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신
필명을 갖고 싶던 시절에
두 글자의 이름 도장도 갖고 싶어 도장 가게에 가서
성과 이름을 합쳐도 두 글자밖에 안 되는 도장을 파려고 하는데
돈을 적게 받을 수 있느냐 물었다
하지만 남들보다 더 많은 여백을 파내야 하는 수고가 있으니
오히려 더 받아야겠다는 도장 파는 이의 대답을 들었다
다 늦은 그날 밤
술 마시고 집으로 가는 길
한 잔만 더 마시면 죽을 수도 있고
그 한 잔으로
어쩌면 잘 살 수도 있겠다 싶어 들어간 어느 포장마차에서
딱 한 잔만 달라고 하였다
한 잔을 비우고 난 뒤 한 병 값을 치르겠다고 하자
주인이 술값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당신이 취하기 위해 필요한 건 한 잔이 아니었냐며
주인은 헐거워진 마개로 술병을 닫았다.
바지 주머니엔 도장이 불룩하고
천막 안 전구 주변에선 날파리들이 빗소리를 냈다
도장을 갖고도 거대하고도 육중한 한 시절의 어디에다
도장을 찍어야 할지 모르는 나는
온통 여백뿐인 청춘이었다
여백이 무겁더라도 휘청거리지 말고
그 여백이라도 붙들고 믿고 수고할 것을
그 여백에라도 도장을 찍어놓을 것을
―이병률
【산책】
다른 이름으로 살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어쩌면 누구나 다른 사람으로 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렇다고 나 자신을 버릴 생각은 없고, 따로 이름이 있어서, 때론 그 사람으로 살고 싶은 것이다.
몇몇 작가에겐 본명 말고 필명이 있다.
필명이 알려지고 본명은 숨어 있다.
법적인 일에는 본명을 꺼내지만
대부분의 삶에는 필명을 쓴다.
작가로서의 삶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두 번째 삶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또 다른 인생이 시작되었지만 앞날은 알 수 없는 일이어서 미신에 기댄다.
벼락 맞은 나무로 도장을 파면 만사형통이더라.
두 글자 이름을 쓰면 왕족 같아 보일 수 있다.
이씨는.
이병은 어떤가.
이률은 또 어떤가.
이병률은 시인의 이름으로 적당한가.
필명을 포기하고
본명으로 시인의 삶을 계속한들 어떠랴.
시가 좋은데.
이름이나 도장에 대한 미신을 버리고 시로 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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