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연재] 진짜 교회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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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

[장편소설 연재] 진짜 교회 (19)

by 브린니 2020. 8. 21.

진짜 교회 19

 

 

 

12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김영수 목사는 차를 몰고 교회로 돌아오면서 느혜미야 형제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내가 구원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모실 때 그리스도는 내 주인이 되신다.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와 삶의 모든 순간을 함께할 때 나는 나의 진정한 주체가 된다.


이것이 구원과 거듭남의 신비 그 자체이다.
내가 주인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주인일 때 나는 진짜 주체가 된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목회자나 건물과 조직이 교회의 주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일 때 교회는 그 자체로 주체가 된다. 교회는 곧 성도들이다. 성도들이 주체인 교회는 서로 사랑하며 거룩을 이루어간다.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으로 가는 첫걸음은 성령의 교통하심 가운데 이루어지는 성도들의 교제이며 이웃과의 사랑이다.

곧 아들 이레가 느혜미야 형제가 만날 것이다.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갈지 또 어떤 진리를 발견하게 될 지 자뭇 궁금해졌다.

 

느헤미야 형제는 책상을 정리하고 저녁 식사를 한 뒤 김이레 목사를 기다렸다. 김이레 목사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나타났다. 그는 젊고 활달해 보였고, 영적인 상태도 건강해 보였다. 그는 어떤 어려움이라도 돌파해나갈 수 있을 만큼 강인한 성품의 소유자 같았다. 묵상과 기도로 강건한 모습이었다. 그런 목회자를 만난다는 것은 느헤미야 형제에게도 기쁨이었다.

 

김이레 목사는 어서 본론으로 들어가 자신이 궁금한 것을 물어 당장 답을 얻어야겠다는 태도였다. 그런데 정작 알고 싶어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쉽게 입을 열지 못한 채 주위만 맴돌 뿐이었다.

“형제님, 신학은 마치셨나요?”

김이레 목사는 다소 공격적으로 물었다.

 

“바울은 디모데와 디도에게 다른 기준을 적용했지만 모두 은혜가 넘쳤습니다.”

“신학을 하지 않았어도 사역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는 뜻인가요?”

 

“제가 디모데의 경우이든 디도의 경우이든 주께서 어떻게 보시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죠. 스펄전이나 무디, 토저 역시 신학교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많은 평신도 선교사들이 목사 자격증이 없어서  해외에서 핍박을 당하고 있습니다. 현지 주민들이 아니라 같은 나라 자격증이 있는 선교사들에게서 말입니다.”

“선교지와 국내는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까.”

 

“종교개혁 이후 우리 개신교회는 만인사제직을 외치고 있지만 평신도 사역자들에는 설교나 가르치는 일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런 일들은 목사의 고유 영역이며 사역자들이 다 설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나눌 수 없는 사역자는 결국 봉사자일 뿐입니다.”

“왜 평신도는 봉사자로서 주님을 섬기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굳이 왜 목사 노릇을 하려는 것입니까.”

 

“그것은 목회자들이 교회의 직분의 하나라는 것을 잊고, 마치 그리스도처럼 머리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신도 사역자들이 곧이 설교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설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과 아예 가로막는 것은 다른 차원입니다.”

 

“목회자가 없는 교회나 선교지에서는 그럴 수 있겠지요. 굳이 목회자가 있는데 평신도 사역자가 강단에 서는 일이 필요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어떤 전문가에게만 맡겨진 것은 아닙니다. 만인사제직, 평신도 제사장 이런 말은 그저 말뿐인가요?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목회자나 평신도나 구별 없이 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굳이 강단권에 집착하십니까.”

“사실 강단권에 집착하는 것은 목회자들 아닙니까? 평신도 사역자들이 설교하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현재 목회자들이 강단권을 특별한 권리로 이용하면서 주께서 주신 은사를 나누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목회자 1인 체제로 교회가 운영된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교회는 민주주의로 운영되는 조직체가 아닙니다. 신정입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가 다스리십니다. 성도들은 그분께 복종해야 합니다.”

