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스 신화 ― 그리스 신화 읽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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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나르시스 신화 ― 그리스 신화 읽기 1

by 브린니 2020. 8. 4.

 

 

 

망연자실, 나르시스(나르키소스)의 이름의 뜻이다. 망연자실은 정신이 아득해져 멍하니 어찌할 줄 모르는 모습을 가리킨다. 너무나 놀랄 만한 일을 당하거나 보았을 때 생기는 현상을 뜻한다. 나르시스를 낳은 어머니 강의 요정 리리오페는 얼이 빠질 만큼 잘생긴 아들의 모습을 보고 놀라서 나르시스라고 이름 짓는다.

 

리리오페는 점쟁이 테이레시아스에게 아들이 장차 크면 오래오래 장수할 수 있겠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한다.

“이 아이는 천수를 누릴 것이다. 다만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나르시스가 열여섯 살이 되자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선망의 대상이 되지만 아무도 자신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나르시스로부터 거절을 당한 이들은 정말 많았는데 그 중 하나가 어느 날 신들에게 기도했다.

 

“우리가 나르시스를 사랑했던 것처럼 그도 누군가를 사랑하게 하소서. 그러나 그 사랑을 이룰 수 없게 하소서.”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 신전이 있는 람노스의 여신이 기도에 응답했다.

 

어느 날 샘으로 내려와 물을 마시려던 나르시스는 샘에 비친 영상을 보고 마음을 빼앗긴다. 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넋을 잃은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샘가에 앉아 있었다.

 

쌍둥이별 같은 두 눈과 디오니소스나 아폴로의 머리채와 같은 머리칼, 보드라운 뺨, 상아 같은 흰 목, 백설 같은 피부에 장밋빛 홍조가 어린 아름다운 얼굴.

나르시스는 자신을 보며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얼마 후 나르시스는 샘에 비친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자기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 사랑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다.

 

나르시스는 스스로를 갈망하는 불길에 휩싸여 사라졌다. 나르시스의 시신은 온데간데 없고 샘가에는 흰 수선화만 피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한 나르시스는 자기애自己愛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자기 자신을 죽기까지 사랑한 남자. 사람들은 나르시스를 자기 속에 푹 빠져서 앞뒤 분간을 못하는 사람을 비꼬는 말로 쓰곤 한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고선 남을 사랑하기도 어렵다.

 

심리학에선 자기를 사랑하고 아끼고 격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기애에 빠지는 것은 좋지 않지만 자기를 사랑해야 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래저래 나르시스는 좀 난처한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해야 하지만 깊이 빠지지는 말라!

 

나르시스는 보는 이를 망연자실하게 만드는 매력을 지닌 인물이다. 이렇게 멋진 남자 나르시스가 비극적인 인물이 된 것은 남들의 사랑을 우습게 여긴 탓인지도 모른다. 교만한 자는 신의 미움을 산다.

 

나르시스는 자기 자신에게 매혹된다. 다른 사람의 사랑은 성에 차지 않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빠지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르시스는 자신이 사랑에 빠진 대상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난 뒤에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일부러 그 상태를 즐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신이 내린 벌이기도 하다.

 

자기를 사랑하지만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

그것이 나르시스의 이름인 것이다.

 

그러므로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과 나르시스 신화는 거리가 멀다. 심리학의 자기 사랑은 자기를 소중하게 잘 보살펴서 더 이상 상처받지 않고 건강한 내면을 만들기 위함이지만 나르시스가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 나는 그 사실을 안다, 나는 나로부터 사랑받을 수 없음을 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계속 나를 사랑할 것이다, 설령 죽을지라도.

 

나르시스는 자기 자신을 갈망하는데 그 갈망 때문에 죽음을 맞이한다. 밤낮주야 애타는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기다리다가 죽는 것이다. 나르시스를 두고 실체가 아닌 그림자를 사랑한 어리석은 남자라고들 한다. 하지만 그는 바보가 아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지만 거기서 벗어날 생각이 없을 뿐이다. 처음에 그는 실체와 그림자를 구분하지 못했지만 곧 샘 밖에 있는 자신이 실체이며 샘에 비친 영상이 그림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나르시스는 그림자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림자가 가리키는 것 즉 자기 자신을 사랑한 것이다. 샘에 비친 영상이 살아서 걸어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죽은 것이 결코 아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샘에 비친 영상으로밖에 볼 수 없기에 그것을 하염없이, 망연자실 바라보며 샘가를 지킨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이 먹거나 자는 것보다 더 기쁘다. 그는 자기 자신과 현실적인 사랑에 빠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환상에 머무른다. 그에게는 이 환상이 더 실제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알고 있다.

 

“사랑을 구해야 하나? 사랑받기를 기다려야 하나? 사랑을 구하여 얻는 것이 무엇이냐? 구하는 것이 내게 있는데…… 내게 넉넉한 것이 나를 가난하게 하는구나. 나를 내 몸에서 떨어지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는 쫓는 동시에 쫓기고 있다. 그는 구하는 동시에 자신을 내놓아야 한다. 그는 넉넉하지만 가난하다. 그는 잉여이면서 결핍이다. 그는 남아도는 것이면서 동시에 매우 모자라다.

