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연재] 진짜 교회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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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

[장편소설 연재] 진짜 교회 (15)

by 브린니 2020. 8. 13.

진짜 교회 15

 

9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김영수 목사는 차를 몰아 느헤미야 형제에게로 갔다. 형제는 아타나시우스의 ‘하나님 됨’ 의 신학을 연구한 동방정교회 사제의 책을 번역한 원고를 손질하고 있었다.

 

에스더 자매가 차를 내왔다. 아름답고 평온한 얼굴이었지만 눈가에 주름이 깊었다. 아마도 그녀의 결혼생활이 그리 평탄하지만은 않았다는 느낌이었다. 느헤미야 형제는 몇 년 전까지 자신이야말로 죄악 가운데 있었노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신의 과거의 삶에 대해서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간증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신념에서였다. 오직 진리만이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킨다. 그것이 그의 모토였다.

 

김영수 목사는 느헤미야 형제에 대해 더 깊이 알기 위해서 이것저것 물었다. 느헤미야 형제는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김 목사는 형제의 신앙 이력에 대해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김 목사는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영접했으며, 어떻게 목회자가 되었는지 말해 주었다. 둘째 아들이 대를 이어 목회자가 되었고 아직 목회할 날이 많이 남았는데 자기처럼 교회 성장에 만족하며 목회를 할까봐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꼭 부탁하신 일에만 최선을 다하고 굳이 다른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우선 아닐까요?”

“그것이 어디 한두 가지 이겠습니까.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것이 얼마나 많은데…….”

 

“저는 크게 세 가지만 염두에 두고 싶습니다.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고 나를 기념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열방으로 제자를 삼아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는 것이고, 셋째는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먹고 마시며 바로 그 생명을 이웃과 나누라는 말씀이겠지요.

 

제자를 삼고,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는 것은 주께서 제자를 부르시고,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와 함께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이미 가져오셨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와 통치를 확장하는 일에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열방으로 제자를 삼아 주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분부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내 발을 씻겨라. 내가 너희를 죽기까지 사랑했으니 너희도 나를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너희 발을 씻긴 것처럼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주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피차 복종하고, 서로 짐을 나눠지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율법, 즉 그리스도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저와 섬기는 교회도 성도간의 교제와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여러모로 애쓰고 있습니다. 전도와 선교와 구제에 많은 재정을 투입합니다. 하지만 형제의 말대로 진짜 성도들의 교제와 이웃 사랑이 넘쳐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영적인 일에 치중했습니다. 말끝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면서 굳이 할 필요 없는 행사들을 만들고 성도들에게 지나친 헌신을 강요해왔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열을 올린 나머지 교회 그 자체인 성도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습니다.

 

왕을 잘 섬기는 충신들이 있었습니다. 왕의 뜻을 잘 받들기 위해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왕이 그들을 향해 진노했습니다. 왕의 비위를 맞추는데 급급하지 말고, 백성들의 민원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왕이 진짜 왕이라면 왕의 뜻은 그가 사랑하는 백성이 평안한 삶을 누리는 데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온통 왕에게만 있었지 백성들에게는 없었습니다. 우리가 왕의 신하라면 왕의 눈치를 살피기보다는 왕이 사랑하는 백성들의 평안을 염려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겠다고 예배나 영적인 일에 몰두하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습니다. 화살표는 일방향으로 흘러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으로 사랑으로 향해야 합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섬기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단지 너희들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서로 발을 씻어주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를 돕고, 서로 짐을 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께서 가장 원하시는 일은 뒷전으로 두고, 예배나 교회 운영에 지나칠 정도로 열심입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시대를 책망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도, 헛된 제사와 숫양의 제물에 배부르니 희생의 고기를 너희들끼리 처먹으라고 말씀하시지 않겠습니까?”

