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연재] 진짜 교회 (16)
본문 바로가기
창작글(시, 짧은 소설)

[장편소설 연재] 진짜 교회 (16)

by 브린니 2020. 8. 16.

진짜 교회 16

 

 

 

10 진짜 그리스도의 제자 ― 새 계명

 

느헤미야 형제가 전화를 받자 김이레 목사는 자신이 김영수 목사의 아들이며 OO교회를 섬기고 있다고 말했다. 김이레 목사는 형제에게 한번 만나길 원한다고 말했고, 형제 역시 선뜻 약속 시간을 정했다.

 

통화하는 것을 듣고 있던 김영수 목사는 아들이 형제를 만나러 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연락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느헤미야 형제는 그와 아들이 많이 닮은 것 같다고 말하면서 매우 긍정적인 일들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고 했다.

 

“하하하, 우리 부자가 성격이 좀 급한 편이지요. 진리를 따르는 데는 좋은 성격 아닙니까? 하하하.”

“그렇습니다, 목사님. 제자들도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모든 걸 버리고 즉시 따랐으니까요.”

 

김 목사는 느헤미야 형제에게 아들도 자신과 함께 그리스도가 진정으로 원하는 교회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형제님, 한국 기독교의 문제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형제가 가장 중요시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국 기독교는 아직도 그리스도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신앙의 핵심이며, 그리스도가 믿음의 대상이며, 그리스도가 곧 창조주이며, 구원주이시며, 중보자이시며, 심판주이십니다.

창조 때 함께 하셨고, 인간의 타락을 지켜보셨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으며,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또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고, 육신을 입은 채 승천하셨고, 하나님 우편에서 지금도 우리를 중보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나와 온 인류의 죄를 깨끗이 속량하셨고, 과거와 현재의 죄뿐만 아니라 미래의 죄는 물론 죄를 영원히 도말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보혈의 피 때문에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피값으로 나를 속량하셨기 때문에 의롭고 거룩한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더 이상 죄 때문에 고통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십자가가 있는데도 여전히 죄와 싸우며 고통받습니다. 구원받았으니 죄와 세상과 상관없다고 교만하거나 죄와 세상을 이길 수 없다고 무기력하게 나자빠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집을 나간 둘째 아들, 바로 나 때문에 죄의 현장을 찾아 오셨고, 둘째 아들을 부르셨고, 그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 자기 자신이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구약의 하나님도 그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는데 그리스도는 그것을 넘어서 직접 둘째 아들에게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은 탕자인 그를 자신의 신부로 삼으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살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나는 결혼했기에 한몸이며 둘로 나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짝지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고 다시 죄에 빠지고 다시 돌아오는 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관점으로 보면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많은 선지자가 그토록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외쳤지만 소용없었고,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개혁도 하나님의 심판을 그리 오래 견디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돌이킬 수 없고, 자기 죄에서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으로서 우리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거나 우리가 스스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대신에 자신이 직접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 나라를 십자가를 통해 이루셨으며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아무리 신앙이 좋더라도 하나님의 백성 그 이상을 넘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을 친구라 부르신 것이 아마도 가장 큰 관계 변화가 아닐까요? 혹은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고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엘리야 정도가 있었을까요?

 

하나님과 유대 백성은 아무리 좋아도 창조주와 피조물, 왕과 그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뒤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부와 한 형제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공동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우리 속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죽고, 우리와 함께 부활하시고, 우리와 한몸이시기에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사시는 것입니다.

 

목사님이나 저나, 많은 성도들이 이를 모르지 않습니다. 교리적으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신앙의 형태는 구약시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와 각종 교회 행사와 모임 등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이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이를 최우선을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요, 한 형제요, 그리스도의 종이며 제자로서 그리스도처럼 살아야 합니다. 예배나 제사와 각종 행사는 오히려 쉽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은 어렵습니다.

 

제사와 성전 일에 바쁘다는 핑계로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자를 외면했습니다. 우리 교회들 역시 예배와 각종 행사와 모임으로 성도들의 교제와 성령의 교통을 도외시 합니다. 예배와 행사와 봉사 등을 잘 하면 성도들이 건강하게 잘 성숙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도들에겐 그리스도 안에서의 안식과 평화가 중요합니다.

