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아르튀르 랭보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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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아르튀르 랭보 <소설>

by 브린니 2020. 9. 11.

소설

ROMAN

 

I

누구나 진지하지 않은 법이지, 열일곱의 나이에는.

- 어느 날 저녁, 생맥주와 레몬주스,

번뜩이는 샹들리에의 떠들썩한 카페들 따위 집어치우고!

- 산책길의 초록빛 보리수 아래로 가노라.

상큼한 6월 저녁 날에 보리수는 향기롭구나!

공기가 때로는 아주 부드러워 눈까풀이 감기고.

소음을 싣고 오는 바람에는, -시내가 멀지 않다,-

포도나무 향기와 맥주 향이 담겨 있고······

 

- 하나의 작은 천 조각 어두운 창공이

보이는구나, 작은 나뭇가지 하나로 테를 두르고,

부드럽게 떨며 녹아내리는,

작고 아주 하얀, 나쁜 별 한 개가 박혀 있고······

6월의 밤! 열일곱의 나이여! - 취기에 젖어든다.

수액은 샴페인, 그대 머리로 오르고······

횡설수설할 때, 입술에서, 어린 짐승처럼

팔딱이는 입맞춤 하나 느낀다······

 

미친 가슴은 소설들을 가로질러 로빈슨 크루소처럼 방황한다.

- 어느 창백한 가로등 불빛 속에서,

매혹적인 아담의 자태의 아가씨가 지나갈 때,

제 아버지의 겁주는 장식 칼라 그림자 아래로······

그리고 그대가 아주 순진하다고 생각하고는,

제 작은 반장화로 종종걸음 치다가,

그녀는 몸을 돌린다, 재빠르게 경쾌한 동작으로······

- 그러면 그대의 입술 위에서 카바티나가 스러져간다······

 

그대는 사랑에 빠졌도다. 8월까지는 칭송받고.

그대는 사랑에 빠졌도다. - 그대의 소네트가 그녀를 웃기는구나.

그대 친구들은 모두 가버리고, 그대는 나쁜 취향.

- 그러자 사랑받은 여자가, 어느 날 저녁, 그대에게 편지 써주었다······!

- 그날 저녁······ - 그대는 요란한 카페로 돌아와서,

생맥주나 레몬주스를 주문한다······

- 누구나 진지하지 않은 법이지, 열일곱의 나이에는

그리고 산책길에 초록빛 보리수가 있을 때는.

 

[18]70년 9월 29일

―아르튀르 랭보 Arthur Rimbaud (프랑스, 1854–1891)

 

 

 

【산책】

 

17살. 정말 푸른 나이.

인생 최고의 한 때.

젊다고 말하기에도 벅찬 더 푸르른 날들.

 

그때는 그랬지.

뭐든 꿈꾸는 대로, 세상은 내 맘대로, 인생은 뭐든 가능할 것 같은,

성장기의 끝, 혹은 어른으로 들어가는 통과제의.

 

17살에는 초록빛 보리수 아래를 걷는다.

 

그리고 사랑!

 

첫 입맞춤.

 

사랑에 빠졌다고, 누군가에게 슬쩍 흘리는 말들.

 

17살, 시가 아니라 소설.

꿈이 아니라 현실로 들어가는 문.

 

레몬수에서 샴페인, 생맥주로!

 

그러므로

누구나 진지하지 않은 법이지, 열일곱의 나이에는.

 

운명은 태어나기 전부터 다른 어떤 곳에서 결정되었을지라도

운명을 맘껏 비웃으며

운명과는 다른 길을 걸어가리라, 호기롭게 외칠 수 있었던

 

17세.

 

그때, 당신은 무엇을 생각했는가.

그때, 당신은 무엇을 했는가.

그때를 지금 무엇으로 정의하는가.

 

사랑을 알지 못해도 사랑하고,

서툴고, 어설픈 입맞춤.

 

인생에 대해 수없이 끼적였던 많은 낙서들!

친구들과 돌려보았던 불온한 서적들, 영상들.

호기심과 욕망과 고민과 절망이 교차했던 날들.

 

그러나 슬픔과 우울은 없었던(어쩌면 깊은 우울에 빠진 몇몇도 있었다)

어쩌면 너무 푸르러서 더 슬펐는지도 모른다.

 

놓친 사랑도 있다.

가버린 사람도 있다.

미처 만나지 못한 사람도 있다.

 

기회의 뒤통수를 잡으려다 넘어진 적도 있다.

 

우리나라의 17살, 대학 입시 때문에 고심했던 날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을 어쩌지 못했었다.

 

인생은 그냥 인생이었다.

인생을 잘 살기 위한 그 많은 충고들을 비웃었다.

설령 그것 때문에 인생에 실패했을지라도 비웃는 것은 젊음의 권리였다.

 

비웃지 않았다면 비겁한 것이리라.

 

인생을 실패로 끝장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날들.

비극으로 대단원의 결말을 내고 싶은 어떤 충동들.

 

아, 17세. 그런 모든, 어떤, 이상하고 낯선 것들로 가득 찬 시간들.

 

바로 그 시간을 어쩌지 못해 방황했던 날들.

여러 사건들!

사건이 없다면 그건 인생이 아니다.

 

다 기록할 수 없는 나쁜 사건들, 혹은 부끄러운 행위들.

 

나쁜 취향. 술과 담배, 대중음악, 취해서 밤거리를 쏘다니기.

 

몽롱한 기억들!

 

17세 ― 랭보의 시간

어쩌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던 나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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