 

김영수 목사는 참담한 표정으로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반쯤 숙이고 있었다. 종교개혁은 언제나 영적인 행위를 강화하는 걸 목적으로 삼았다. 기도가 부족하다고 느끼면 금식기도 철야기도 기도세미나 등 기도를 강화하고, 각종 영성세미나, 캠프, 수양회를 통해 성경지식과 신앙적 열정을 고취해왔다.

 

그러나 이웃 사랑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에 대해선 거의 살펴보지 못했다. 하나님 사랑 앞에서 이웃사랑은 늘 뒷전 이었다. 언제나 1계명이 먼저이고, 2계명은 나중에, 였다. 2계명이 1계명과 같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사족처럼 여겼다.

 

“그럼 누구부터 어떻게 사랑할까요? 참, 이렇게 말하고 보니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던 율법교사가 된 것 같군요.”

김영수 목사가 물었다.

“먼저 세리와 창기 같은 죄인들에게로 가십시오.”

느헤미야 형제가 말했다.

 

“저희 교회는 성매매 여성들을 돕고, 교도소를 방문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네, 잘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섬기는 교회에 성매매 여성이나 전과 5범 살인자나 청소년성범죄자가 출석하고 있나요?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그들은 다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글쎄요. 그들 가운데 누군가 정말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어딘가 교회에 나가고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 교회가 어디죠? 한군데라도 알고 계신가요?”

 

김영수 목사는 입을 다물었다. 한국교회가 중산층 교회라서 가난한 자들이 교회에 나올 수 없다는 말을 자주 듣곤 했지만 그가 섬기는 교회 역시 소위 ‘좀 이상한 사람들’은 거의 한 사람도 없다.

 

“이걸 읽어보실래요?”

대형교회를 섬기다 몇 년 전 소천한 대형교회 목사의 글이었다.

 

노숙자들이 대형교회에 와서 자주 돈을 얻어갔다. 그런데 어느 주일에 교회 로비에서 담임목사와 만났다. 목사가 “주일인데 같이 예배드리고 예수 믿으세요.” 라고 하자 그들은 “높은 분들이 많이 드나드는 교회에 우리 같은 사람이 어떻게 들어갑니까? 우리가 들어가 앉아 있으면 사람들이 냄새난다고 쫓아낼걸요.” 하고 대답했다. 노숙자들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목사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비슷하다. 우리는 구원받았지만 우리 속에서는 썩는 냄새가 계속 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코를 막으시는 일이 없어질까?’

 

“이 글을 읽고 뭘 느끼십니까?”

느헤미야 형제가 물었다.

 

“글쎄요. 이 목사님의 말씀이 지당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우리는 거듭난 후에도 죄에 쉽게 빠지고, 썩는 냄새를 풍기는 죄인이니까요.”

김 목사가 대답했다.

 

“네, 구속사적 관점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너무 영적인 깨달음 아닙니까? 그래서 더 피상적으로 느껴지지 않으세요? 이 글에 뭔가 빠져 있는 게 보이지 않으십니까? 과연 사건이 여기서 끝나도 되는 것일까요?”

느헤미야 형제가 이의를 제기했다.

 

“뭐가 더 있어야 한다는 거죠?”

김 목사가 물었다.

 

“목사님, 그것이 교리와 현실의 거리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기독교의 가장 큰 교리로 믿고 있지만 결코 그렇게 행하지 않습니다. 이 사건의 뒷이야기는 뭘까요?”

김영수 목사는 글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몸을 떨었다.

 

“아, 이 노숙자 분들이 결국 돈 몇 푼만 받고 그냥 교회를 나갔군요.”

“그렇습니다. 그들은 큰 교회 담임 목사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만났습니다. 서로 대화까지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돈만 받고 그냥 교회를 나갔습니다.”

 

“아, 우리의 중산층 교회에는 그들을 위한 예배 자리가 없기 때문이겠지요. 우리는 한 명의 교인을 얻기 위해 전도하면서도 제 발로 찾아온 사람들을 교회에 들이지 않았습니다.”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보십시오. 그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돈을 구걸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은과 금은 없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외쳤습니다. 그 사람은 구원받고 성전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 들어온 노숙자들은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채 성전에서 쫓겨났군요.”

