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김소연 <포개어진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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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김소연 <포개어진 의자>

by 브린니 2020. 7. 31.

포개어진 의자

 

 

앉을래?

의자가 의자에게 말했다

서성일래,

의자가 대답한다

 

나무들이 서 있길래

뉘어주려고 폭풍이 들이닥쳤다

우리는 누운 나무를 보며

재앙을 점쳤다

 

잠든 사람의 조금 벌어진 입술이

기어코 천진해질 시간에

 

계절이 바뀌었고

틈을 벌린 채 나무는 새에게

가지를 내어 주기 시작한다

 

의자 하나가 그 곁에 있고

나무의 그림자에서 의자가 쉬고 있다

 

사람들은 스스럼없이

의자에 앉는다

 

아주 잠깐 고달픔을 잊기 위해

찻집 창가에 앉아 있는 여자애에게

기어코 한 남자가 다가가듯이

 

의자가 되면 의자에 앉을 수 없게 된다

사람이 되면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된다

 

의자가 의자에 앉아 본분을 잊는 시간

우리는 재앙을 점치지만

열매처럼 사랑은 떨어져버린다

입을 약간 벌린 채로

 

                                              ―김소연

 

 

【산책】

산책을 떠나는 사람에게도 의자는 매우 소중하다.

어느 길에서 다리를 잠깐 쉴 때 벤치가 있다면 고마울 따름이다.

 

나그네에게 의자는 쉼 그 자체이다.

땅바닥에 널브러져도 그만이지만 약간의 품격이 필요하다.

 

의자에 앉아 땀을 식히고,

멀리 산도, 더 높이 하늘도 보는 것이 필요하다.

걸으면서 내내 땅만 보았을 수도 있으니까.

 

의자는 그 자체로 쉼을 상징한다.

의자가 없는 쉼을 상상할 수 있는가.

의자 하나만으로도 쉼은 풍성해진다.

 

나무 의자.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생각난다.

 

모든 것을 다 주고,

나무의 몸 그 자체를 주는.

그래서 의자가 되는.

 

의자만이 의자에 앉을 수 없지만

의자는 의자에게도 쉼이 될 수 있다.

 

포개어진 의자는 아무도 앉을 수 없기에

포개졌으나 빈 채로 쉴 수 있을 테니까.

 

길을 걷다 보면

큰 나무 아래나 곁에 의자가 있곤 한다.

 

그걸 보면 좀 더 기다렸다가 앉아야 한다.

지금은 의자가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으니까.

 

아름다운 여성이 카페 의자에 앉아 있을 때

아무리 다가가고 싶어도 좀 더, 좀 더, 기다려야 한다.

 

그 아름다운 여성이 충분히 쉼을 누린 뒤에

천천히 다가가 말을 걸면 어떨까.

 

다, 쉬셨나요? 이제 대화를 해도 피곤하지 않으시겠어요.

 

의자가 되면 의자에 앉을 수 없게 된다

사람이 되면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된다

 

약간 슬픈 시 구절이다.

더욱이 사람이 되면 도리어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면

사람이, 사람이 아닌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의자가 의자에 앉아 본분을 잊는 시간

우리는 재앙을 점치지만

열매처럼 사랑은 떨어져버린다

입을 약간 벌린 채로

 

그러므로 사랑에도 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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