앞이 더 고통스러울지 행복할지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그저 앞으로 간다는 것은 침울하고 슬픈 것일 수 있다. 두 주인공은 앞으로 가지만 희망으로 부푼 상태가 아니라 우울하고 애처롭기까지 하다.

 

쿤데라는 모든 게 끝장난 상황을 디드로의 해학과 풍자와 장황한 이야기, 일관된 구성을 깨는 식의 일탈 등을 통해 벗어나려고 하지만 역사의 무거운 수레바퀴 앞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 자체가 고통임을 깨닫는다.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지만 인간은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동시에 부여받는다. 첫 번째 인간 아담은 자유의지를 올바르게 사용할 줄 몰라서 결국 타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인간은 현재에도 여러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러나 어떤 것이 올바른 선택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 또한 방향성과 결과를 알 수 없기에 미지의 것이 되고 만다. 미지의 것은 항상 불안하고 두렵게 한다.

 

이런 인간의 진퇴양난의 상황을 쿤데라는 <자크와 그의 주인>에서 여실히 보여준다. 연애는 실패하고 복수에도 실패한 뒤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지만 ‘앞’ 그 자체를 알 수 없는 상황. 그러나 앞으로밖에 나아갈 수 없는 상황. 쿤데라는 모든 게 끝장난 상황에서 앞을 찾아 무작정 한 발을 내딛는 인간의 고통스런 행위,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매우 용감한 행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쿤데라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멋져!

 

우리도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코로나 상황을 겪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는 것밖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

 

우리도, 우리 인생도 멋지다!

 

 

 

* 드니 디드로 Denis Diderot (프랑스1713-1784) 철학자, 계몽사상가, 작가, 예술비평가

18세기 프랑스 유물론을 대표하는 철학자, 계몽사상가로 『백과전서(1751~1780)』편집, 발행자.

기계론적 유물론의 입장에서 물질과 운동을 연결시켜 사고하고, 자연에 있어서의 다양한 과정을 자연의 영원한 형태 변화와 관련시켰으며, 의식의 본성에 대해서도 물질의 발전 위에서 생겨난다고 생각하였다.

아는 것(知)은 단순히 진리를 아는 것을 넘어 자연에 대한 인간의 힘을 증대하기 위해 도움이 되는 것이라는 입장에서 지식과 기술, 산업과의 결합을 중시했다.

진보적인 활동에 전념했지만, 사회를 바라보는 눈은 관념론에 머물렀고, 정치적인 견해는 봉건적 전제와는 투쟁하면서도 계몽적인 군주제를 옹호했다.

 

*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

드니 디드로 사후 1796년 간행. 하인 자크가 주인과 말을 타고 여행을 하면서 자기의 연애 이야기를 하는 줄거리인데 이야기가 자꾸 빗나가 다른 곁가지 이야기로 흐르고, 그 곁가지 이야기들이 수많은 단편·중편을 이루는 파격적인 형식의 소설.

인간은 원인과 결과의 필연적인 연쇄관계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자유로운 것인가라는 문제를 추구하려는 의도로 연대기적으로 일관되지 않고 삽화적이고 복잡다단한 이야기 구조를 띠고 있다.

 

* 변주變奏

어떤 주제를 바탕으로, 선율ㆍ리듬ㆍ화성 따위를 여러 가지로 변형하여 연주함. 또는 그런 연주.

 

* 오마주(프 hommage)

영화를 촬영할 때, 다른 감독이나 작가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그 감독이나 작가가 만든 영화의 대사나 장면을 인용하는 일. 프랑스어로 ‘존경’, ‘경의’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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