김 목사가 한탄하듯 내뱉었다.

 

“그렇습니다. 이 사건은 크고 유명한 교회에서, 영성이 깊은 목사님의 교회에서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내쫓은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느헤미야 형제가 김영수 목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김영수 목사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기만 했다.

 

“얼마 전 한 형제가 겪은 일입니다. 그는 가끔 아내와 늦은 밤에 산책을 하곤 했는데 물병을 손에 들고 자주 마시다보니 급히 화장실을 찾는 일이 자주 있었답니다. 산책길에는 공중 화장실이 없었습니다.

 

어느 주일날 밤이었습니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 주위를 둘러보는데 마침 교회 현관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밤이면 늘 문이 잠겨 있었는데 그날따라 열려 있어 하나님이 도우시는 것 같았습니다.

 

현관 바로 옆에 화장실이 보여 재빨리 들어가 볼일을 보고 나오는데 그 교회 목사님으로 보이는 분이 현관문을 잠그고 계셨습니다. 형제는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목사님으로 보이는 분은 점잖은 목소리를 무슨 일이냐고 물으셨습니다. 다 알고 물으시는 듯했지만 형제는 화장실 좀 쓰고 지금 나가려는 참입니다, 하고 대답했답니다.

 

목사님으로 보이는 그분은 다시 점잖은 목사로 "그렇다고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사무실에 말씀을 하고 사용하셔야죠. 교회는 아무나 함부로 들어오는 곳이 아닙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형제는 죄송합니다, 하고 급히 교회를 빠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교회를 돌아보았습니다. 대형 플랜카드가 걸려 있었는데 마침 오늘이 총동원전도주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현관문이 늦게까지 열려 있었던 것이지요. 아마도 목사님은 사무실에서 CCTV로 형제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현관문을 잠그기 위해 급히 나오신 모양입니다.

 

그러곤 형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는 아무나 함부로 들어오는 곳이 아닙니다. 길을 가던 나그네가 화장실이 급해 잠시 들어왔는데 교회가 아무나 함부로 들어오는 곳이 아니라면 누가 어떻게 들어와야 한단 말입니까? 목사님, 이것은 최근에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김영수 목사는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도저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말 목회 40년을 해왔지만 도대체 우리 교회에 대해 아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자신이 알고 있던 교회의 현실과 느헤미야 형제가 말하는 교회의 실상이 어쩌면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 있단 말인가. 김영수 목사는 고개를 들어 느헤미야 형제의 얼굴을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우리가 예수님과 다르게 살면서, 예수님과 다르게 선교하고, 다르게 사랑하고 있었군요.”

김 목사가 탄식하듯 낮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세리나 창기와 같은 죄인을 구원하셨지만 우리는 죄인을 교회 밖으로 내쫓고, 우리 눈에 썩 괜찮아 보이는 사람들에게만 전도합니다. 그러니 아무리 전도해도 우리의 전도는 교회라는 조직의 확장일 뿐 죽어가는 영혼을 사랑으로 품는 것이 아닙니다.

 

멀리 있는 아프리카 어린이에게는 구호물자를 보내지만 그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것은 노땡큐입니다. 그들이 나와 멀리 떨어져 있다면 안심하고 도울 수 있지만 이웃이 내 곁에 너무 바짝 붙어 있으면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이웃 사랑 방식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서로 살을 맞대고 살기를 싫어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눈에 띄지 않는 한에서 사랑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들이 우리의 이웃이 아닐 때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떠났다고 말씀하시겠군요. 입술뿐인 예배라고 하시겠군요. 제사를 잘 드리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백성을 상처를 돌보지 않아서 우리 예배를 받지 않으셨군요. 그러니까 형제님 말씀은 이웃사랑이 우리 교회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들이 우리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는 한 그리스도께서도 들어오지 못하고 문 밖에 서 계신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읽은 글은 우리가 부활절이나 성탄절에 자주 무대에 올리는 연극대본을 생각나게 하지 않습니까?”

