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연재] 진짜 교회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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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

[장편소설 연재] 진짜 교회 (18)

by 브린니 2020. 8. 20.

진짜 교회 18

 

 

 

“개인적인 거룩도 중요하지만 교회 전체가 한 마음으로 거룩을 추구해야 합니다.”

느헤미야 형제가 말했다.

 

“어떤 방식으로 교회가 한 마음 한 뜻으로 거룩할 수 추구할 수 있을까요?”

김영수 목사가 참담한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 교회는 큰 문제를 일으킨 교회와 타락한 목사 몇 사람만 정죄할 뿐, 정작 일반 교회들은 거룩한데 몇몇 문제 있는 교회와 목사 때문에 교회 전체가 비판을 받고 있다고 자기방어에 열중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죄를 짓지 않아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선을 알면서도 행하하지 않을 때 훼손되는 것입니다."

 

"형제의 말을 듣다 보면 우리 교회의 문제는 드러난 죄가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뭔가 숨겨져 있는 거대한 모순덩어리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늘 구조가 문제입니다. 성도 개인이 아무리 거룩하게 살아도 교회 구조 자체가 왜곡되어 있으면 교회는 썩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13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유교적입니다.

 

우리는 속은 어떻든 겉만 좋으면 다 좋다는, 유교방식으로 교회를 운영합니다. 점잖고 경건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조상에게 제사 드리듯 정성껏 올립니다. 예의를 중시합니다. 연공서열을 따집니다. 공로사상에 물들어 있습니다. 어른을 잘 모셔야 합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서열이 확실합니다.

 

교회에서조차 신분과 계급이 존재합니다. 신분이 상승하기 위해서는 돈과 정성을 드려야 합니다. 십일조와 건축 헌금 등을 많이 내는 것은 기본이고, 주차장이나 식당에서 봉사해야 하고, 화장실 청소도 해야 하고, 성경공부와 기도에 능해야 합니다. 공을 닦으면 그 사람은 집사, 권사, 장로가 됩니다. 목사를 왕처럼 떠받들거나 스승으로 모시며 그림자도 밟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입니다.

 

목사를 지나치게 거룩하게 보기 때문에 목회자는 자신을 과장하고, 스스로 위선자가 되고 맙니다. 목회자는 경건한 양반 행세를 해야 하기 때문에 겉 다르고 속 다른 자기 모습에 자기 스스로 속습니다. 목사는 교회 대표니까 매사에 모범이 될 것을 요구받습니다.

 

유교는 겉으로 보이는 외양만 경건하고, 모범적이면 되기 때문에 그가 진정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가는 알 수도 없고, 따지지도 않습니다. 반대로 목사는 항상 경건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기 때문에 오히려 죄에 대해 취약합니다. 목회 스트레스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만족시킬 만한 것을 찾습니다. 골프나 볼링, 영화감상이나 여행 등 레저거리를 찾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경건의 모양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죄는 더 깊어 갈 뿐입니다.

 

목회자도 그냥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보고 목사라는 직분을 맡은 자라고 여긴다면 지나치게 우상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경건하고 거룩한 자의 표상이 되다보니 목사 스스로 그런 가면을 쓴 자신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술 담배를 하거나 눈에 드러나는 죄를 짓지 않지만 은밀한 죄, 예를 들어 성적인 죄에 빠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스트레스를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혼자 몰래 숨어서 은밀한 죄를 지음으로써 스스로 의롭지 않는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두 개의 자아, 자아의 양면성을 인정하면서 스스로 위로받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죄 가운데 75%가 성적인 죄라고 합니다. 성적인 죄는 거룩함과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인데 첫째로 곧 음란을 버리라고 말씀합니다(살전 4:3). 목회자들의 성적인 타락은 과도한 거룩함이라는 가면 뒤에 숨은 우리 교회가 처한 현실입니다. 현실이 이런데도 목사가 비리로 쫓겨나면 교회가 창피를 당할 수도 있기에 쉬쉬하면서 죄를 덮습니다. 친목사파가 나서서 사고를 수습합니다. 하지만 죄가 덮어질수록 교회는 썩고 맙니다.

 

교회에서도 당파 싸움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끼리끼리 교제하고, 서로 밀어주고 당겨줍니다. 집사님, 정말 영적으로 깊어 보이십니다, 하면서 칭찬하다가는 금방 돌아서서 질시하고, 서로 깎아내립니다. 입에 발린 칭찬과 뒷담화가 난무합니다.

