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연재] 진짜 교회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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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

[장편소설 연재] 진짜 교회 (22)

by 브린니 2020. 8. 23.

진짜 교회 22

 

 

12 세상을 향해 회개하다

 

임시총회 날이었다. 총회장은 사흘 전 임원들에게 임시총회에서 다루게 될 사안을 대략 전달했다. 대부분이 입을 닫지 못했다. 총회가 새롭게 시작된 이래 단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 총회 내에서 일어났던 불미스러운 일뿐만 아니라 우리 교계 전체가 저지른 각종 죄악들을 낱낱이 낭독하고 그것들에 대해 하나님과 온 교회와 성도들 그리고 세상과 사회를 향해 머리 숙여 사죄하는 것이었다.

임시총회는 다른 행사 없이 오로지 회개문을 낭독하고, 온 성도 앞에 사죄를 표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끝났다.

 

이제 회개한 모든 것을 실제로 고치는 일만 남았다.

 

 

13 총회에서 느헤미야 형제가 말하다

 

총회 소속 목회자 세미나가 김영수 목사가 섬기는 OO교회에서 열렸다. 총회장 오경욱 목사가 목회자 세미나를 열게 된 취지를 설명하고 기도했다. 목회자 세미나를 추진한 김영수 목사가 느헤미야 형제를 연사로 초청해 평신도가 오늘날 한국교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들어보자고 말했다.

 

“목사님, 목회자 세미나에 평신도가 연사로 나온다는 게 좀……”

“목사님, 아무리 세미나라고 해도 그렇지 평신도가 우리를 가르친다는 게……”

목회자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하며 느헤미야 형제가 연사로 나서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목사님들!”

총회장이 일어섰다.

 

“여러분들 왜 말끝을 흐리십니까? 그래서 오늘 목회자 세미나를 열고 있다는 것을 아직 모르십니까? 우리는 만인사제직이라고 말만 할 뿐 평신도가 설교를 하거나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평신도야말로 목회자 세미나 연사로 나서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성도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우리도 평신도에게 배워야 할 때입니다.”

 

“총회장님, 저, 느헤미야 형제란 분이 과연 그런 자격이 있다고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총회 회계를 맡고 있는 이차현 목사가 물었다.

 

“느헤미야 형제의 간곡한 부탁 때문에 아무런 소개도 하지 않았습니다만 어쩔 수 없군요.”

총회장 오경욱 목사는 느헤미야 형제를 보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호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읽었다.

 

“느헤미야 형제는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다수의 저서를 출간하였으며, 수 년 전 회심하고, 주께 온 삶을 드리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고 얼마 전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로서 사역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믿고 현재까지 문서사역과 대안학교 등을 통해 여러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형제의 조부와 선친은 모두 목회자였습니다. 자, 이제 형제의 말에 귀를 기울이실 준비가 되셨습니까?

 

우리가 형제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형제가 이 세미나에 나올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외부로부터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강도 만난 자와 같습니다. 우리는 이제 밖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할 만큼 타락한 상태이며 스스로에게 의지해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형제님, 목회자들의 무례를 용서하시고, 시작하시지요.”

 

목회자들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우리가 얼마나 목회자라는 자격에 집착하고 있으며, 세상이 좋아하는 학벌과 경력을 세상 못지않게 좋아하는지 알 수 있었다.

 

느헤미야 형제는 단에 오르지 않고 마이크를 들고 목회자들 앞에서 서서 조용하지만 강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교회의 문제점들이 여러 가지로 연구되고 분석되고 있지만 적절한 대안은 내놓고 있지 못한 실정입니다. 어쩌면 원인을 제대로 밝히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나온 문제점들은 대략 이렇습니다. 첫째 우리 교회의 문제는 교단 지도자들과 목회자들의 영적, 윤리적 타락입니다. 교단지도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패거리를 만들고, 교단의 최고자리를 놓고 다투며, 각종 불법적인 행태로 권력을 차지하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각종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소위 성공했다는 대형교회 목회자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며, 종신토록 권력을 유지한 뒤 원로 목사가 되어 교회를 지배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자녀들에게 교회를 세습하여 교회를 기업이나 왕국처럼 자신의 집안이 다스리려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2, 3세대 목회자에게서 더욱 크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1세대 목회자들이 체험적 신앙으로 헌신했던 것과는 달리 2, 3세대 목회자들은 소위 머리 좋고, 공부 많이 한 분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지적이면서, 이론적이고, 논리적이며, 합리적, 이성적입니다. 그분들은 그리스도를 만나고 동행한 체험보다는 자신의 연구업적을 더 내세웁니다. 그분들의 연구와 학업적 성취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분들이 정말 그리스도를 위해 겪은 고난이 그들의 신앙을 반석 위에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습니다. 오히려 2, 3세대 목회자들은 재정, 학문 연구, 사생활 등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교회 재정 유용, 논문 표절, 성적인 범죄 등은 단순한 실수와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만홀히 여기는 추악하고, 반역적인 죄악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형교회 시스템은 그 자체로 문제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대형교회는 성공한 목회의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대형교회는 목회자가 영적 능력이 있고, 교회 경영에 탁월한 분임을 한눈에 보여주는 지표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대형교회 목회자를 존경하고 신뢰합니다. 그들의 헌신과 노력을 높이 삽니다. 그분들의 성공한 목회는 성령이 함께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그분들은 사회에서도 존경받고 교단에서도 높은 지위를 갖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설교는 해당 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대형교회의 프로그램과 조직과 시스템은 다른 교회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됩니다. 한 마디로 대형교회는 우리나라 모든 교회들의 모델입니다. 심지어 세계 교회도 한국 교회의 성장 동력을 배우고, 시스템과 조직과 프로그램을 살피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형교회의 성공은 그 자체로 우리 교회 전체를 죽이고 있습니다. 대형교회가 무엇, 무엇을 구체적으로 잘못했는지 나열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해당 교회들이 대형교회로 성장함으로써 다른 교회들을 잠식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대형교회가 성공한 목회의 모델이 됨으로써 다른 교회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최소한 10년 안에 빨리 큰 교회를 세우지 못하는 목회는 실패한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대형교회가 안정을 누리는 동안 작은 교회는 더 이상 개척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렸습니다. 이미 크게 성장한 대형교회가 교회의 이상적 모델이 되어버린 이상 개척교회나 작은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교회가 없어지고 대형교회 몇 군데만 남게 되었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그때부터 비로소 대형교회가 망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작은 지역교회들이 모두 문을 닫고 대형교회 몇 군데만 거대한 상징물처럼 서 있게 되었을 때 세상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를 찾지 않을 것입니다. 유럽의 대형교회들이 이미 도서관이나 공공건물, 심지어 술집이나 나이트클럽으로 바뀐 것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상이 되어버린 건물에 불과한 교회를 부숴야 합니다.

