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날
주여, 가을이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놓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풀어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숙케 하여
마지막 단맛이 진한 포도주 속에 스며들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후에도 오래 고독하게 살면서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레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Rainer Maria Rilke
가을의 기도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홀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 지나
마른 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김현승
【산책】
뜨거운 열정을 불태운 여름이 지나고 나면 가을은 서늘한 그리움과 헛헛함, 그리고 살아낸 시간에 대한 회한이 주는 고요가 있습니다.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남은 “이틀만 더” 주어진다면 “마지막 단맛”을 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할 것입니다.
“완숙”함을 향하여 나아가는 길은 젊음과 푸르름이 바래어 “낙엽들이 지는” 길입니다. 비로소 그때에야 자기를 내세우던 모든 긍지와 자부심과 솟구치던 야망이 땅으로 떨어지며 “겸허한" 언어로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길었던 여름의 꿈들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집이 없는 사람”도 더 이상 집을 꿈꾸지 않는 고독한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남은 시간은 짧기에 잠들 수 없습니다. “진한” 포도주로 남기 위해서는 어서 읽고 어서 써야 합니다.
푸르던 잎이 갈색으로 바삭 부서지는 것처럼, 빛이 바래고 부서져 흩어지는 꿈의 편린들 속에서 “불안스레 이리저리 헤매는” 가을의 쓸쓸함, 그러나 그 시간이 가장 달고 진한 완숙의 시간임을 깨닫습니다.
가을의 역설은 “홀로” 있으나 “오직 한 사람”만을 택해 사랑함으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비옥한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홀로” 있는 사람만이 “오직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극도의 고독은 절대적이고 지고지순한 사랑을 만들어내는 비옥한 토양이니까요.
여름을 지나 가을로 들어선 “영혼”은 태양을 향해 뜨겁게 몸부림치던 여름의 손아귀에 힘을 풀어 조용히 자신을 내려놓습니다. 삶의 질곡과 부조리한 골짜기들을 지나던 모든 순간들은 고통의 짠맛으로 신음했으나 사실은 영혼이 “백합”으로 고결하게 피어나는 순간이었음을 깨닫습니다.
한계없이 무성하게 피어오르던 푸른 잎의 꿈들은 다 떨어지고 앙상하게 “마른 가지”와 같은 인생의 가을, 문득 자신의 모습이 검은 “까마귀”와 같음을 발견합니다.
앙상하고 마르고 볼품없는 모습으로 나타나 손가락질을 받고 죄의 저주를 한몸에 받았던 유대땅의 예수처럼 불길한 흉조의 시커먼 모습으로 마른 가지 위에 앉아 누군가의 죄의 죽음을 대신 죽어줄 준비가 된 자의 영혼으로 변화됩니다.
가장 숭고한 영혼의 모습은, 누가 봐도 영광스러운 공작새나 한 점 티 없이 순결한 백조나 고고하여 다가갈 수 없이 대쪽 같은 학이 아니라 흉흉하여 돌멩이에 얻어맞을까 두려운 시커먼 까마귀였음을 깨닫는 계절, 가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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