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김소연 <그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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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김소연 <그런 것>

by 브린니 2020. 8. 8.

그런 것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창문 바깥에서가 아니라 저 멀리 대관령에서

아침은 그렇게 시작됐다 빨래를 널고 창문을 열어두고 바깥에 앉아 볕을 쬐고 있을 때 고양이가 다가와 내 그림자의 테두리를 몇 걸음 걸었고 저쪽에 웅크렸다

 

꿈에서 일어난 일들이 쏟아져 내렸다 허벅지에 떨어진 동그란 핏방울이었고 그다음 양철 주전자였고 그다음 도살장 옆 미루나무였다

 

단식을 감행했다 내가 아니라 내가 아는 한 사람이 저 먼 제주도에서

아침은 그렇게 지나갔지만 많이 아팠다 내가 아니라 저 먼 시베리아에서 내가 아주 좋아하는 친구가

 

할머니는 선지를 좋아했고 엄마는 할머니를 좋아했다 나는 심부름을 좋아했다

 

자박자박 붉은 물기를 밟으며 도살장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한 발씩 한 발씩 서늘해졌다 검은 앞치마를 두른 아저씨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동물들은 걸려 있거나 누워 있었다 질질 끌려 우리 집 앞을 지나간 건 어제의 일이었다

 

할머니는 쪼그려 앉아 선지를 먹었다 아주 오래전 그 집에서가 아니라 조금 전 꿈속에서

멀리서 날아온 빈혈이 할머니의 은수저에 얹혀 있었다 할머니의 은빛 정수리처럼 똬리를 튼 채로

 

아침은 이런 것이다

 

도착한 것들이 날갯죽지를 접을 땐 그림자가 발생한다 바로 거기에서

나무가 있었다면 새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텐데 사람이 아니라 저기 빈자리에서 나무 한 그루가

 

                                                                                                           ―김소연

 

 

【산책】

저 멀리, 저 먼 곳, 저기 어디, 저만치, 저만큼.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

 

눈에 보이는데 금방 가 닿을 수도, 손을 댈 수도,

가로챌 수도, 훔칠 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그저 저, 저기, 저만치, 저만큼, 저 정도.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김소월의 <산유화>에는 저만치라는 거리감과 혼자서라는 고독감이 병치되어 꽃이 오롯이 꽃이 되는 상태를 그린다.

산에는 무더기로 꽃이 필 수도 있는데 <산유화>의 꽃은 홀로 조금 떨어져 핀다.

그러나 가을 봄 여름 없이 핀다.

계절은 언제나 오지만 창밖에 머물 때가 많다.

 

저 멀리 대관령에서 눈이 온다.

고양이는 저쪽에 웅크렸다.

지금 여기가 아니라 (저기)에서 일어난 일들이 쏟아진다.

저 먼 제주도에서 내가 아는 이가 단식을 한다.

저 먼 시베리아에서 내가 아주 좋아하는 친구가 아팠다.

(어린 시절) 나는 심부름을 좋아했다.

도살장으로 들어간 것은 (오래전)이고, 도축한 가축이 끌려서 우리 집 앞을 지나간 건 어제의 일이었다.

할머니는 쪼그려 앉아 선지를 먹었다 아주 오래전 그 집에서가 아니라 조금 전 꿈속에서

도착한 것들이 날갯죽지를 접을 땐 그림자가 발생한다 바로 거기에서

나무가 있었다면 새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텐데 사람이 아니라 저기 빈자리에서 나무 한 그루가

 

시간이든 공간이든 거리감이 있을 때 거기서 감정이 생긴다.

예술은 한두 발짝 떨어져서 봐야 잘 보인다.

 

사랑도 너무 바짝 붙으면 설레지 않는다. 좀 떨어져야 설렌다.

 

쓰나미와 태풍 같은 것도 멀리서, 혹은 영상으로 봐야 장관이다.

바로 코앞에서 본다면(맞닥뜨린다면), 그야말로 끔찍하다(숭고하다?).

 

거리감은 안정감을 준다.

멀리서 발생한 불행한 소식들은 그 자체로 불행이지만

여기엔 그 불행이 닥치지 않아서 안도한다. 좀 이기적이지만.

 

손을 잡을까 말까, 첫 데이트에 설레는 연인들이 있다.

첫 키스는 말할 것도 없다.

 

너무 바짝 붙지 말고 약간 떨어져서 그러나 친밀감을 유지한 채.

 

저,

저, 저어기요.

저……

 

이런, 제대로 말도 아닌 말이 있어서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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