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연재] 진짜 교회 (17)
본문 바로가기
창작글(시, 짧은 소설)

[장편소설 연재] 진짜 교회 (17)

by 브린니 2020. 8. 17.

진짜 교회 17

 

 

 

 

11 거듭난 그리스도의 신부―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은?

 

 

두 사람은 생각에 잠겨서 한참동안 조용히 앉아 있었다. 다시 느헤미야 형제가 입을 열었다.

 

“그리스도가 거룩하시기에 우리도 거룩합니다. 그리스도가 온 우주의 주인이시기에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가 왕이시기에 신부인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에 참여할 것입니다. 새 창조에 참여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받을 수도 없고, 회개할 수도 없고, 성화를 이룰 수도 없습니다.

 

구약은 철저히 율법과 계약을 지킨다는 조건 아래서만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조건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이를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를 무시하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실 신묘막측한 길을 여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이 인간을 대신해서 심판의 형벌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죄과를 도말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더욱 영광 받으시고, 인간은 구원받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성육신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교리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나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잊고 여전히 벌을 내리시는 무서운 하나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각종 종교행위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을 이웃과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주신 새 생명을 이웃과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신랑 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거룩한 결혼 생활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사는 것입니까?”

김영수 목사가 답답한 마음을 토해내듯 물었다.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우리는 그리스도께 우리를 온전히 맡겨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옛 친정인 이방의 풍속을 뿌리째 뽑아주시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세상 풍속을 다 정리하고 시집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그분이 우리 속에서 옛 친정을 몰아내십니다. 물론 내가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을 가로막고 나서지 않는 한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아직도 이방 풍속을 교회 안에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삶의 패턴은 여전히 세상 것입니다. 죄에 빠질 때만 하나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용서를 받은 후에는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 죄를 짓습니다. 다시 교회에 나와 회개합니다.

 

하나님과 내가 떨어져 있는 존재일 때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외쳐도 내가 나로 존재하고,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존재하는 이상, 그분과 내가 두 개의 존재로 존재하는 한 나는 죄와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부의 삶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주님은 내 안에, 나는 주님 안에 있는 삶이어야 합니다. 따로 떨어져 존재하면서 아무리 하나님과 교제하려고 해도 우리는 늘 패배합니다.

 

에덴에서 하나님과 그토록 가까이 지냈던 아담도 죄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속에 계시고, 내가 그리스도 속에 있어서 둘이 온전히 하나가 될 때 우리는 거룩할 수 있습니다."

 

"형제님, 내가 아직 나로 존재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들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이지요."

"목사님, 바로 그것입니다. 주께 맡긴다는 것은 주께서 친히 모든 것을 다 하시도록 나를 주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설교하고 가르칩니다. 그런데도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이 잘 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주와 연합하는 것은 내가 죽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속에 사시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내가 죽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있기에 현실적으로 죽게 되면 이 땅에 살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듭난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내가 죽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이론적으로는 내가 죽고 예수 그리스도가 산다, 고 받아들이고 그걸 믿지만 도대체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에 대해선 잘 설명을 하지 못합니다.”

 

“네, 저도 그렇게 믿고 설교하고 가르치지만 도대체 그것이 어떻게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것인지 경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어쩌다 은혜를 세게 받으면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가 하는 일 모든 것이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주께서 하는 것같이 보입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많이 있습니다. 주의 일을 힘들게 할지라도 결코 힘들지 않고 모든 것을 주께서 다 담당하는 것 같은, 정말 은혜가 충만한 시기가 있었지요. 하지만 곧 죄악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형제님, 우리는 다 그렇습니다. 도대체 어떤 것이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것일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인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격이 죄로 인해 타락했지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없어져서 텅 빈 존재가 된 것은 아닙니다. 형상이 훼손된 것이지요. 예를 들면 우리가 새옷을 입었는데 커피를 쏟아서 얼룩이 졌다고 해봅시다. 빨아도 그 얼룩이 지지 않습니다. 자, 그럼 그 옷은 새옷입니까? 얼룩이 져서 입기 곤란한 옷이 된 것일까요?”

