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연재] 진짜 교회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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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

[장편소설 연재] 진짜 교회 (20)

by 브린니 2020. 8. 22.

진짜 교회 20

 

 

 

12. 2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목회자들이 본연의 임무가 과연 무엇일까요?”

느헤미야 형제가 물었다.

 

“설교하고, 심방하고, 상담하고, 교회의 여러 가지 일들을 돌보고, 노회나 총회일도 하고, 사회봉사도 하고요.”

“정말 본질적인 것 말입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하셨죠. 우리는 목회자들은 그 일에 충실하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네, 그런데 성도들은 생명의 양식을 먹고 배부르나요? 성도들이 건강한 양으로  길러지고 있나요? 잘 자란 양들이 고기와 털을 내듯이 성도들이 열매를 맺고 있나요?”

 

“거기에 대해선 저도 할 말이 없군요. 강단에 말씀이 없고, 성도들은 영적으로 굶주리고, 말씀에 목말라 하고 있다고들 아우성입니다. 왜 이렇게 된 것인지.”

“목회자들이 우리의 구원과 부활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고 다른 것을 전하니까요. 한쪽에선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 먹고 잘 사는 길을 가르칩니다. 다른 한쪽에선 교회에 충성하고 헌신하면 만사형통한다고 가르치고요. 알고보면 양쪽 모두 똑같이 잘 먹고 잘 사는 걸 가르치죠.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못 사는 사람이 별로 없죠.”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 교회가 중산층 교회로 변한 지 꽤 되었습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가난한 사람은 절대 교회 못 나오기 때문입니다. 일단 십일조를 내야 하니 그걸 낼 정도로 먹고 살 만해야 합니다. 십일조를 내자니 살림이 쪼들리고, 헌금을 안 하자니 부끄럽고, 그래서 아예 교회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은 앞으로도 절대 교회 못 옵니다.”

 

“그렇다고 십일조를 내지 말라고 해야 합니까?”

“아뇨. 더 내라고 해야죠.”

 

“네?”

“교회에서 십일조를 가난한 자를 위해 쓰면 됩니다. 그걸 모아 교회 운영하고, 교회 건물을 크게 짓고, 목회 전문가들을 배불리지 말자는 말입니다.”

 

“원래 십일조는 제사장들을 위해 주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네, 압니다. 하지만 3년에 1년은 가난한 자를 위해 써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뒤로 제사와 관련된 율법은 거의 폐지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사실 제사장의 역할도 끝났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의 몫이지 신학을 전공한 직업 목사의 것이 아닙니다. 제사 관련 율법들은 거의 다 없어졌는데 십일조는 살아남았습니다.  살아남았다면 그 존재 가치를 해야겠죠. 이제 십일조와 헌금은 가난한 자를 위해 베풀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그럼 형제는 정말 목회자의 본연의 임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 시대에 소위 목회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라고 하셨나요?”

 

“글쎄요. 그들을 비판하셨지만 그들에게 분부하신 말씀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오로지 율법을 숭배하는 그들에게 율법을 가르치셨죠. 최고의 율법, 율법의 완성을 말입니다.”

 

“아,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죠.”

“네. 율법사들이 찾아왔을 때마다 최고의 계명을 가르치셨고, 그렇게 살라고 하셨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목회자들의 본연의 임무라는 말씀이십니까?”

“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누리며 그 생명을 나누는 일이니까요.”

 

“그럼 지금 우리 목회자들의 사역은 이웃을 사랑하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누리고, 나누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인가요?”

“자, 부자 청년이 찾아와 영생을 물었을 때 주님이 뭐라고 답했습니까?”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를 도우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가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하니 재산을 팔아 이웃과 나누라고 하신 것이지요.”

“율법을 잘 알고, 잘 지키는 부자청년은 율법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께 와서 영생을 얻는 법을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를 도우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미 본연의 의무를 다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겐 무엇보다 중요한 게 율법을 지키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정작 그의 본연의 임무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임을 깨우쳐주셨습니다. 예배를 집례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심방하고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라고 여기는 목회자들에게 예수님은 그것보다 먼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형제님, 부자 청년이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하니 이제 마지막 한 가지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를 도우라고 한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옵션이다? 율법은 완전한데 거기다 선행을 얹어서 프리미엄을 얻으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나요?

 

그래서 지금 교회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최고이며, 가장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치 옵션으로 생각합니다. 천만에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부자청년이 영생을 얻을 수 없음을 보시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왜 여기서 울법과 영생과 이웃 사랑이 한 줄에 꿰어서 나온 것일까요? 영생은 율법과는 상관이 없고, 오히려 이웃 사랑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대조해서 보여주신 것은 아닐까요?

 

지금까지 목사님께서 본연의 임무라고 여기며 애쓰고 있는 것이 부자청년이 다 지킨 율법 아닐까요? 그런데 부자청년이 지킨 율법에 아무런 생명이 없었던 것처럼 지금 우리의 예배와 헌신과 봉사와 충성이 그저 헛된 종교행위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실 우리 교회들은 이웃 사랑이 그저 옵션이지 않습니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오히려 본연의 것이고, 애써 지킨 율법은 헛것이다?”