 

이제 대형교회는 예배당에서 한 번에 예배드릴 수 있는 성도 수를 제외하고는 성도들이 흩어져 다른 지역교회들을 섬겨야 합니다. 대형교회를 쪼개서 여러 작은 교회로 흩어야 합니다. 스데반 순교 이후 박해가 심해지자 예루살렘 교회는 흩어졌습니다. 그래서 안디옥의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고, 안디옥 교회는 담임목사라고 할 수 있는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함으로써 전세계에 복음을 전파합니다.

 

현재 이십대 이하 국민들 중 겨우 5%만이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우리의 다음 세대는 미전도 종족인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 세대를 향해 시간 개념의 선교사를 파송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앙의 상징물 즉 큰 교회가 성공한 목회라는 우리 속에 굳건하게 자리잡은 우상을 파괴하고, 그 우상을 파괴한 힘과 능력으로 복음을 다시 전해야 합니다.

 

하루속히 대형교회를 수많은 작은 교회들로 흩어서 건강한 지역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공동체성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 돕고, 서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는 진정한 성도들의 모음으로 탈바꿈해야 합니다.

 

이제 정말 화려한 교회 성전 건축은 그만두어야 합니다. 헤롯 성전이 금으로 장식하면서 화려하게 짓고 있는 것을 두고 유대인이 찬사를 보내자 예수님은 성전이 곧 무너질 것이며 예수님 자신이 사흘만에 다시 세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비웃었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성전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성전 그 자체이시며 그리스도를 몸과 마음에 모시고 사는 성도들이 곧 성전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건물은 더 이상 크고 화려하게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도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는 대부분 가정에서 혹은 지하 무덤에서 모였습니다. 그때는 핍박 때문에 어쩔 수 없었고 이제 핍박이 없으니 성전을 크고 멋지게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성전을 크게 짓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것은 성경 어디에도 없고 하나님도 그것을 명령하신 적이 없습니다.

출애굽 후에 상징적으로 성막을 지으라고 명하신 적이 있지만 그 후에 솔로몬의 성전도 다윗의 인간적인 열망과 솔로몬의 힘으로 지은 것 아닙니까?

신약시대에 예수님은 자신을 경배하라고 말씀하신 적도 없고 더욱이 성전을 지으라는 말씀은 단 한번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큰 성전이 필요한 것은 많은 사람이 모여 한꺼번에 성대한 예배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대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착각을 이제 버려야 합니다. 얼마나 모였냐? 몇 명이나 모였냐? 규모로 예배의 정도를 측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가 계신 곳, 성도들이 모인 그곳이 교회입니다. 모일 만한 장소가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럼 그런 장소를 찾아서 빌려쓰면 됩니다. 더욱이 많은 사람이 모일 필요가 없습니다. 몇몇 사람이 작은 규모로, 많은 곳에서 모이면 됩니다.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그리스도가 계시면 족합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면서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마음을 열고 서로 치유하고 울고 웃으며 기쁨과 사랑을 나눌 수 있다면, 아니 그러기 위해서라도 작은 교회가 더 많아야져야 합니다. 대형교회가 수십만 명을 자랑하기보다 작은 교회가 수십만 개 새로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온라인 교회가 더욱 확산될 것입니다. 오프라인에서 성도들이 지역 사회에서 작은 규모로 모이고, 온라인에서는 사회관계망을 통해 성도들이 교제를 하면서 서로의 뜻을 모으고 도움이 필요한 곳을 서로 알리면서 그리스도와 동행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무형의 교회가 더 많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직접 만나서 살과 살이 부대끼는 성도들의 교제가 중요하지만 교회라는 건물과 조직과 제도를 벗어나 각자의 삶 속에서 만나는 이웃들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면서 뜻이 통하는 성도들끼리 SNS로 교제할 수 있습니다. 오프라인에서 만나듯 온라인에서도 소통하고 교제할 수 있다면 그것이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서울과 부산, 대구와 광주, 대전과 전주, 강릉과 인천의 성도가 서로 서로 교제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교회 아닐까요?

 

교회란 건물이나 제도, 조직이 아니라 성도들의 모임 그 자체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삶과 공동체의 주인으로 모시고, 성도들의 교제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성도들의 모임이라면 모두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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