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이병률 <청춘의 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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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이병률 <청춘의 기습>

by 브린니 2020. 8. 11.

청춘의 기습

 

 

그런 적 있을 것입니다

버스에서 누군가 귤 하나를 막 깠을 때

이내 사방에 가득 채워지고 마는

 

누군가에게라도 벅찬 아침은 있을 것입니다

열자마자 쏟아져서 마치 바닥에 부어놓은 것처럼

마음이라 부를 수 없는 것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어서 버릴 수 없습니다

 

무언가를 잃었다면

주머니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계산하는 밤은 고역이에요

인생의 심줄은 몇몇의 추운 새벽으로 단단해집니다

 

넘어야겠다는 마음은 있습니까

저절로 익어 떨어뜨려야겠다는 질문이 하나쯤은 있습니까

 

돌아볼 것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을 부리로 쪼아서 거침없이 하늘에 내던진 새가

어쩌면 전생의 자신이었습니다

 

누구나 미래를 빌릴 수는 없지만

과거를 갚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이병률

 

 

【산책】

무엇을 청춘이라고 부르는가?

무엇이 사람을 젊고 푸르게 하는가?

 

미래가 창창해서인가?

앞으로 겪어야 할 인생의 고난이 많아서인가?

 

인생을 계산할 필요가 없어서인가?

마이너스보다 플러스가 더 많이 남아서인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산더미 같아서 앞으로 배울 것이 많아서인가?

스스로를 자책하고 반성하고 성찰하면서 인생을 고민해야 하는 밤들이 어둡지 않아서인가?

 

빛의 세계에서 놀고 있기 때문인가?

인생에 그림자나 그늘이 없어서인가?

 

갚아야 할 과거가 어른들보다 상대적으로 적거나 거의 없어서인가?

미래, 아직 오지 않은 시간들이 많다고 기뻐하며 들떠서 환호성을 내지르는 게 청춘인가?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가 작은 방에 들어오면 방이 환해지고, 그가 의자에 앉으면 테이블이 환해지고,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 주위로 후광이 번지고, 아우라가 퍼지고,

사람들이 그만을 바라보고, 그만을 사랑하고, 그만을 갖고 싶어하는.

그런 사람 어디에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 저기 한 사람씩 있다.

 

밤을 새우고 남들보다 일찍 맞은 아침에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동네를 뛰어다닌 적이 있는가.

그런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도 알리고, 나눠주고 싶은데 마땅히 볼 사람이 없었던 적은?

 

자신이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청춘은 값이 천정부지로 뛴다.

잃어버린 세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간들은 억만금을 주어도 살 수 없다.

 

미래를 빌릴 수 없는 것은 물론이지만

과거를 되가져 올 수 없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는 역사가 되었고, 역사는 반드시 빚에 대한 청산을 요구한다.

죄에 대한 벌이 남아 있고, 빚갚음의 요구도 상존한다.

 

매번 오늘이 과거가 되면서 갚아야 할 것들은 너무 많아진다.

인생이 지겨워지고 힘들어지고 별로 낙이 없다.

 

나이 든 사람에게 청춘은 그저 돌아가고 싶은 황금기가 아니라

낭비한 황금 만큼 갚아야 할 것들이 많아진다는 것을 뜻한다.

 

청춘은 별로 달갑지 않다.

 

그러나 인생은 점점 단단해지고 모질어져서 끊고 싶어도 끊을 수 없고,

끝까지 가보자 하면서 더 나아갈 뿐이다.

 

한 번 더 청춘이 온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나이 들어 생각하면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청춘은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말은 좀……

청춘도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할 수 있는 것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리고 그 선택한 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다.

 

청춘이 어느 날 찾아와 다시 빛나는 시절을 함께하자고 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할 것인가.

 

청춘 시절, 혼자서 혹은 둘이나 셋이서 아주 오랫동안 어느 도시에서 살고 싶다.

푸르고 흰 그리고 빨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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