 

약 10여년 전부터 경건하다고 일컬어지는 선교회에 간 적이 있는데 우리 신앙이 잘못된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네, 옳습니다. 그래서 24시간 기도하는 모임을 갖고, 간단하고 형식적인 예배 대신 2시간 넘는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회복하려고 합니다. 네, 좋습니다. 그러나 그 방식이 여전히 예배 잘 드리자, 기도 많이 하자입니다. 이미 우리 교회들이 예전부터 해오던 것들입니다. 같은 방식인데 더 강화해서 성도들을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성도간의 친밀한 교제는 없습니다. 여전히 독재적인 목회자가 강력한 리더십으로 성도들을 이끌고 있습니다. 양보하고 양보해서, 설령 24시간 기도와 2시간 넘는 예배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회복한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얻은 성령의 힘으로 다른 성도들과 이웃들과의 사랑의 교제와 구제의 실천 등이 확산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24시간 기도하고, 2시간 넘게 예배하고, 교회와 선교회의 각종 집화와 행사 등에 동원되느라 성도들과 이웃과의 교제를 할 시간과 물질이 턱 없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란 그 자체가 이웃과의 친밀한 관계여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계명이요, 둘째는 이와 같으니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첫째와 둘째는 같습니다.

 

앞의 선교회에서는 이사야, 예레미야, 호세아 시대 유대 백성이 제사는 많이 드렸지만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하지 못해서 멸망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그 시대 유대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돌보지 않았으며 백성들을 올바로 하나님께 인도하지 못하고 각종 부정부패와 재판을 잘못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우상의 무리로 가득 채웠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백성들에게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십니다(잠21:3).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반드시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말끝마다 하나님,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영광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현실적인 삶, 소위 육체적인 삶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윤리적인 측면에서 제로 상태였습니다.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죽어서, 혹은 최후 심판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실까요? 뭐라고 물으실까요?

 

네가 날 믿느냐? 하고 물으실까요?

 

믿음은 심판날 질문거리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성도들이라고 하면 응당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신있게 대답할 것이니까요.

 

오히려 네가 작은 작에게 물 한 잔 주었느냐? 하고 물으실 것입니다. 네가 멀리서 찾아온 친구를 잘 대접했느냐, 네 추워하는 형제를 입히고, 먹히고, 재웠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목사님이라면 어떻게 대답하실 것입니까?”

 

느헤미야 형제가 김영수 목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김영수 목사는 순간 대답할 수 없었다.

 

구제가 심판날에 질문거리다? 거기에 대답을 해야 한다?

김영수 목사는 머뭇거렸다. 자신이 얼마나 구제하고 있느냐 헤아려 보았다.

 

“저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몇 군데 선교단체에서 몇 명의 아이들을 정기적으로 후원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도움이 필요한 곳에 후원금을 보내고 있고요. 저희 교회는 각종 선교회와 구제 단체에 적정 금액을 후원하고 있고요.”

“네, 좋습니다. 그런데 좀 더 개인적으로 어려운 형제들, 도움이 절실한 형제들에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도움을 주신 적은요?”

 

“젊을 때 어려운 형편의 신학생들을 돕는 일을 자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만…… 최근에는 그런 기억이 별로 없군요. 사실 목회에 치중하느라 어려움에 놓인 분들을 일부러 찾아다니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네, 목사님만 하더라도 참, 귀하십니다. 다만 어려운 분들이 목사님이나 교회를 찾아오거나 혹은 우연히 직접 맞닥뜨리게 될 경우 결코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 도와야 합니다.

 

제가 잠깐 성도수가 약 150명가량 되는 교회에서 전도사로 섬길 때 일입니다. 주일 점심 식사 후 중년 남성이 찾아와 목사님을 뵙기를 간청했습니다. 저는 목회실로 안내하고 목사님께 아뢰었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이 꼭 만나야 할 사람이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 뜻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목사님을 찾아온 분이 계셔서 안내했을 뿐이니까요. 목사님은 재차 전도사님이 판단하기에 꼭 만나야 할 사람으로 보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은 손님을 맞이했습니다. 문밖에서 듣자니 고성이 오가고 잠시 후 목사님께서 그 손님을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그분은 구제를 해달라고 요청하러 온 분이었습니다. 오후 예배 뒤 회의 시간에 목사님은 교역자들이 교회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잘 분별해서 목회자에게 데려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알아들었습니다.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이 오면 목회실로 모시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문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목사님이 꼭 만나야 할 손님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런 자격을 갖춘 사람은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은 되고, 어떤 사람은 안 되는 것입니까?