“네. 예수님이 거지 노파나 술 취한 노숙자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주인공이 그분을 몰라본다는 이야기죠.”

 

“그 대형교회를 찾아 돈을 구걸하던 노숙자가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였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 형제여.”

김영수 목사는 느헤미야 형제의 입을 통해 말씀하고 계시다고 느꼈다.

 

“목사님, 교회에서 일어나지 않는 사건은 그리스도인에게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냄새나는 사람들을 성전에 들여서 같이 예배드리고, 교회 식당에서 국수를 나눠 먹고, 그들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고, 그들의 아픔과 고통과 상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그들은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요. 다시 술과 도박과 무기력한 생활로 돌아갔을지도 모르지만 교회가 그들을 받아들이고, 함께 예배하고, 함께 먹고, 함께 이야기를 나눈 것에 대해서는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지금 우리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이런 식으로 욕을 먹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조금 전에 읽은 글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냄새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의 영적 상태를 본다고 했습니다. 과연 어떤 영적 상태를 본 것입니까.

 

이사야 시대의 유다 백성들도 주께 돌아와 회개했습니다. 히스기야, 요시야 왕은 철저한 개혁을 했습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의 유다백성들과 예수님 시대 바리새인들도 자신을 돌아보고 조상들과 같은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했죠. 그런데 그들은 모두 심판받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마음으로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난 증거는 제사를 성의 없이 드리거나 희생 제물을 눈먼 것으로 드려서가 아닙니다. 바로 ‘이웃에 대한 사랑 없음’이었습니다.

 

예배나 기타 영적이고, 종교적인 행위에 몰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정의와 공의로 백성들을 돌봤어야 합니다.  

 

그들이 영적으로 회개했다면 그 뒤엔 반드시 육적인 삶을 돌아봤어야 합니다. 영과 육은 분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전을 청소했다면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과 생명이 이웃들에게 흘러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영적이고 종교적인 행위에 매달렸고, 몸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게을렀습니다.

 

그 대형교회 목사님이 본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어차피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앞에서 지독하게 썩는 냄새를 풍기는 죄인입니다.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 걸레, 쓰다 버린 생리대와 같습니다. 굳이 노숙자를 보고 교훈을 얻을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진짜 봐야할 것은 노숙자를 바라보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돼지우리에서 막 나온 탕자의 썩는 냄새를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내 아들아, 하면서 품에 안으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읽었어야 했습니다.

 

노숙자를 보면서 어설프게 반성을 하거나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고 이 땅의 모든 노숙자들의 거처를 하늘에 마련하시는 그리스도를 보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예배를 갈구하면서도 우리 육신의 삶이 썩어가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우리의 행위로 심판하시겠다는 것은 우리의 육신적 삶을 달아보시겠다는 것 아닙니까?

 

성육신 하신 예수가 없는 그리스도는 어쩌면 환상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기독교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종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토록 메시아 그리스도를 기다렸지만 몸으로 오신 예수는 죽이고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김영수 목사는 고개를 떨구었다. 오, 주여. 이제 제가 주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 알겠습니다. 왜 우리 목회자들이 한국교회 타락의 주범인지 알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설교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겠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주여, 주여 하면서 주를 찬양하고, 주께 예배하며, 헌금을 바치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었습니까. 전도도 하고, 귀신도 내쫓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를 도저히 모른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작은 자에게 물을 주지 않았습니다.

 

김영수 목사는 무릎을 꿇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은 단 한 가지만을 부탁하셨다. 그러나 우리 목회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죽겠다고 서원했으나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는 거룩하고 영적인 그리스도만을 숭배할 뿐, 작고 낮은 자와 함께 하시는 육신으로 오신 예수는 원하지 않는다. 오,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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