 

교회 안에서 명예와 권력 놀이가 얼마나 심각합니까. 성경지식을 자랑하고, 기도와 은사를 내세우고, 오래 신앙생활 했다는 역사를 내세우고, 몇 대째 신앙을 이어온 집안을 자랑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아들이 명문대 갔거나, 대기업에 취업한 것을 자랑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 자랑거리를 내세워 차지한 직분과 위치를 남용합니다. 계급과 서열로 목사부터 말단 주일학교 유치부 아이까지 모두 일렬로 죽 늘어서 있습니다. 이런 교회에서 성도의 교제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결코 이웃 사랑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오직 겸손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자신이 그리스도처럼 교회의 머리라고 생각하고, 교인들과 자신을 분리합니다. 성도들도 우린 평신도니까 하면서 목회전문가들과 자신을 분리합니다. 교인들이 목회자와 자신들을 분리하는 이유는 그래야 죄를 다루는 기준에서 좀 더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죄를 지으면 안 되지만 자신들은 적당히 세상과 타협해도 된다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목사가 교인과 자신을 분리하는 이유는 마치 왕이 신하들과 정치 싸움을 하는 것을 피곤하게 여기듯 자신의 목회와 교회 운영에 교인들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을 원천봉쇄하려는 속셈 때문입니다. 이런 교회에서는 결코 성도간의 교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유교 사회에서는 진정한 교제란 결코 불가능합니다. 앞에서는 칭찬을 늘어놓고 돌아서면 등에 칼을 꼽습니다. 모든 것이 정치적입니다. 자신의 입신양명이 가장 중요하기에 다른 사람을 돌봐야 한다는 개념은 아예 없습니다. 정치적인 이익에 따라 패거리를 짓습니다. 서로 추켜세우며 서로 영광을 취합니다.

 

우리 교회는 진리에 유교적 습성을 혼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것은 거저 주어진 것인데 이에 대해 보답하려고 애를 씁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다시 갚을 수 없는 선물입니다. 은혜란 갚을 수 없을 때만 은혜입니다. 우리는 유교적 풍습에 따라 은혜를 갚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보답하려고 열심히 예배하고 성경 읽고, 기도하고 찬양합니다. 이것은 모두 종교적인 행위일 뿐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믿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을 이웃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은혜에 보답하려고 애쓰는 동시에 더 큰 은혜를 입기를 애쓰고 있습니다. 즉 복 받기 위해 혈안입니다. 그래서 더욱 더 종교적인 행위에 몰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애쓰고, 더 큰 복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교제가 없고, 이웃 사랑이 불가능한 교회 안에서는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숨 쉴 수 없습니다. 그 교회가 아무리 하나님을 잘 섬기기를 갈망하면서 거룩한 예배와 화려한 성가대와 첨단시설로 무장한 성전을 자랑하더라도 말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거룩으로 가는 첫걸음입니다.”

 

“형제의 말 중에 정말 와 닿은 말이 있군요. 겸손해야 사랑할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김영수 목사가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겸손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 중 첫 번째입니다. 그분의 탄생이 겸손 그 자체이니까요.”

“그렇습니다. 만왕의 왕께서 마굿간 구유에서 나셨죠.”

 

“예수님이 겸손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제자들과 먹고 마시며 어울릴 수 있었겠습니까? 세리와 창기의 친구이자 포도주를 좋아하는 자라는 별명도 붙었지요. 모두 그분이 겸손하시기에 세상 누구와도 어울리며 사랑을 나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으로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신 것도 가장 낮은 자리에서 말씀하신 것이고요.”

 

“서로 사랑하는 것이 거룩으로 가는 길이라는 말도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거룩이 무슨 아주 영적인 어떤 상태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거룩을 이루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거룩에 도달하기 위해선 성경지식이나 헌금이나 봉사나 기타 어떤 것으로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까 생각하게 되지만 딱히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이므로 우리가 신이 되지 않고서는 도달할 없는 경지이겠지요. 다만 주께서 우리에게 그 길을 알리신 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적인 탁월성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서로 사랑하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하나님의 속성이 우리를 통해 세상에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겸손이므로 그리스도의 향기 역시 세상을 물들입니다. 사랑과 거룩을 따로 떼어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형제의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라에서 이웃을 사랑하라로 방향전환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지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 수 없습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을 사랑한 1등 인물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굳이 찾으라면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하나님의 친구인 아브라함, 평생 성전을 사모한다고 노래한 다윗, 정도가 아닐까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하자, 하나님을 연인으로 사랑하자, 이런 주장들이 있지만 사실 성경적 모델조차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가 첫째 계명이지만 사실 우리는 그 사랑에 실패한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신 것 아닙니까? 하나님 사랑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 아닐까요?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해도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제외하고 눈에 보이는 하나님 사랑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는 내면적입니다. 로렌스 형제의 하나님의 임재 연습에서 보듯이 늘 하나님과 내면적인 대화를 나누고, 삶의 행동의 순간마다 하나님을 찾는 것 등이겠지요. 모든 것이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면적인 것이 나쁘거나 열등한 것이 아니라, 매우 개인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도들이 공동체로서 할 수는 것은 이웃 사랑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그 속에 이미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겸손 등 모든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 있습니다. 내면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던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랑을 이웃과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김영수 목사는 생각했다. 교회의 목적은 더 이상 교회 성장이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는 것, 우리에게 부탁하신 것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영적인 행사들에 목을 매고, 이웃의 아픔을 돌보지 않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사신 삶과 다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리스도가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해야 한다.

 

r김영수 목사는 그리스도가 원하는 목회를 할 수 있는 시간이 겨우 3년밖에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가 못다 걸어간 그리스도의 꿈은 아들인 김이레 목사가 이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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