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김기택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본문 바로가기
독서 리뷰

[명시 산책] 김기택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by 브린니 2020. 7. 29.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텔레비전을 끄자

풀벌레 소리

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어온다

어둠 속에서 들으니 벌레소리들 환하다

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다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

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

브라운관이 뿜어낸 현란한 빛이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 동안

그 울음소리들은 수 없이 나에게 왔다가

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갔을 것이다

하루살이들처럼 전등에 부딪쳤다가

바닥에 새카맣게 떨어졌을 것이다

크게 밤공기 들이쉬니

허파 속으로 그 소리들이 들어온다

허파도 별빛이 묻어 조금은 환하다

 

                                                    ―김기택

 

【산책】

작은 것들이 아름답다.

아주 작은 틈,

아주 작은 벌레,

아주 작은 풀과 꽃,

아주 작은 소리.

아주 여린 빛.

 

작은 것들은 크고 힘 센 것들을 치워야 보인다.

작은 것들은 크고 높은 것들을 꺼야 들린다.

작은 것들은 비싼 것들을 포기해야 살 수 있다.

 

어둠 속에서 들으니 벌레소리들 환하다

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다

 

소리와 빛의 콜라보, 놀라운 블렌딩!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건물에 틈이 있듯이 소리에도 틈이 있다.

갈래 길이 있다. 통로가 있다.

거대하고 높은 데시벨 사이로 여리고, 작고, 낮은, 침묵에 가까운 소리들이 지나간다.

 

크게 밤공기 들이쉬니

허파 속으로 그 소리들이 들어온다

허파도 별빛이 묻어 조금은 환하다

 

갑자기 생명이 움트는 듯한 느낌이다.

별빛 묻은 허파 어디서 살 수 있습니까?

 

텔레비전을 끄자.

브라운관의 전자파를 피하자.

컴퓨터, 스마트폰 기계들을 잠시 서랍에 넣어두자.

 

그리고 귀 기울이자. 눈여겨 보자.

들리지 않았던 소리가 들려오고, 소리에 묻는 별의 빛깔이 살짝 보인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