 

“당연히 입기 어려운 얼룩진 옷에 불과한 것이겠죠.”

“그렇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멋진 창조물이었으나 죄로 얼룩진, 타락한 존재로 굴러 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계속해서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타락한 존재로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한 채 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바로 이것을 원래의 상태로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아무리 죄의 얼룩이 져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이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의롭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도 하나님 형상을 갖고 있듯이 반대로 우리가 죄로 타락하게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모두 구원받아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다시 죄에 빠지지 않습니까?”

“네, 당연하지요. 우리의 육신은 여전히 타락한 상태니까요. 문제는 우리가 타락해도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한 상태로 지니고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난 뒤에도 여전히 타락한 육신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완전히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고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에덴에 살았던 아담도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최초의 인간도 죄를 지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성화되어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까?”

“성화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은 모두 의롭고, 거룩합니다. 이제 우리는 죄에서 해방된 존재, 죄와 무관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개별적인 죄를 지을 수 있지만 죄의 노예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달라진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노예였지만 목욕한 뒤(예수를 만난 뒤)부터는 발만 씻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야기해봅시다. 예수 믿고 은혜를 받으면 내가 죽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속에서 역사하신다고 느낍니다.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몇 달, 몇 년 지나면 내가 살아서 득세하고 그리스도는 어디론가 사라진 듯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 속에 여전히 살아계십니다. 그런데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은혜 받으면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고, 은혜 떨어지면 죄의 종으로 사니 이것이 무슨 조화입니까?”

“어떤 목사님들은 인간은 죄(마귀)의 종, 아니면 그리스도의 종이 된다고 합니다. 중간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 틀린 것이 아니지만 전부는 아닙니다. 경건하다고 소문난 목사님들도 죄악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럼 갑자기 죄의 종이 된 것입니까?”

 

“그것 참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군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신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신이란 말입니까? 아타나시우스는 성도들은 하나님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데이피케이션Deification, 신화神化, 이런 말을 과감하게 했는데 과연 그 신학자는 어떤 근거에서 이렇게 말한 것일까요?”

 

“글쎄요.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거듭나면 그렇게 되는 것 아닐까요?”

“네, 그렇다면 진정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솔직히 예수 믿고 거듭난다는 것을 이해하기란 어렵습니다. 예수 믿고 난 뒤 삶이 달라진 성도들을 보면 그저 저 분은 정말 거듭났구나 할 뿐이지요.”

“그렇지요. 거듭났다는 걸 이해하거나 증명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죄로 타락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 거듭나는데 이것은 죄로 타락한 내가 죽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해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하면 거듭나는 것일까요?

 

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지만 온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의 인격을 뜻하며 우리 역시 인격을 가지고 있지만 훼손된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훼손된 인격을 온전하게 하십니다. 즉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는 신비에 가깝습니다.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설명이 안 됩니다. 다만 결과로서 증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의지와 이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아담은 자유의지와 이성의 시험에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선악과를 먹기 전에 이성을 발휘해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고민했어야 합니다. 하와의 유혹이 달콤했더라도 자유의지를 발휘해 유혹을 이겼어야 합니다.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은 둘째 아담(성육신하신 사람)으로 오셔서 모든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덧입고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육신이 죽는 것은 아닙니다. 죄로 타락한 인격이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그런 것이지요. 내가 죽는다고 해서 내가 없어지는 것도, 현실적으로 죽는 것도 아닙니다. 인격이 변화하는 것입니다. 인격이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화神化, 데이피케이션Deificatio입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과정이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20).

 

이 말씀은 전도 대상자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인격을 주장하실 수 있도록 내가 문을 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자유의지로 문을 연다는 뜻입니다. 내가 죽었는데 어떻게 문을 열 수 있습니까? 내가 죽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죽었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로 타락한 인격이 죽고, 새 인격으로 거듭난 내가 문을 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온전히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 되어 나를 주장할 수 있도록 나를 내어드린다는 뜻입니다.

