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김소연 <바깥에 사는 사람>
본문 바로가기
독서 리뷰

[명시 산책] 김소연 <바깥에 사는 사람>

by 브린니 2020. 8. 2.

바깥에 사는 사람

 

 

버스에 가장 오래 앉은 사람은

가장 바깥에 산다 그곳은 춥다

 

버스에 외투를 벗어두고 종점에서 내린 적이 있다

다른 나라 더운 도시의 공항이었다

맨발로 비행기에 올라 더 멀리 나는 갔었다

 

옆자리에는

같은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의 이어폰에서 찌걱찌걱 노래가 흘러나왔을 때

같은 이별을 경험한 사람임을 알았다

 

그때 그 버스에 가장 오래 앉은 한 사람은

내가 벗어둔 외투를 챙겨 입고

혹독한 겨울로 무사히 들어갔을까?

 

버스 종점에서만큼은

커피 자판기가 달빛보다 더 환하면 좋겠다

동전을 넣고 손을 넣었을 때

산 짐승의 배 속에서 꺼낸 심장처럼

뜨끈한 것이 손에 잡히면 좋겠다

 

어떤 나라에서는 발이 시리지 않다

어떤 나라에서는 목적 없이 버스를 탄다

그러나 어떤 나라에서는 한없이 걸어야 한다

피로는 크나큰 피로로만 해결할 수 있다

사랑이 특히 그러했다 그래서

 

바깥에 사는 사람은

갈 수 있는 한 더 먼 곳으로 가려 한다

 

                                                        ―김소연

 

【산책】

호모사케르, 법의 바깥에 있는 사람을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바깥 세상에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내부에 있으나 죽여도 되는 무방비 상태에 놓은 사람을 뜻할 뿐이다.

이를 테면 유대인학살이나 난징대학살의 실험대상으로서의 존재 같은.

그때의 실험이 오늘날의 과학과 의학 발전에 이바지했다?

 

그렇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다.

그래서 항상 진실을 아는 것은 고통스럽게 슬프다.

 

바깥에 있는 사람은 춥다.

추운 겨울 길을 걷다가 노천에 무방비 상태로 서 있는 커피자판기를 발견할 때가 있다.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찾는다.

 

이때 동전이 없다면(5만원권 지폐 10장이 있어도 소용없다.)

그때의 동전은 로마시대의 금화보다 더 귀하다.

없기 때문에.

로마 시대의 금화를 내가 어떻게 갖고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 주머니에 동전이 있다면 그때는 정말 할렐루야!

산 짐승의 배 속에서 꺼낸 심장처럼 뜨끈한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사랑의 바깥에 서 본 사람은 안다.

바깥이 얼마나 춥고 쓸쓸한지를.

 

그래서 그 춥고 쓸쓸한 곳을 피해

멀리 달아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가 도달한 곳은 더욱 더 춥고 쓸쓸한

사랑의 바깥일 뿐이다.

 

헐벗은 사랑의 도시, 그 도시에 그가 홀로 살고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