 

“목사님, 현재 우리 교회를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분이 진정 그리스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정말 그리스도의 뜻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다면 애초부터 목회자와 평신도의 구분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종이며, 동역자이며, 친구이자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따로 구별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성도들입니다. 목회자가 스스로 자신이 성도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교회를 자신의 뜻에 의해 움직이는 조직체로 만든 것 아닙니까? 중세시대 교황이 그랬고, 현재 개신교 목회자들도 그렇습니다.”

 

“목회자에게 상처가 많으신 모양입니다. 치유가 필요하겠군요. 권위자에 대한 상처가 생각보다 깊으시네요.”

“뭐라고 말씀하시든 상관없습니다. 가장 순수한 신앙을 가졌다는 청교도 역시 권력을 가지자 자신들도 모르게 핍박자가 되었습니다. 퀘이커교도들은 장로교도나 침례교도들에게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형제였을 뿐 목회자와 일반 성도로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퀘이커교도가 제대로 된 종파로 성장하지 못한 것 아닙니까? 교리도 좀 이상하고.”

“그들이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 모두 한 형제이므로 그 누구도 권력으로 다른 형제들을 억압하거나 조종할 수 없다고 외친 것은 아주 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처럼 신실하게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공동체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뭐,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노벨평화상도 받았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보기엔 인본주의적인 선함이 아닐까, 합니다. 암튼 정통은 아닙니다.”

“그들이 정통이든 아니든 현재 우리 교회의 권력적인 부패상을 볼 때 퀘이커교도는 귀감이 될 만합니다.”

 

“목회자들이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더군요. 느헤미야 형제가 생각하는 좋은 목회자상은 무엇이길래 아버지와 같이 청렴하고, 좌우로 치우침 없이 오직 한 길로 걸어오신 분조차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는 거죠?”

“저는 그저 선한 목자는 그리스도처럼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위해 아흔아홉 마리 양을 두고서라도 밤새 양을 찾아 길을 헤매는 목자를 이 시대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저 말 잘 듣는 양들이 흩어지지 않을까 더 단단히 울타리를 세우기에 급급하죠.”

 

“우리 목회자들도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옮기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거나 세상으로 돌아가는 양들을 우리가 모두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어떤 양을 두고 잃어버린 양이라고 여기십니까?”

 

“시험에 빠진 양들이죠. 목사의 설교가 거슬리거나 교회에서 하는 일에 불만을 품는 성도들이 가끔 생깁니다. 헌금 때문에 시험 드는 것도 흔히 있는 일이고, 세상 일로 근심하거나 스스로 죄에 빠지기도 합니다. 잃은 양의 모습은 아주 다양하죠.”

“네, 그럼 목회자의 말을 잘 따르지 않거나 교회를 비판적인 눈으로 보면서 시스템이나 조직에 대해 이런 저런 지적을 하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양이라기보다는 염소 아니겠습니까?”

“너무 알곡과 가라지를 일찍 골라내는 것 아닙니까. 잠시 염소 같은 모습을 보일 수 있으나 사실 모두 다 양이 아닙니까?

 

“뭐, 목회자와 스타일이 맞지 않는 양들도 있습니다. 많은 양들을 먹이다 보면 아픈 양들도 생기고요. 목회자들도 최선을 다해 뒤처지는 양들을 챙기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 챙길 수는 없습니다. 목회자의 말 듣기를 거부하는 양들도 많으니까요.”

“어쩌면 많은 목회자들이 자기와 다른 생각을 하는 양들을 염소로 몰아붙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양이냐 염소냐가 아니라 교회의 질서와 권위에 들어가지 못하는 성도는 교회의 지체가 될 수 없습니다.”

“과연 누구의 권위입니까? 정말 그리스도의 권위입니까? 목회자 자신의 권위에 들어오지 않는 성도들을 교회의 권위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비난하면서 미워하는 것 아닙니까?”

 

“정말 형제는 치유가 필요하군요. 목회자들이 그렇게 인격이 없다고 보십니까? 권위에 들어오지 못하는 양들을 보면 그저 불쌍하고 긍휼한 마음이 들 뿐입니다.”