 

라캉은 사랑은 대상에게 없는 것을 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A가 B를 사랑할 때 A는 B가 자신이 사랑할 만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정작 B는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B는 언제나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무언가)을 A에게 주는 것이 된다.

 

사랑은 가지고 있지 않은 무언가를 주고받을 때까지만 가능하다. A가 B에게서 더 이상 그 ‘무언가’를 보지 못하는 순간 사랑은 깨어지고 만다. 우리말로 하면 콩까지가 씌었을 때는 불타는 사랑을 하고, 콩깍지가 벗겨지면 냉정한 이별을 맞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환상인 것이다. A가 B에게서 ‘무언가’를 보는 것, B가 자신에게 없는 것을 A에게 주는 것, 그래서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것. 그래서 사랑에서 깨어나면 마치 꿈에서 깬 것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물론 추억이 남고, 다시 추억은 환상 속에서 각색되고 왜곡되면서 되풀이 상영되기도 하지만.

 

나르시스는 자기 자신에게서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본다. 그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가 아니라 실체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 문제다. 그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에게 있어야지 얻을 수 있다. 그 대상이 자신에게 줄 때 그것이 가치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있을 때 그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그저 남아도는 잉여물일 뿐이다. 하지만 그가 그것을 갈망하는 한 그것은 잉여가 아니라 결핍이 되고 만다. (물론 처음부터 나르시스에게 망연자실하게 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고, 그저 사람들의 환상에 불과했다고 말한다면 얘기가 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갖고 싶지만 갖지 못할 때 결핍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어린 시절 장난감을 갖지 못한 가난한 아이가 커서는 피규어에 열광한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나르시스의 비극은 그가 갈망하는 것이 자신에게 있는데 그것을 결코 얻을 수 없다는 데 있다. 그것은 반드시 타인이 자기에게 주었을 때 받아서 누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결국 둘이 필요한 관계이다.

 

자기애의 비극은 바로 이것이다. 자기만 줄 수 있는 것을 자신이 바라는 것. 그러나 자신은 결코 자기에게 이것을 줄 수 없다. 그래서 나르시스는 외친다.

 

“나를 내 몸에서 떨어지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나르시스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환상 속에서 벌어지는 사랑 외에 다른 사랑을 할 수 없다. 그래서 고통에 차서 울부짖는다. 하지만 여기서 벗어나길 거부한다는 점에서 고통을 즐기고 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이 고통의 쾌락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이것이 신의 저주인지도 모른다.

 

오로지 죽음만이 나를 나로부터 떨어질 수 있게 한다. 죽음만이 내가 구하는 동시에 가지고 있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내 몸으로부터 떨어지게 할 수 있다. 나르시스가 자신의 몸에서 분리된 뒤 거기에는 수선화만이 남는다.

 

 

 

나르시스는 쫓는 동시에 쫓기는 자, 구하는 동시에 갖고 있는 자라는 점에서 다른 고대 이야기들을 떠오르게 한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예언가로부터 국가의 재앙은 모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남자 때문이라는 말을 듣는다. 오이디푸스는 온 나라에 그 남자를 찾으라고 명을 내린다. 그러나 정작 그가 자신인 줄 모르고 자신을 쫓는다. 후에 모든 사실을 알게 되자 스스로 눈을 뽑는다.

 

고대 이스라엘 왕 다윗은 어느 날 선지자 나단의 방문을 받는다. 부자가 있는데 손님이 오자 자신의 많은 양들을 두고 가난한 집의 양을 빼앗아 손님을 대접했으니 벌해달라는 것이다. 다윗은 노발대발하여 그 놈을 잡으라고 소리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파렴치한 부자였다. 많은 왕비와 첩이 있었는데도 부하의 아내를 빼앗고 충실한 부하를 죽인 것이다.

 

나르시스 신화에서 구하는 것은 사랑인데 이 두 이야기는 벌罰을 구하고, 죄罪를 찾아낸다. 죄와 벌은 떼래야 뗄 수 없는 것이며, 구하는 것과 찾아낸 것 모두 자기 자신에게서이다.

 

 

 

환상 [fantasy, 幻想]

정신분석학 용어로, 프로이트에 따르면 과거의 트라우마적인 사건을 무의식적 욕망에 따라 현재에 소환하여 재구성할 때 시각적으로 무대화하는 것을 말하며, 라캉에 따르면 주체가 고통스러운 쾌락인 주이상스로부터 자기 자신을 방어하는 각각의 특정한 방식을 말한다.

 

주이상스 [jouissance]

쾌락원칙을 넘어서 쾌락 자체가 고통으로 경험되는 '고통스러운 쾌락', 즉 주체가 병리적인 증상을 즐기면서 역설적으로 만족을 얻게 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수선화 Narcissus, Paperwhite, 水仙花.

지중해 연안이 원산지이다. 꽃은 12∼3월에 피는데 꽃자루 끝에 5∼6개의 꽃이 옆을 향하여 핀다. 수선화의 생즙을 갈아 부스럼을 치료하고, 꽃은 향유를 만들어 풍을 제거할 수 있고, 비늘줄기는 거담·백일해 등에 약으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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