 

내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은 예수님 마음대로 나를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나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주장하신다는 뜻입니다. 내가 나의 자유의지와 이성을 발휘해서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도록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나의 이성과 자유의지를 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변화되어 나의 이성과 자유의지를 온전히 발휘할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첫째 아담은 자유의지와 이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유혹에 굴복해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거듭난 성도는 이제 자유의지와 이성을 맘껏 발휘해서 죄와 세상을 이기고 선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죽고 예수 그리스도로 살기에 그리스도의 고난에도 참예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순교할 수도 있고, 이웃을 돕는 일에도 쉽게 나설 수 있습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산다는 것은 내가 진정한 나 자신의 주체가 된다는 뜻입니다.

 

죄로 타락한 나는 아무리 선한 일을 해도 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

 

그러나 바울은 곧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1-2)”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하고 말합니다.

 

죽을 몸 즉 죄로 타락한 인격도 살리신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그냥 죽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변화되어 내가 주체로서 온전히 산다는 것입니다.

 

내가 죄의 종으로 살 때는 내가 나라는 존재의 주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나를 살리신 후에는 나는 나의 주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란 뜻은 하나님 마음대로 우리를 지배하고 부릴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처럼 자유의지와 이성을 가지고 스스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하나님은 아담이 죄를 지으려고 했을 때 하나님 뜻대로 죄를 짓지 못하도록 막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이 자유의지와 이성을 갖고 선택하고 결정하도록 기다리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 되시면 그분 뜻대로 모든 게 이루어지고 나는 아바타가 되어 그대로 따라 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나의 인격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켜서 내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해서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신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부에게는 이런 기적과 같은 일이 일상처럼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처럼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화神化이며 데이피케이션Deification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거룩하게 살 수 있는가, 죽기까지 아주 천천히 성화될 뿐이다, 예수님처럼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연약하다, 기타 등등 많은 말들이 있습니다. 그 말이 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전부가 아니며 온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착한 일을 시작하신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선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보다 더 큰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다 하시고 우리가 구경하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하라는 대로 아바타나 종처럼 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영에 힘입어,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나 스스로, 주체로서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처음으로 하신 말씀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 주는 것을 허락하라는 것이었니다. 예수님은 강제로 우리를 어떻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할 수 있게 지혜와 능력을 은혜의 선물로 주시는 분입니다.

 

모든 것은 우리가 행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우리 죄에 대하여 책임질 이유가 없습니다. 죄는 우리 책임이고, 선한 일은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죄를 짓는 것도 선한 일을 하는 것도 다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것은 내 속에 있는 죄가 하는 것이며 선한 일은 내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 이끄시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내가 하는 것이지 다른 누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거듭난 성도가 죄를 짓는다면 어째서 일까요? 그것이 바로 내 속의 죄가 내가 원하는 바 선한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입니다. 죄도 인격이다, 하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우리가 성화되는 과정에서도 죄의 유혹은 뒤따라 옵니다.  원수가 우는 사자와 같이 성도들을 넘어뜨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험에서 이겨야 합니다.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죄를 이기도록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비추심을 받은 우리는 결코 변명해서는 안 됩니다. 죄와 사망을 이기신 주님께서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데 우리가 죄를 짓는다면 전적으로 우리가 책임져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을 허락하지 않고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 존재의 주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책망하신 것도 그들이 하나님을 잘 안다고 큰소리 차면서도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에게도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천로역정을 보십시오. 거듭난 성도라고 해서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격을 지닌 우리는 더 이상 죄와 타협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아닐까요. 

 

성화란 죄가 나를 더 이상 주장하지 못하고 내가 주체적으로 점점 더 선한 일을 행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점점 더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신앙이 젖먹이에서 딱딱한 식물을 먹는 어른으로 자라난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성화란 그리스도의 인격이 내 속에서 자라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점점 더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내 속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 내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거듭난 내 속에서 점점 더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