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연재] 진짜 교회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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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

[장편소설 연재] 진짜 교회 (21)

by 브린니 2020. 8. 22.

진짜 교회 21

 

 

12. 3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폭풍이 지나간 뒤 침묵이 흘렀다. 김이레 목사는 느헤미야 형제가 폭포수처럼 쏟아내는 말들을 소화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뭔가 할 말이 많은데 적절하게 대응하기 어려웠다. 수십년간 익혀온 신학과 목회 경험이 이렇게 쓸모없는 것일까.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른 뒤 김이레 목사가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형제가 맞받아쳤다.

 

“그 말이 그 말 아닙니까. 율법이 아니고, 행위도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바울이 성경에 기록했고, 루터도 이를 증명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우리의 믿음은 은혜를 받는 통로입니다.”

 

“그게 그 말이지 뭡니까?”

“좋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을 때 그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것이지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렇게 믿고 입술로 고백합니다. 그럼 다 믿는 것인가요? 그가 진짜로 믿는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요?”

 

“믿음을 꼭 증명해야 하나요? 그가 마음에 확신을 갖게 되면 그것은 구원 얻을 믿음을 소유한 것입니다.”

“네, 맞습니다. 그러나 만약 예수님이 재림하셨을 때 우리의 믿음을 보이라고 요구하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음을 열어 보여드릴 수도 없고.”

 

“정말 궤변이 끝도 없군요. 나도 모르겠소. 내 가슴을 찢고 믿음의 확신을 피로써 증명해야할지.”

“부자 청년에게는 네가 영생을 얻으려면 내 제자가 되라고 하시면서 먼저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그리하면 내가 너의 믿음을 인정하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에게는 주님이 무엇을 요구하실까요?”

 

김이레 목사는 할 말을 잃었다. 저런 식의 궤변으로 아버지를 홀린 것이 틀림없다. 내 믿음에는 문제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그 믿음을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총이나 칼로 위협해도 신앙이 변하지 않을 것이다.

 

“목사님은 총칼 앞에서도 결코 믿음을 부인하지 않으시겠죠?”

김이레 목사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이 느헤미야 형제가 물었다.

 

“당연합니다.”

“목사님보다 믿음이 더 좋은, 물 위로 걷기까지 한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는데 목사님이 부인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뭐라고요?”

“베드로가 주를 그리스도로 고백할 때 그는 성령의 사람이라고 인정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로막았을 때 사탄의 아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떤 베드로가 진짜 베드로입니까? 목사님의 믿음은 반드시 증명되어야 합니다. 자, 목사님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주로 믿는다는 증거를 대보십시오.”

 

“나는 그리스도께 헌신했고, 목회 15년 동안 충성으로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부인하기 직전까지 베드로는요? 목사님보다 더 충성스러운 일꾼이 아니었나요?”

 

“저도 저의 재산을 다 버리고 주님을 좇았습니다.”

“과연 그렇게 하셨나요?”

 

“재산이야 별로 없었지만 경영학 학위도 버렸고, 아무튼 다 버렸습니다. 예수를 위해서요.”

“네, 목사님의 충성과 믿음을 주님도 아십니다. 그러나 이미 버렸던 것 이상으로 다시 받으시지 않으셨나요?”

 

“네? 주의 일을 했을 때 우리는 영생을 얻을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백배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의 일을 하기 때문에 얻은 이땅의 것을 주님께서 다시 버리라고 말씀하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브라함에게 수많은 축복을 주셨고, 아들까지 주셨는데 하나님이 그 아들을 바치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김이레 목사는 할 말이 없었다. 아버지가 다 버리고 떠나시겠다고 한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나.

 

“목사님, 지금 우리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말씀, 그리고 나를 따르라, 라는 말씀의 진짜 의미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느헤미야 형제가 재촉하듯 물었다.

 

“예수님이 우리의 믿음을 최종적으로 다루어 보실 때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그 증거로 삼으신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으신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에서도 그렇습니다. 그 지상명령에서 예수님이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했을 때 뭘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신 걸까요?”

 

“예수님의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전도와 선교를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으로 여기고 목숨을 걸고 전도하고 선교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로 데리고 와 교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지금 다 어디로 갔습니까. 신자가 천만 명에 이르렀다고 샴페인을 터뜨렸는데 지금은 왜 반토막이 났나요?”