“헛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지켜야 할 것이지요. 그런데 그것으로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마치 형제의 말은 ‘선행을 해야 구원받는다’로 들리는데요.”

“지금 목회자나 교회가 요구하는 것도 그렇지 않나요?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다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라, 교회에 헌신 봉사 충성하라, 그것이 믿는 자의 의무다. 예수님께 은혜 많이 받았으니 이제 교회에 잘 나오면서 십일조와 헌금 잘 하고, 봉사도 해라, 이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만약 선행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면 목회자들은 교회에 헌신하는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진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생을 위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요구하신 단 한 가지는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서로 사랑한다면 교회는 결코 이런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김이레 목사는 어떻게든 느헤미야 형제의 말을 방어하고 싶었다.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서 교회의 전통에 입각해서 생각하고 말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느헤미야 형제의 말이 귀를 뚫고 들어와 마음을 헤집어 놓은 듯했다. 그가 지금까지 알고 실천해왔던, 본질이라고 여겨왔던 것에 태클을 걸고 있었다.

 

“예수님은 돈 문제를 많이 다루셨습니다. 삭개오가 회심하고, 재산의 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남의 것을 가로챈 적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했을 때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삭개오가 예수를 만났을 때 이미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가 예수를 영접했을 때 이미 구원받은 것 아닙니까?”

느헤미야 형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예수를 만나면 변화가 일어나고, 그 증거가 나타날 때 그 사람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확증할 수 있으니까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영생을 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구원을 받아들이고, 그에 반응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가 영생을 얻은 자가 되는 것이죠. 부자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갔지만 삭개오는 제대로 반응했습니다. 자, 지금 저와 목사님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저도 재산을 내놓아야 합니까?”

“그거야 목사님 뜻대로 하십시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형제의 말은 알 듯 하면서도 모르겠습니다. 구체적인 대안은 뭡니다. 뭘 어쩌자는 겁니까?”

“정말 본연의 문제를 잘 모르는 분들이 대안부터 찾지요. 그래서 뭘 어쩌자는 것이냐.”

 

“정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똑바로 돌이킬 수 있는 것입니까?”

“간단합니다. 모든 것을 이웃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중심입니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죠.”

“이웃 사랑이 하나님에게 가장 최고로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다고 영적인 태도를 견지한 분들은 개인적인 신앙에서 우월할지 몰라도 이웃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어떤 영적인 경지에 오른 것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이웃사랑을 하자는 것입니까?”

“모든 것을 이웃 사랑을 위한 것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가장 먼저 나의 삶을 이웃을 돕는 삶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목사님의 목회는 모두 성도들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교회는 성도들을 영적으로 육적으로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해야 합니다.”

 

“교회가 성도를 위한 복지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데요.”

“조직으로서의 교회가 성도들을 돕는 게 아니라 교회가 그 자체로 성도들의 모임, 성도들의 연합으로서 서로 서로 도와야 합니다. 그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갈수록 더 이론적인 말씀만 되풀이하신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자, 보십시오. 부자청년에게 왜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까?”

 

“사실 그 말씀도 나를 따르라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예수를 따르기 전에, 아니 동시동작 상태로 우리는 우리가 예수 대신 더 사랑하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부자청년은 재물이 우상이었습니다. 그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예수를 따라야 했습니다.”

 

“그렇지요. 베드로는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고, 바울도 이전의 모든 유익한 것들을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했으니까요.”

“예수님에겐 제자들이 이미 많았습니다. 굳이 부자청년까지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진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라는 걸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를 따르는 길입니다. 목사님은 무엇을 버리시겠습니까?”

 

“글쎄요. 내 이름으로 된 아파트와 자동차, 집에 있는 패물과 통장의 돈, 이런 걸 다 내놓을까요?”

“아닙니다. 목사님에겐 교회와 사역이 우상이니까 그걸 내놓으시지요.”

 

“네, 저더러 사직하라는 말씀입니까?”

“그것이야 말로 그저 하나의 방법일 뿐이죠. 제 말씀은 목사님의 전부랄 수 있는 교회와 사역을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내놓으시란 말씀입니다.”

 

“도무지 무슨 말씀인지. 목사가 교회와 사역이 전부이고, 그것이야말로 예수를 섬기는 것인데 그것을 버리고 어떻게 예수를 따른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베드로더러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의 제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말과 같지 않습니까?”

 

“네.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렸습니다. 목사님, 진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목사라는 타이틀과 교회, 목회사역 전부를 예수님께 돌려드리세요. 베드로가 버려야 할 것은 남을 죽일 수 있는 칼만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의 오른팔이라는 자부심을 버려야 하고,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상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본 황홀한 영적 체험을 버려야 합니다. 또 자신이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는 자부심도 버려야 합니다.

 

목사는 강단권을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설교하면서 성도들을 얼마나 정죄했습니까. 그것은 칼입니다. 내가 주의 종이라는 자부심도 타이틀도 다 버려야 합니다. 진짜 이웃을 사랑한다면 강단권도 나누시고, 지금 목사로서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나누십시오. 

