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장석남 <저녁해가 지다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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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장석남 <저녁해가 지다 말고>

by 브린니 2020. 8. 5.

저녁해가 지다 말고

 

 

저녁해가 지다 말고

내 얼굴에 왔다

낮불을 켜놓은

내 얼굴

 

얼굴을 버리고 놀다보면

저녁해를 비끼는

새도 될 수 있으련만

―장석남

 

 

【산책】

들국화가 부른 <사랑한 후에>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긴 하루 지나고 언덕 저 편에

빨간 석양이 물들어 가면

놀던 아이들은 아무 걱정 없이

집으로 하나 둘씩 돌아가는데

나는 왜 여기 서 있나

저 석양은 나를 깨우고

밤이 내 앞에 다시 다가오는데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전주가 긴 여운을 주는 곡이었다.

 

저녁노을 속을 새가 날아간다.

아마도 자기 집을 향해 날아가는 것일 게다.

그런데 한 아이만 석양을 맞으며 서 있다.

노을이 아이의 얼굴을 붉게 물들인다.

 

낮불을 켜놓은

내 얼굴

 

얼굴을 버리고 놀다보면

 

얼굴은 그 사람을 나타내는 표징이다.

그런데 얼굴을 버리면 그 사람에게 무엇이 남을까.

 

간혹 아무도 날 알아보지 못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아무도 날 알지 못하는 곳에 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사실 날 알아보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세상에서 날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얼굴을 버리고 새가 되어 날아간다.

얼굴을 버리고 곰이나 사자나 물고기가 되면?

 

사람이 할 수 없는 것 중에 가장 하고 싶은 것은 아마도 나는 것이다.

석양 사이로 날아가는 새.

 

얼굴을 버리고 놀다가 새가 되어 날아간다.

내 얼굴을 아는 어떤 사람이 새가 되어 날아가는 나를 알아볼 수 있을까.

 

새가 되어 하늘을 날면

얼굴을 버린 것보다 몇 배 행복할까.

 

새들은 어디까지 날아갈 수 있을까,

얼마 높이, 얼마나 멀리.

 

저녁해가 자꾸 내 얼굴을 비추면

나는 점점 새로 변해 날고 있을 것이다.

 

놀던 아이가 그 새를 바라볼 것이다.

한때 나였던 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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