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그말리온 신화 ― 그리스 신화 읽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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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피그말리온 신화 ― 그리스 신화 읽기 2

by 브린니 2020. 8. 9.

피그말리온Pygmalion | Πυγμαλίων

 

 

 

피그말리온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키프로스의 조각가이다. 키프로스의 왕이었다는 설도 있는데 벨로스와 안키노에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 다나오스, 아이깁토스 등과 형제이다.

 

피그말리온은 매춘부로 전락한 키프로스의 여인들에게 환멸을 느껴 독신으로 살았는데 눈 같이 흰 여인의 상아상을 조각해서 함께 지냈다. 그는 여인 상아상을 사랑했다. 상아상은 살아있는 것 같았고, 여인이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틈만 나면 상아상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상아상의 살갗을 쓰다듬고, 입을 맞추면서 상아상도 화답하기를 바랐다.

 

<조각상과 사랑에 빠진 피그말리온> 모리스 팔코네 1763

상아상에 말을 걸기고 하고, 상아상을 껴안고, 상아상을 상대로 아첨을 떨고, 반짝거리는 것을 선물하기도 했다. 상아상에 옷을 입혀주기도 하고, 귀고리 목걸이를 달아주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을 침대에 눕히고, 베개를 받쳐주었다. 속으로는 상아 처녀를 자신의 아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것이 상아상이라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 쓸쓸해졌다.

 

피그말리온은 베누스(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축제 때 제물을 드린 뒤 제단 앞에서 더듬거리며 “신들이시여, 기도하면 만사를 순조롭게 하신다는 신들이시여, 바라건대 제 아내가 되게 하소서, 저……”그는 “상아 처녀를……”하고 말하려다 “상아 처녀 같은 여자를……”하고 기도를 바꾸었다.

 

<베누스 여신께 기도하는 피그말리온> 안젤로 디 코시모 알로리(브론치노) 1503-1572

베누스 여신은 그의 기도의 참뜻을 알아듣고, 피그말리온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피그말리온은 상아 처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런데 온기가 느껴지고 상아 처녀는 인간의 몸이 되었다.

 

<조각상에 입맞추는 피그말리온> 장 레옹 제롬 1890

상아 처녀는 피그말리온의 입맞춤에 화답했고, 둘은 결혼하게 되었다. 혼례식에는 베누스 여신이 직접 찾아와서 축하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났고, 이름을 ‘파포스’라고 불렀다.

 

 

<피그말리온의 키스에 화답하는 상아 처녀> 장 레옹 제롬 1890

 

 

피그말리온의 꿈은 모든 예술가들의 꿈이 아닐까.

자신이 만든 예술품이 생기를 띠고 살아나서 작품 이상이 되는 것.

 

피그말리온처럼 조각상이 인간이 되고,

솔거가 그린 나무처럼 새들이 와서 앉고,

꽃 그림에는 나비와 벌이 날아들고,

포도와 복숭아 등을 그려 놓으면 각종 벌레들이 꼬이는……

 

연극이나 영화감독들은 배우를 통해 살아있는 인간상을 만들고,

그 인물들이 백년이 지나도록 마치 현재 함께 하는 것처럼 관객들과 호흡하는 것.

 

시인의 시 구절들이 살아 있는 언어로 널리 애송되고 전래되는 것.

소설의 캐릭터가 사람들의 성격을 드러내고, 회자되면서 대표 상징이 되는 것.

 

신화는 언제나 원형을 만들어낸다.

피그말리온의 이야기는 구약성서의 창조 신화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신은 인간을 손수 흙으로 빚은 뒤 코에 생기를 불어넣음으로써 창조물을 완성했다.

그러나 피그말리온은 신이 창조한 인간과 달리 살아 움직이지 못했고, 결정적으로 영혼(마음)이 없었다.

 

자신의 창조물을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피그말리온의 욕망은 과학 분야에서도 나타난다. 유전자 조작으로 인한 인간복제를 비롯해 기계에 인공지능을 심어 인간처럼 만들고자 하는 것에도 기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과연

 

피그말리온의 꿈이 현실이 되는 것이 예술가로서의 꿈이 실현된 것일까, 아니면 그의 에로스적 환상이 실제가 된 것일까.