 

“그런데 그게 우리가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를 섬기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시대에 얼마나 많은 제사와 희생 제물이 있었습니까. 제사하는 데 돈을 억수로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희생 제물로 드린 고기를 너희들끼리 다 처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손에 피가 가득하면서 제사만 드렸기 때문입니다. 손에 피가 가득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백성들을 억압하고 고통을 주고 죽게 만들었다는 뜻이죠.”

“그렇습니다. 재판을 굽게 하고,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 시대는 비록 므낫세의 죄악이 컸지만 히스기야와 요시야가 성전을 정화하고 신앙의 회복을 이루었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왜 망했습니까? 비록 그들이 영적인 면에서 각성했을지라도 그것의 증거, 즉 이웃 사랑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전과 왕궁에 황금이 있었지만 백성들은 굶주리고 죽어갔습니다. 심판과 구원은 하나님이 백성들의 고통의 소리를 들으셨을 때 일어납니다. 아벨의 핏소리를 들으셨을 때, 노아 시대에 죄가 관영했을 때, 소돔성에서 백성들이 울부짖었을 때, 애굽에서 백성들이 신음했을 때. 공동체에 죄악이 가득하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여지없이 심판하셨으며 동시에 구원하셨습니다.

 

가인을 심판하신 동시에 구원하셨고, 사람을 모두 심판하셨지만 노아를 홍수에서 건지셨고, 소돔성을 불로 태우셨지만 롯을 구해내셨으며,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여 가나안으로 들이셨습니다. 부자 청년을 세상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주님은 그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제자가 되는 길이며, 계명을 지키는 길이며, 영생을 얻는 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거지 나사로에게는 아무것도 요구하시지 않았고, 십자가 상의 강도에게도 아무것도 요구하시지 않았지만 그들을 모두 구원하셨습니다. 이런 무조건적인 구원과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신 것은 모순이 아닙니까.”

“그것이 바로 성도들이 목사님께 묻고 싶은 질문 아닐까요? 목사님, 저도 묻고 싶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구원하시고, 부자 청년에게는 까다로운 근심거리를 주신 것일까요?”

 

“많이 주신 자에게는 많이 찾으시니까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당연합니다. 부자에게는 돈을 요구하십니다. 지식인에게는 지식을 요구하시겠죠. 아브라함에게는 백세에 얻는 하나뿐인 아들을 요구하셨고요. 우리는 그저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찾으시는 것을 드려서 우리의 믿음을 증명할 뿐입니다.”

 

“그렇군요. 거지 나사로는 드릴 것이 없었네요. 그저 그의 비참한 인생뿐이었죠.”

“네, 목사님. 그는 그 비참한 인생을 주께 드렸고, 주는 그것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십자가 위의 강도 역시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었고, 그의 전부인 믿음을 바쳤습니다.”

 

“이제 좀 알겠군요. 지금 형제님은 제가 목회자로서 그리스도가 요구하는 그 무엇을 내놓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군요.”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제가 뭘 어떻게 해야 주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믿음만이 주를 기쁘시게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럼 저의 믿음을 어떻게 드릴까요. 어떻게 증명해야 제가 믿음을 주께 드릴 수 있겠습니까?”

“부자 청년과 목사님을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시오. 부자 청년을 사랑하시듯 그리스도께서는 목사님을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부탁하십니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하고 말입니다.”

 

“아버지가 한 가지를 제안하셨습니다. 지금 교회를 그리스도께 드리고, 개척을 다시 하든지 다른 곳에서 작은 교회를 섬기라고요.”

“그것도 좋은 제안 같습니다. 부자 청년에게는 돈이, 목사님께는 교회와 목회의 성공이 우상일 테니까요.”

 

“물론 아직까지 교회가 우상이라는 데 동의할 수는 없지만 목회나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라야겠지요.”

“그렇습니다. 이 시대는 우리의 관점이 교회에서 십자가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김이레 목사는 잠깐 동안 묵상에 빠진 듯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눈을 뜨고 말했다.

 

“형제님, 오늘 대화는 매우 유익했던 것 같습니다.”

