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이병률 <몇 번째 봄>
본문 바로가기
독서 리뷰

[명시 산책] 이병률 <몇 번째 봄>

by 브린니 2020. 7. 30.

몇 번째 봄

 

 

나무 아래 칼을 묻어서

동백나무는 저리도 불꽃을 동강동강 쳐내는구나

 

거울 내내 눈을 삼켜서

벚나무는 저리도 종이눈을 뿌리는구나

 

봄에는 전기가 흘러서

고개만 들어도 화들화들 정신이 없구나

 

내 무릎 속에는 의자가 들어 있어

오지도 않는 사람을 기다리느라 앉지를 않는구나

 

                                                            ―이병률

 

【산책】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아니고, 몇 번째인지도 모르는 여러 해 봄,

누군가를 기다린다. 

 

오지 않는 사람,

오지 않을 것 같은 사람,

올 것 같지 않은 사람,

그러나 아직 오지 않은 사람,

그래서 올 사람.

 

봄이 오듯 오는 사람.

오고 있다.

아직 오지 않았을 뿐.

 

그래서 무릎은 앉지 못하고 늘 서 있다.

기다리는 사람은 앉아서 느긋하기 기다릴 수 없다.

언제 올까 노심초사 조바심을 내면서 왔다갔다 서성인다.

창밖을 내다보며 목이 빠진다.

 

봄은 만물이 여러 가지 색과 빛을 낸다.

그 사이에서 고요하게 단 한 사람을,

그것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기란 쉽지 않다.

다른 것에 마음이 뺏기고 설렌다.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기 위해서 봄의 고요가 필요하다.

스프링처럼 튀어오르는 봄을 잠잠히 가라앉히며

흔들림 없는 고요가 마음을 살짝 눌러주어야 한다.

 

봄의 묘사가 아무리 화려해도

섣불리 길에 나가 오지 않는 사람을 마중한답시고 설쳐대서는 안 된다.

앉지 못하는 의자를 놓고 고요하게 기다려야 한다.

오지 않는 그 사람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상상으로 묘사하면서.

 

동백이나 벚꽃이나 지천으로 핀 봄꽃들 사이에서

마음에만 피는 그대 혹은 당신이라는

아직 피지 않은 꽃을.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