 

피그말리온은 자신의 조각상을 향한 일방적인 숭배나 사랑을 원하지 않았다.

상아 처녀도 자신의 사랑에 반응하기를 원했다.

사랑이란 상대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

 

베누스 축제에서 기도한 후 피그말리온이 상아 처녀에게 키스하자 인간의 몸으로 변한 처녀 역시 그에게 화답한다. 어쩌면 키스를 하면 잠든 공주가 깨어나거나 개구리가 왕자로 변한다는 이야기 패턴 역시 이런 신화로부터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피그말리온이 사랑할 수 없는 대상과 사랑에 빠졌다는 점에서 나르시스와 유사한 모습을 띤다. 다만 피그말리온은 그 대상이 인간이 아니라는 점, 나르시스는 그 대상이 인간이긴 하지만 자기와 한몸이라는 점이 다르다.

 

피그말리온의 사랑은 대상이 있지만 일방적이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 나르시스의 경우처럼 응답이 없기에 죽을 것 같은 사랑이다.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김소월, 「초혼」)

 

나르시스의 사랑은 궁극적으로 대상이 없다. 1인칭 사랑은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다. 자기애라고 우긴다고 해도 부를 이름도, 돌아올 응답도 없다. 그저 자기 자신을 넋을 잃고 바라만 볼 뿐이다. 그것을 ‘1인칭 응시의 사랑’이라고 불러야 할까.

 

나르시스의 사랑엔 비상구가 없지만 피그말리온에겐 단 한 가지 출구가 있다. 자신의 조각상이 인간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는 창조라고 할 수 있다. 피그말리온은 제3자에게 도움을 청한다.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제3자의 도움을 청하는 이야기는 숱하게 많다. 그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코 <시라노>를 꼽을 수 있다. 에드몽 로스탕의 1897년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Cyrano de Bergerac>는 그 뒤로 수많은 연극, 영화, 뮤지컬 등에 영감을 주었다.

 

피그말리온이 선택한 제3자는 베누스, 아프로디테였다. 아프로디테는 키프로스의 여인들을 매춘부로 만든 역사가 있어서인지, 혼자 사는 피그말리온이 측은해서인지, 그의 예술적 능력을 높이 사서인지 아무튼 그의 기도에 응답해 상아상을 인간으로 만들어준다.

 

피그말리온은 환상 속의 사랑놀이를 그만두고 현실 결혼을 하게 된다. 나르시스가 자신의 사랑을 이루지 못해 결국 죽음으로 사랑을 끝낸 반면에 피그말리온은 제3자인 베누스 신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사랑을 이룬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의 도움을 받아 성공한 케이스는 그리 흔하지 않다. 대체로 신은 인간의 소원 따위엔 반응하지 않는다. 설령 신의 도움을 받아 꿈을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최후까지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이야기를 별로 들리지 않는다.

 

오르페우스도 지옥까지 내려가 자신의 아내를 만나 지상으로 데려오는 데까지 성공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아내를 잃는다. 신이 그저 은혜를 베풀지 않고, 뒤돌아보면 안 된다는 조건을 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그말리온에게는 아무런 조건 없이 소원을 들어준다. 매우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피그말리온이 순수한 사랑을 열망해서일까? 매춘부들의 섬이었던 키프로스에서 아내를 구하지 못한 피그말리온이 결코 때 묻지 않을 상아상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상아 처녀를 아내로 맞아들이기 위해 제물을 바치며 소원을 빈 것이 신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나르시스처럼 교만하게 타인의 사랑을 무시하지 않고, 신들에게 대항하지 않고, 겸손한 태도를 보인 것이 신에게 예쁨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피그말리온은 기도할 때도 수줍은 태도를 보인다.

 

제단에서 향연이 오르자 피그말리온은 제 몫의 제물을 드리고 제단 앞에서 더듬거리는 어조로 기도했다.

