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아르튀르 랭보 <오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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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아르튀르 랭보 <오필리아>

by 브린니 2020. 8. 2.

오필리아 Ophelie *

 

 

1

별들이 잠든 고요하고 검은 물결 위로

하얀 오필리아 한 송이 큰 백합처럼 떠내려간다.

아주 천천히 떠내려간다. 긴 베일 두르고 누운 채로……

―먼 숲에서는 사냥몰이 뿔피리 소리 들린다.

 

슬픈 오필리아, 흰 망령 되어, 검고 긴 강물 위로

떠다니는 세월 천 년이 넘었구나.

그 부드러운 광기가 저녁 산들바람에

연가를 속삭이는 세월 천 년이 넘었구나.

 

바람은 그녀의 젖가슴에 입 맞추며 물결 따라

너울대는 그 넓은 베일들을 꽃부리로 펼쳐낸다.

덜리는 버들가지들이 그녀의 어깨 위에서 울고,

꿈꾸는 그 넓은 이마 위로 갈대들이 휘늘어진다.

 

구겨진 수련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한숨짓는데,

잠든 오리나무 속에서, 그녀가 이따금 어느 둥지를 깨우니,

날개 파닥이는 작은 소리 한 번 새어 나오고.

―신비로운 노래 하나 금빛 별에서 떨어진다.

 

2

오 창백한 오필리아! 눈처럼 아름다워라!

그래, 너는 어린 나이에, 성난 강물에 빠져 죽었지!

―그건 노르웨이의 큰 산맥에서 내려오는 바람이

나직한 목소리로 너에게 가혹한 자유를 속삭였기 때문이니라.

 

한 줄기 바람이, 너의 긴 머리칼 휘감고,

꿈꾸는 너의 정신에 이상한 소리를 몰고 왔기 때문이며,

나무의 탄식과 밤의 한숨 속에서

네 마음이 자연의 노래를 들었기 때문이니라.

 

미친 바다의 목소리가, 거대한 헐떡임으로,

너무 인간적이고 너무 부드러운, 네 어린 가슴 찢었기 때문이며,

4월 어느 날 아침, 어느 창백한 멋진 기사,

어느 가엾은 광인이 네 무릎 위에 말없이 앉았기 때문이니라!

 

하늘이여! 사랑이여! 자유여! 그 무슨 꿈이던가, 오 가엾은 광녀

불 위의 눈송이처럼 너는 그에게 녹아들었구나.

너의 거대한 환영은 네 언어를 목 졸라 죽였도다.

―그리고 무서운 무한이 네 푸른 눈동자를 놀라게 하였도다!

 

3

―그리하여 시인은 말한다, 밤이면 별빛 따라,

너는 네가 꺾어두었던 꽃들을 찾아 나선다고,

물 위에, 긴 베일 두르고 누운 채로, 한 송이 큰 백합처럼,

떠내려가는 하얀 오필리아를 제가 보았노라고.

 

                                              ―아르튀르 랭보 Arthur Rimbaud (프랑스, 1854–1891)

 

*오필리아 :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에 나오는 여주인공의 이름.

*존 에버렛 밀레이(1829~1896)의 작품 <오필리아>는 자신의 아버지가 연인 햄릿에게 살해되자 오필리아가 강물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제작연도 1851~1852년경.

*랭보가 방빌에게 보낸 1870년 5월 24일자 편지에 쓴 시. 밀레이의 그림 <오필리아>에 영감을 받음.

 

 

【산책】

오필리아, 비극의 주인공의 이름으로 잘 어울리는 기막히게 아름다운 이름.

 

부를 때마다 풀피리 소리가 날 것 같은 이름.

바람에 휘파람 소리처럼 날아 갈 것 같은 이름.

부를수록 소멸하는 이름.

오필리아, 이름 그 자체로 초혼이 되는 이름.

햄릿보다 더 아픈 이름 오필리아.

 

자살은 가장 윤리적인 행위다, 라고 라캉이 떠들었던가.

그렇지 않다.

자살은 가장 슬픈 행위이며 그 자체로 진혼곡이다.

 

강물에 뛰어드는 여인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슬픈 사연의 대명사이다.

동양의 여인들은 고무신을 벗어놓고 물에 뛰어드는데

서양의 여인들은 하이힐을 신고 들어가는지 궁금하다.

 

자살은 삶을 포기한 자가 선택하는 어리석은 행위라기보다는

삶이 절정에 도달했을 때 그 뒤로 끝없는 추락이 남았을 때 어쩔 수 없이 추락을 피해 달아나는 안타까운 행위이다.

 

<사랑한다면 이들처럼Le Mari De La Coiffeuse>으로 번역된 프랑스 영화에서 주인공 앙뜨완의 아내 미용사 마리는 요구르트를 사러간다고 말하고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강물에 투신자살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가장 행복한 순간에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말은 가장 행복한 순간이 지나면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뜻이며, 가장 행복한 바로 그 순간에 죽겠다는 말이기도 하다.

 

행복의 절정에서 죽겠다는 그녀의 선택이 과연 옳은지, 윤리적인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그 미학적인 죽음을 따라서 해보겠다고 나서는 일은 정말 어리석다.

 

신성하고 고귀한 것은 더 이상 살 만한 의미도, 가치도 없을 때조차 끝까지 살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예술이나 시는 절정의 찰나, 그 찰나의 아름다움을 포착하기에

가장 행복한 순간, 혹은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자살하는 주인공의 죽음을

숭고하다고 일컫는다.

 

숭고―아름다움을 뛰어넘는 끔찍한 아름다움.

 

밀레이의 유화 <오필리아>에는 그런 아름다움이 언뜻 비친다.

랭보는 오필리아에게 뮤즈의 형상을 입혀 되살려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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