 

얼마 뒤 교회에서 누가 절 찾는다고 해서 청년부실로 가 보았습니다. 웬 젊은이가 면담을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야기인즉슨 광주까지 갈 차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회계를 담당하시는 분이 청년부 담당 전도사인 저에게 인계하셨다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주머니에 있던 돈 전부를 내주었습니다. 약 3만원 정도였습니다.

 

저는 깨달았습니다. 이 교회에서는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잘 내쫓거나 아니면 담당자가 알아서 돈을 줘서 돌려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나 회계 담당이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만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전도해서 교회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것입니까? 교회가 왜 이 땅에 존재해야 합니까? 어려운 사람들이 찾아오는 대로 다 퍼주다 보면 교회에서 쓸 돈이 없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그분들이 수억을 달라고 하나요? 교회 건축에는 수억, 수십억, 수백억을 쓰면서 어려운 분들이 찾아와 손을 벌리는 데 빈손으로 돌려보내야 합니까?

 

그러고도 어떻게 강도만난 자의 이웃에 대해 설교할 수 있습니까? 그 사마리아 인은 아무런 연고도 없는, 누군지도 모르는, 심지어 적대 관계인 유대인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자신이 가진 전부를 치료비를 지불하고 모자라면 다시 와서 갚겠다고 말했습니다.

 

과연 우리 교회가 강도만난 자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앞서 그 목사님은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교회에 와서 사기를 치고 있기에 도와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들어보니 중년남성이나 저를 찾아온 청년도 다 거짓말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돌려보냈고, 저는 사기를 당해 돈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가 또 오면 또 속아주고 돈을 줄 것입니다. 장발장을 만난 시골 교회 신부님도 그렇게 하셨으니까요. 장발장이 도둑인줄 알면서도 먹여주고 재워주고 나중엔 선물을 덤으로 얹어주면서 그를 환대했습니다. 그것이 그냥 소설 이야기입니까? 강도만난 자 이야기도 성경에 나오는 옛날이야기입니까?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하면서 이런 말씀은 흘려보내고 도대체 어떤 말씀을 진리로 신봉하고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우리가 이사야, 예레미야 시대의 제사장과 종교지도자, 그리고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달달 외우고, 예배와 제사에 목숨을 걸고, 율법 지키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구약시대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너희가 나를 버렸다고 말씀하셨고,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 아비는 사탄이다, 하고 질책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이방인들이 천국을 차지하고 너희들은 바깥 어두운 데서 이를 갈고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김영수 목사는 고개를 떨구고 생각에 빠졌다. 지난 주 자신의 설교에서도 이런 부분을 잠깐 언급했지만 느헤미야 형제의 말을 듣고 있자니 새삼 우리의 신앙이, 우리 교회가 가르치는 것들이,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직접 보여주신 삶과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고 있지만 실천을 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실천할 수 없도록 만드는 잘못된 앎이 문제였다. 그 잘못된 지식은 목회자들이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이 앵무새처럼 교리만 읊어댈 뿐 그 가운데 하나라도 제대로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자 교육에는 열을 올렸지만 진짜 제자 되는 삶에는 수수방관했기 때문이었다.

 

진짜 제자 되는 삶이란 무엇인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너희가 네 제자인줄 알리라.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는 늘 뒷전이면서 말씀, 말씀, 교회, 교회, 예배, 예배, 헌신, 헌신, 했을 뿐이다. 전도해서 교회를 가득 채우고, 성전을 멋지게 올리면서도 구제와 이웃돕기엔 눈꼽만큼 배당하고 생색만 냈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거하시는 내 몸이, 내 영혼이, 내 마음이 성전인데 굳이 왜 교회 건물을 크게 짓고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데 열을 올렸을까? 그것이 왜 목회 성공이라고 여겼을까? 정작 죽어가는 이웃들이 여기 저기 한도 끝도 없는데.

 

“목사님, 세상 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는 말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 단지 선교의 사명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끝까지 전파하자, 세상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알게 하자는 말은 단순히 선교하자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함으로써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자동적으로 알게 하자는 말이 아닙니까?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 모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당연히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어떤 분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사는지 알게 되면 그들도 자연스럽게 우리를 따를 것입니다. 모든 족속들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것이며 그리스도가 분부하신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게 될 것입니다.

 

새 계명은 오직 서로 사랑하라는 것뿐이니까요. 다른 계명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으니까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