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이근화 <내 인생의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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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이근화 <내 인생의 0.5>

by 브린니 2020. 8. 4.

내 인생의 0.5

 

 

터미널 앞 만두집에서 만두를 한 판 먹었다

치자의 찝찔한 맛이 만두에 가닿았다

부추나 숙주 따위가 이 사이에 껴서

혀끝으로 이를 쓸어가며 먹었다

 

시곗바늘은 늘 애매하게 걸쳐 있다

그것은 정말 숫자를 가리킨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조금씩 빨리 오거나 늦게 온 사람들이

서로의 숨을 섞어가며 앉아서 눈동자를 굴린다

 

멈추지 않는 것은 버스 그리고 창밖의 심장

창문이 안으로는 나를 낳고 밖으로는 어둠을 낳는다

도시와 도시 간에 느슨하게 마음을 풀어놓고

환기구를 통해 들어오는 비현실적인 냄새를 맡는다

 

아이가 울지만 아무도 말릴 수가 없다

차 안의 먼지가 실내 온도를 결정하듯이

졸음도 눈물도 구역질도 속도에 반응

밤벌레들을 팍팍 터뜨리며

 

서로의 어깨에 머리카락을 떨어뜨리며

우리는 같은 목적지에 가닿고

납작해진 뒤통수를 털어내며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밤 버스 가로등 별이 저마다의 속도로 달려가고

 

                                                          ―이근화

 

【산책】

밤, 터미널 이런 단어들은 함께 있을 때 어떤 분위기를 갖고 있다.

밤의 터미널은 아무리 밝아도 쓸쓸하다.

 

어디로 가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그 어디가 어디든 그곳에 가닿아야 하기 때문에.

 

가고 싶은 곳이든, 가지 않아도 될 곳이든

가기 싫은 곳이든, 바라 마지않는 곳이든

 

갈 곳이 있다는 사실에

갈 곳이 없다는 사실에

가야 할 곳이 있거나,

가야 할 마땅한 이유가 없거나

 

밤의 터미널은 아무리 밝아도 사람이 많지 않다.

불빛으로 사람을 유혹하는 곳이 아니다.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들뿐이다.

가끔 어디서 들어오는 사람도 있다. 많지 않지만.

 

터미널에서 만두를 먹는 것은 맛 때문이 아니다.

어디로 가기 전에 잠깐 시장기를 면하려는 것이다.

 

배가 고프면 갈 수 없다는 것일까.

긴 버스 여행을 견딜 수 없다는 뜻일까.

 

사람들은 떠나기 전에 무언가를 먹는다.

배가 고프지 않더라도, 혹은 허겁지겁 시간에 쫓겨서.

 

심야버스는 꼭 타야 할 사람들만 태운다.

밤 시간에 멀리 가야 할 사람들의 사연을 자리에 앉힌다.

 

밤의 고속버스 혹은 직행버스, 시외버스 들

버스를 타면 몇 몇 사람들과 함께 어디론가 실려간다.

 

서울행, 부산행, 옥천행, 사리원행

목적지가 같아 보이지만 그 도시의 터미널에 내리면 다시 뿔뿔이 흩어진다.

 

그들은 만두나 국수, 떡뽂이나 햄버거를 먹었다.

밤에는 소화가 잘 안 되는 음식들이다.

 

이를 쑤시거나 트림을 하거나 방귀를 뀌면서

꿈을 꾸면서, 헛소리까지 하면서, 침을 흘리거나

남의 어깨에 기대 졸면서, 그 얼굴을 밀어내면서

버스에 실려 어디론가 가고 있다.

 

인생이라는 버스를 타고서 종점에 내릴 때까지는,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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