 

지금 목사님께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돈이 아닙니다. 나눌 수 있는데 나누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목사님이 성령의 사람이라면 성령을 나누십시오. 성도들이 목사님을 두고 신령한 목사라고 한다면 존경만 받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 신령함을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십시오. 독차지 하지 마십시오. 목사님이 알고 있는 체험한 그리스도를 다 나누어주십시오. 그래야 교회가 풍성해집니다.”

 

“설교와 기타 여러 형태로 그것을 나누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과연 그럴까요? 그런데 왜 우리 교회에는 성령의 나타나심이 없을까요?”

 

“70년대 80년에는 한참 부흥기라 성령의 은사들이 많이 나타났지만 지금은 안정기로 접어든 지 한참 지나서 그런 은사들은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7가지 열매는 어떻습니까? 첫째가 사랑인데 사랑이 나타나고 있나요? 우리 교회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 사랑 아닙니까?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성경말씀은 그저 액세서리인가요?  부자청년에게 이웃 사랑을 요구하셨고, 삭개오에게 이웃 사랑이 나타났을 때 주님은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이십니다. 그의 몸된 교회에 더 이상 사랑이 없는데 그것이 교회입니까? 교회에 이웃사랑 없다면 그 어떤 영적인 행위들도 다 헛된 것입니다. 부자청년이 율법을 다 지킨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이 다른 곳이 아닌 교회에서 받는 상처가 정말 큽니다. 사랑은 없고, 상처만 주는 교회가 교회입니까. 목사님, 정말 그것이 그리스도가 맡기신 양떼들을 건강하게 먹이고, 살리는 것입니까.”

 

느헤미야 형제는 잠시 쉬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구원받은 뒤에는 반드시 변화가 뒤따라 옵니다. 예수 믿고 난 뒤부터 성경 열심히 읽고, 크게 찬양하고, 뜨겁게 기도하는 것을 두고 우리는 변화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는 모습은 그렇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지만 삶이 달라지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교회도 그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성화의 과정은 인생 전체를 통하여 서서히 일어난다, 갑자기 변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시간이 걸린다, 이런 식의 교리를 내세워 거룩한 행실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화는 삶의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일어나야 합니다. 첫째 내 것을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애초에 내 것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피값으로 사셨으니까요. 그래서 구원을 얻고 영생을 누리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 연합한 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내 속에 계시니까 나는 그리스도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데 그리스도와 같이 살지 않는다? 이것은 모순입니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이 우리를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인데 그리스도처럼 살지 않으니까요.

 

우리는 스스로 기독교를 믿는 교인이 된 것입니다.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인 것이죠.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살 때 우리는 제자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제자로 하여금 그도 우리와 똑같이 그리스도로 살게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것이 우리가 열방으로 제자를 삼아 그리스도가 분부하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전도 선교에 열을 올리지만 제자를 얻는 일에는 실패했습니다. 결국 우리와 같이 교회에는 나오지만 삶은 조금도 변화되지 않는 교인만 양산할 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가 아닌데 어떻게 우리에게 제자가 생기겠습니까. 그리스도로 산다는 게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형제의 발을 씻어주고, 그를 섬기는 것입니다.”

 

“형제님, 말을 쉽지만 형제도 그렇게 사십니까? 저도 따져보면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 말고 그렇게 살지 않는데요.”

“행위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목사님, 정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라고 여기십니까?”

 

“네. 그거야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정말요? 저는 그런 생각을 하시는 목사님을 만나본 기억이 없는데요. 그런 설교를 들은 적도 거의 없고요.”

 

“다들 그렇게 생각은 하죠. 말을 안 하지만.”

“네? 예수를 진짜 믿게 되면 예수타령만 하지 않나요? 정말 이웃 사랑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걸 설교하지 않을까요? 저는 이웃 사랑보다 하나님 사랑이 먼저라는 말은 수없이 들었지만 이웃 사랑이 우리가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라는 말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이웃 사랑을 강조하면 인본적인 사랑은 필요 없다는 식의 영적인 강요만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당연히 이웃을 사랑한다, 그러나 이웃 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은 아니다, 이런 말을 정말 많이 들었습니다.”

 

“그건 맞는 말이지요. 이웃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오는 자연스런 결과니까요.”

“네. 이웃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통해 이웃에게로 흘러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목사님의 말씀과 제 말이 같은 것 같으면서도 뭔가 다르지 않습니까?”

 

“네? 말은 달라도 같은 뜻 아닙니까?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에서 나오니까요.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주께 하듯 하는 것 아닙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제가 드리는 말씀은 사랑이란 본질적으로 하나님에게서 우리에게 와서 그대로 이웃에게로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로 이웃에게로 가는 게 맞지요.”

“그저 물 빠지는 통로 같은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화살표가 한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교회에서 가르친 것은 내가 하나님도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하는데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사랑이다, 이런 식이었다는 말입니다.”

 

김이레 목사는 순간 멈칫 했다. 뭐가 다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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