“네, 목사님의 인격에 의문을 갖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요즘 우리 교회의 현실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목회자들이 영적인 측면에서는 문제가 없다고 칩시다. 그러나 그가 성품이나 인격적인 면에서 부족함이 없다고 보십니까? 목회자가 교회의 권위와 질서를 내세우면서 교회를 자신의 1인 체제로 끌고 나갔다면 오히려 성도들이 교회 질서를 걱정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그럴 수 있겠죠. 그렇지만 그럴 경우에도 목회자에게 섣불리 조언을 하지 말고, 중보기도하면서 주님께서 그 목회자를 다루시길 빌어야 합니다. 복수는 여호와의 것이라는 말씀도 있지 않습니까. 기도하면서 주께 맡겨야 합니다.”

“네, 압니다. 목회자들을 위해 기도하되 절대 조언하지 마라. 이것이 현재 우리 교회의 불문율이죠. 좋습니다. 성도들이 그렇게 목사를 위해 기도했는데 왜 목회자들은 계속 성도들에게 아픔을 주죠? 우리 한국 교회 성도들처럼 목회자에게 아무 말하지 않고 열심히 기도하는 성도들도 없지 않습니까. 미국 교회 구역예배 공과에는 ‘목회자가 잘못되었다고 느꼈을 때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하고 묻는 항목이 있다고 합니다.”

 

“역시 미국은 민주주의식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려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 대답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앙케이트 결과 말입니까?”

“네. 많은 미국 성도들이 만약 목회자에게 결함이 있다면 목사님께 훌륭한 정신과 의사를 소개한다, 라고 대답을 했다더군요.”

 

“정말 문제입니다. 교회 문제를 밖에서 해결하려고 하니.”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관점에서 맞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가 제대로 아픈 사람들을 치유할 수 없으니까 성도들이 병원에 가서 심리 상담을 받고 내적 치유를 받는 것입니다. 언젠가부터 교회가 성도들의 상한 심령을 어루만지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 아닙니까.”

 

“네, 인정할 것은 인정하죠. 우리 교회에는 요즘 성령의 역사로 인한 치유가 거의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죠. 성도가 목회자에게 정말 교회를 위해 충언을 아끼지 않는다면 들으시겠습니까? 아니면 교회의 권위와 질서에 순복하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그건 내용을 들어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 내용을 들어봤더니 별 것 아니면요.”

 

“당연히 교회의 질서에 속해서 지체가 되라고 말하겠죠.”

“그럼, 그 성도의 말이 맞다면요?”

 

“깊이 생각해보고 교회에 필요한 것이라면 적극 반영하겠습니다.”

“네, 그 마음 변치 마시기 바랍니다. 목사님, 정말 솔직하게 말씀해보십시오. 누가 교회를 비판하면 기분이 나쁘시죠?”

“네,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겠죠.”

 

“그런데 초대교회는 어떻게 했습니까?”

“과부들의 구제 문제 말입니까?”

 

“네,”

“아시다시피 사도들이 집사들에게 구제를 맡기고 자신들을 말씀과 기도에 전념한다고 발표했지요.”

 

“지금도 그렇게 하면 안 될까요?”

“뭘, 어떻게?”

 

“초중고 교사들도 행정 일거리가 너무 많아 교육에 전념하기 힘들다고 아우성입니다. 무리 교회 목회자들도 교회 운영하느라 너무 바쁘지 않습니까?”

“대체로 그런 편이죠.”

 

“그렇다면 말로만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하지 말고, 교회 운영은 장로나 집사들에게 맡기고 목회자들은 그야말로 말씀과 기도에만 전념하면 어떨까요? 지출결의서에 건건마다 도장 찍으려 들지 말고 말입니다.”

“네, 실현가능성은 없지만 일리 있는 말씀이긴 하네요.”

 

“교회 관리나 운영은 정말 집사들에게 맡기면 안 될까요? 목사가 나서서 다음 주일 예배 후에 행사나 교제 프로그램을 일일이 챙겨야 할까요?”

“작은 교회들이나 그렇지 큰 교회는 다 스텝들이 합니다.”

 

“그 스텝은 누구죠?”

“네?”

 

“대부분 부교역자들 아닙니까? 부목사 여러 명과 전도사, 교육전도사들. 목회 전문가들 아닙니까? 그분들도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면 안 될까요?”

“그럼 성도들 관리는 누가합니까? 큰 교회는 교구 관리만 하더라도……”

 

“그러니까 교회를 크게 만들지 말았어야죠.”