“신들이시여, 기도하면 만사를 순조롭게 하신다는 신들이시여, 바라건대 제 아내가 되게 하소서, 저……”

그는 “상아 처녀를……”하고 말하려다 “상아 처녀 같은 여자를……”하고 기도를 바꾸었다.

 

어쩌면 이런 태도가 그를 겸손한 인간으로 보이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신이 보기에 피그말리온은 두 가지 면에서 신의 마음에 들 만한 성격을 지녔다.

 

하나는 당시 키프로스의 여인들이 매춘부 노릇을 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몰랐는데 그는 여인들과 어울리지 않았고, 그 시대 문란한 풍속과 거리를 두었다. 그는 부끄러움을 아는 자였으며, 윤리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두 번째로 그는 수줍은 성격이었고, 겸손했다. 그는 예술가였으나 자유분방하거나 문란하거나 교만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상아상이 여느 인간 여자보다 낫다고 자랑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홀로 자신의 예술품을 감상하면서 인형놀이에 집착할 정도로 어린아이 같은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이 천국에 들어간다? 그는 기도할 때도 부끄러움을 탔고, 자신의 한계를 지켰다.

 

세 번째로 그는 상아상을 인간으로 만들어달라고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오르페우스는 지옥에서 아내를 데려오겠다는 무리한 요구를 했다가 뒤돌아보아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받았다.

 

피그말리온은 대신 상아 처녀 같은 여자를 달라고 했다. 그 섬에 사는 모든 여자들이 문란했기에 처녀는 없었다. 그래서 베누스 여신은 상아 처녀를 인간으로 만들어 결혼시켜 줄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피그말리온은 행운아임에 틀림없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티 없이 깨끗한 처녀를 아내로 맞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자신이 창조한 여자를……

 

피그말리온은 몇 가지 점에서 유일무이한 남자가 되었다.

 

첫째 자신의 꿈을 이루었다.

둘째 자신의 조각상과 실제 결혼했다.

셋째 신에게 기도 응답을 받아 행복하게 되었다.

 

그래서 피그말리온은 <꿈은 이루어진다>의 원형적 인물이 된 것이다.

2002년 월드컵과도 인연이 깊은 신화적 인물인 것이다. 2002 레전드 중 하나라고나 할까?

 

 

 

피그말리온 효과란 무언가에 대한 사람의 믿음, 기대, 예측이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경향을 의미한다. 타인의 기대나 관심으로 능률이 오르거나 결과가 좋아지는 현상이다. 특히 교육심리학에서 교사의 기대에 부응하여 학습자의 성적이 향상되는 것을 지칭한다. 즉 대상에게 관심을 주고 격려하면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 속에 있는 욕망을 적절하게 자극하여 그로 하여금 그 꿈을 성취하도록 고취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 사람 옆에서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 것은 이루어진다고 속삭여 주는 것이다. (때론 이런 말이 악마의 속삭임이 될 수도 있으니 주의하시라!)

 

 

 

조각상에 붙여진 이름은 갈라테이아Galatea |Γαλατεία이다. 바다의 님프 혹은 거품의 요정을 의미하는 갈라테이아는 아름다움, 생의 기쁨을 상징하였고, 유백(乳白)색의 여인이라는 어원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갈라테이아는 피그말리온 신화에 나오는 조각상의 어원은 될지 몰라도 실제 동일인물은 아니다. 아마도 조각상에 이름이 없기에 후대 사람들이 나중에 임의로 붙인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 대략 18세기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피그말리온 신화는 자신이 창조한 작품과 실제로 사랑하고 결혼했다는 처음이자 마지막 이야기로서 후대 예술창작에 크나큰 모티브를 제공했고, 피그말리온을 소재로 수많은 회화 미술과 문학과 연극, 오페라, 영화 등이 탄생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아일랜드의 작가 버나드 쇼의 희곡 『피그말리온』이 있다.

 

버나드 쇼 <피그말리온>

 

이 작품은 영국 상류사회의 사교계를 풍자적으로 비판하고 있는데 주인공 언어학자 헨리 히긴스는 거리의 꽃 파는 처녀 일라이자를 만나 그녀를 사교계의 교양 있는 여자로 만들겠다고 공언한다. 히긴스는 일라이자에게 고급 언어를 구사하도록 훈련시켜 사교계의 우아한 여성으로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해 동료인 피처링 대령과 내기를 한다.