“목사님, 저도 목사님처럼 강직한 목회자를 만나서 기쁩니다.”

 

김이레 목사는 약간 쓸쓸한 뒷모습으로 돌아갔다. 부자 청년도 그러했으리라. 그러나 느헤미야 형제는 그 부자 청년이 다시 돌아왔으리라고 믿고 싶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예수님이 그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나 같은 죄인도 구원하셨는데 율법과 계명에 흠이 없는 그를 버렸을 리 없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부유하고 신실한 예수의 제자로 나타났을지 누가 알겠는가. 거듭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던 니고데모처럼 예수의 죽음 이후에 구원받게 된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뒤늦게 자신의 믿음을 세상에 드러내고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이 땅에도 백여 년 전에 복음이 전파되지 않았는가.

 

한편 김이레 목사는 운전하면서 뭔가 홀린 듯한 느낌이었다. 다 알고 있는 듯한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마치 처음 듣는 말처럼 아무런 반응도 못하고 상대가 하는 말에 항복하고 만 듯한 느낌이었다.

 

김 목사는 다시 자기만의 생각을 전개했다.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은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게 아니라 나를 따르라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의 초점이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했는데 부자 청년은 전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래서 그는 근심하고 돌아갔다.

 

우리들도 초점을 엉뚱한 데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전 재산을 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좀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다. 느헤미야 형제의 관점은 지나치게 래디컬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 있다. 예수님은 그에게 재산을 팔라고 한 것이 아니라 나를 따르라고 한 것이다. 느헤미야 형제와 같은 사람들은 항상 현란한 말솜씨로 초점을 흐리는 게 특기였다.

 

얼마쯤 달렸을까. 김이레 목사에게 갑자기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부자 청년의 초점이 나를 따르라, 즉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에 맞춰졌다고 하자. 그런데 그가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지 않았다면 과연 예수를 따를 수 있었을까. 그는 예수의 제자가 되었을까.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예수의 제자가 되지 못했다. 죽은 자를 장례하고 난 뒤 따르겠다는 사람도 제자가 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교회 문을 나가자마자 설교의 핵심을 잊어버리고 자기 생각으로 설교를 재정리하는 성도들과 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휴대전화 버튼을 눌렀다.

 

전화벨이 울렸다. 느헤미야 형제가 수화기를 들자 김이레 목사가 상기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렇게 돈이 중요한가요?”

 

“돈은 생존과 관련이 있습니다. 돈이 없으면 먹고 살 수 없습니다. 돈을 다 바친다는 것은 목숨을 바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의 생명을 맡기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형제가 대답했다.

 

“아, 그런데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것은 영적인 행위 아닌가요?”

“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장례를 예비한 매우 영적인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한 제자가 그 향유 값으로 가난한 자를 구제하자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질책하셨잖습니까?”

“당연하지요. 예수님이 육신으로 계실 때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면 먼저 그분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신랑과 함께 있는데 어떻게 슬퍼할 수 있나요? 그리스도께서 여기 바로 눈앞에 계신데 어떻게 다른 곳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럼 지금은 예수님이 육신으로 계시는 시대가 아닌데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요?”

“더 이상 마리아가 향유를 바친 것을 두고 헌금에 적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리아의 순전한 믿음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그리고 죄에서 건지신 구원에 감격해서 드리는 온전한 감사에 관해 설교해야 합니다. 마리아처럼 예수를 사랑하는 자는 그분의 발 앞에서 겸손히 말씀을 따르는 자입니다. 동시에 가장 귀한 것, 자신의 전부를 그분께 드리는 자입니다."

 

"그런데 형제의 말씀은 가난한 자를 돕는 데 더 초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김이레 목사가 따지듯 물었다.

 

"가난한 자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다는 말씀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비싼 향유 값에 눈독을 들인 것이지 가난한 자를 도우려는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돕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은 언제든 너희와 함께 있으니 예수님의 육신이 떠나고 난 뒤에 언제든지 도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생각해 보십시오. 가난한 자에게 갈 향유를 자기 자신의 장례에 쓰라고 요구하실 분이십니까?"

 

“잘 알겠습니다. 주께서 제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해보겠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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