“네? 무슨 말씀인가요?”

 

“담임목사가 돌볼 수 없을 만큼 성도 수가 늘어나고, 교회가 커지는 것을 막았어야 한단 말입니다.”

“네? 교회가 스스로 성장하는 걸 어떻게 막습니까?”

 

“교회를 새로 짓지 않고, 약 300명쯤 되면 저절로 지역에 있는 다른 교회로 갈 것입니다. 목사님이 섬기는 교회만 교회인가요? 이 땅의 모든 교회가 다 그리스도의 교회 아닙니까? 어디에 간들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나, 참.”

 

“그러니까 현재 우리의 전도는 우리 교회 나와라,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라, 가 아닙니다. 어느 특정한 교회가 비대하게 성장하는 것은 우리의 전도가 죽어가는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중매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에 꼭 나오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도대체 그 두 가지가 어떻게 다릅니까?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니까 개교회 중심주의라는 욕을 먹는 것입니다. 교회 자체가 성장하는 것을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 교회는 한국교회 전체가 성장하는 게 아니라 몇 몇 교회만 비대해지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다른 교회는 문을 닫는데 내가 섬기는 교회가 성장한다? 이것을 마냥 기뻐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진짜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내 교회만 부흥하고 다른 교회가 문을 닫는다면 얼마나 마음이 찢어질까요? 그 교회가 능력이 없으니 망하는 게 당연하다고 비난할까요?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생각이 없으면 내 교회만 잘 되면 그만이다, 라는 식의 사고방식에 물들어 있는 것입니까?

 

옆 교회가 죽어가는데 내 교회의 발전상을 홍보하는 것이 바로 믿는 형제들을 돌보지 않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우리나라 전체 사회 복지의 70%를 차지합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우리더러 교회가 자기 배만 불리고 있다고 욕합니다. 새로 성전을 크게 지으면 사람들 피를 빨아서 교회 짓는다고 욕합니다. 욕하는 세상 사람들이 문제입니까? 우리 교회가 문제입니까?”

 

김이레 목사는 처음으로 할 말이 없었다.

 

“자, 보십시오. 우리가 아무리 구제와 선행을 해도 세상은 우리를 향해 욕을 합니다. 목회자들이 교회를 비판하는 성도들을 권위로 내리누르기 때문입니다. 교회 내에서 건전한 비판이 통하지 않으니까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아도 고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진짜 고쳐야 하는 문제는 그냥 두고 아무리 구제와 선행을 많이 해도 세상의 비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작은 교회가 장애인들을 상대로 아름다운 목회를 하고 있는데 근처 대형교회에서 장애인용 자동차를 구입해서 그분들을 자기네 교회로 모셔가서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주일 예배를 드리게 합니다. 그분들은 다음부터 서비스가 좋은 대형교회로 이동합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현실입니다.”

 

“그건 일부의 잘못된 행태이지 교회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큰 교회의 총동원주일, 전도축제와 같은 프로그램들이 작은 교회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보십니까? 모든 것이 잘 갖춰진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그렇지 못한 교회에 다니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결국 웰메이드 교회를 지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서비스가 갖추어진 웰메이드 교회에는 그리스도의 고난도 없고, 희생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교회끼리 경쟁한다? 그 자체가 지옥에 갈 죄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이 서로 경쟁할 수 있습니까? 남의 교회가 부흥하면 배가 아프다는 사람들이 바로 목회자 아닙니까? 교회 성장에 목을 매는 순간 목회자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닙니다. 초대교회를 배우자고 말만 그럴 듯 하게 합니다.

 

초대교회는 서로 도왔습니다. 아픔과 고난을 같이 했습니다. 각 교회마다 문제가 많았지만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데 협력했습니다. 바울이 투옥되면 모든 교회들이 그를 위해 기도하고 헌금 했습니다.

 

현재 우리 교회는 내부적으로 파벌이 심하고, 남의 죄를 용서하지 않고, 서로 헐뜯습니다. 교회를 비판하고 떠난 성도들을 배신자라고 욕을 하고, 악소문을 퍼뜨립니다. 그것도 목회자가 나서서 말입니다. 자, 이게 도대체 교회입니까? 간판만 교회일 뿐 진짜 교회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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