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 608
어릴 적의 어느 여름 날
우연히 잡은 풍뎅이의 껍질엔
못으로 긁힌 듯한
깊은 상처의 아문 자국이 있었다
징그러워서
나는 그 풍뎅이를 놓아주었다
나는 이제
만신창이가 된 인간
그리하여 主는
나를 놓아주신다
―김영승
【산책】
주님은 상처가 많은 인간, 죄가 많은 인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오라고 부르신다.
만신창이가 된 인간은 놓아주실까?
너덜너덜 만신창이가 된 인간이라고 포기하실까?
주님은 더 악착같이 그를 좇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내 아들이다, 하고 명명할 것이다.
참 부담스러운 일이다.
자유로운 영혼, 시인에게는 더 더욱 원치 않는 일이다.
제발 나를 좀 내버려둬요, 좀머 씨가 울부짖을 일이다.
만신창이가 되고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는 받아주었다.
만신창이가 될수록 주님은 더 반겨맞으신다?
정말, 뭣 됐다.
놓아줄 줄 알았는데 된통 걸렸다.
이토록 아름다운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어떻게 신께서 버려둘 수 있겠는가.
기다리시오, 시인. 곧 주님께서 부르실 테니.
우연히 잡은 풍뎅이의 껍질에 못으로 긁힌 듯한 깊은 상처의 아문 자국 때문에 놓아주고 만 마음씨 여린 당신,
주님은 당신을 콕 집어서 꼭 잡고 계십니다.
부디,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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