 

버나드 쇼는 일라이자의 자유의지에 초점을 맞춰 피그말리온 신화와는 다른 결말을 이끌어냈다.

이 희곡은 입센의 <인형의 집>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히긴스가 일라이자의 태도와 발음 등을 교정한 것은 그저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과시하는 것에 불과했고, 일라이자의 삶과 장래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일라이자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히긴스에게 왜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되묻는다. 일라이자는 과거의 하류층 생활로 돌아갈 수도, 상류층 여성으로서 살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일라이자는 상류층 귀족여성의 언어와 매너를 갖추게 되었을 뿐, 그녀의 실질적인 지위나 할 줄 아는 일이나 지식수준 등은 과거와 별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히긴스는 자신의 집에서 자유롭게 살면 된다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대한다. 결국 일라이자는 히긴스를 버리고 자신의 길을 개척하기 위하여 떠난다.

 

버나드 쇼는 <피그말리온>에서 본래 신화를 비틀어 버리고 신데렐라식 결말을 거부하였다. 버나드 조각상이 인간이 된 순간 이미 자신만의 의지를 지니게 되었고, 스스로 자신의 앞길을 선택할 권리가 생겼다고 생각한 것이다.

 

<피그말리온>은 여러 차례 영화로 만들어졌지만 희곡과 다르게 히긴스와 일라이자의 해피엔딩으로 결말이 났다. 1938년 헐리우드에서 버나드 쇼가 각색에 참여해 영화가 만들어진다. 희곡풍의 대사가 많이 바뀌고 결말도 해피앤딩이었다.

 

영화 <피그말리온>은 성공을 거두고 1939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색상을 수상하였다. 버나드 쇼는 아카데미상 수상에 대해서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상패는 고이 모셔두었다고 한다.

 

영화 <피그말리온> 1938

1956년 브로드웨이에서 <마이 페어 레이디>라는 이름으로 뮤지컬로 만들어졌다. 본래 1930년대부터 뮤지컬로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버나드 쇼는 이를 거부했다. 결국 쇼가 죽은 뒤에야 뮤지컬로 만들 수 있었다.

 

뮤지컬은 1938년 영화의 스토리를 토대로 하고 있지만, 대사는 원작인 희곡의 대사를 거의 그대로 살려냈다. 이 뮤지컬의 성공을 바탕으로 1964년 동명의 뮤지컬 영화가 탄생하였다.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에는 오드리 헵번이 출연하여 우리에게도 친숙하다.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 1964

피그말리온을 소재로 많은 작품들이 만들어졌지만 아쉽게도 피그말리온 신화의 원형을 계승한 작품은 별로 없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피그말리온이 조각상을 자신의 아내로 만든 것만을 따로 떼어내 상류층이 하층 계급의 여자를 상류층 여자로 이끌어준 뒤 아내로 맞이하는 식의 신데레라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결말을 맺고 있는 상업 영화들은 버나드 쇼가 우려했던 바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여성의 자기 의식이 배제된 채 남성에 의해 여성을 신분상승시키고 결혼까지 한다는 결말은 아무리 해피앤딩이라 하더라도 좋은 해결책인가 의심스럽다. 많은 페미니즘 비평가들도 이를 비판하고 있다. 원작보다 더 훌륭한 후속작은 좀처럼  보기 어려운 것인가.  

 

 

 

* 버나드 쇼(아일랜드 1856-1950) 1925년 노벨문학상 수상

* 피그말리온 Pygmalion, 1938 감독 감독 안소니 애스퀴스, 레슬리 하워드 출연 레슬리 하워드, 웬디 힐러 

                                        11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각색상), 6회 베니스국제영화제(볼피컵 남우주연상)

* 마이 페어 레이디 My Fair Lady, 1964 조지 큐커 감독 오드리 헵번(일라이자 둘리틀), 렉스 해리슨(헨리 히긴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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