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장정일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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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장정일 <시집>

by 브린니 2020. 7. 25.

시집

 

시로 덮인 한 권의 책

아무런 쓸모없는, 주식 시세나

운동 경기에 대하여, 한 줄의 주말 방송프로도

소개되지 않은 이따위 엉터리의.

또는, 너무 뻣뻣하여 화장지로조차

쓸 수 없는 재생 불능의 종이 뭉치.

무엇보다도, 전혀 달콤하지 않은 그 점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시로 덮인 한 권의 책, 이 지상엔

그런 애매모호한 경전이 있는 것이다.

그 어떤 신을 위해서랄 것도 없는.

하지만 누가 정사에 바쁜 제 무릎

위에 얄팍하게 거만 떠는

무거운 페이지를 올려놓는다는 말인가?

 

그래, 누가 시집을 펼쳐 들까

이제 막 연애를 배우는 어린 소녀들이,

중동에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쓰는,

아니라면 장서를 모으는 수집가의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뒷장을 열어 출판 연도를 살펴볼까?

양미간을 커튼같이 모으며 이것

굉장하군! 감탄하는

 

끈끈한 조사와 형용사로 단어와 단어 사이를

교묘히 풀칠하는 당신의 시.

그따위 것을 누가 찾아 읊조린단 말인가

절정의 순간에 한 줄의 엘리엇을 읽어주어야만

만족해하는 성도착증의

젊은 부인을 위해? 혹은

강단에서 시를 해석하는 문법학자의

조심스레 미끄러지는 입술에서나

그것은 팽개쳐질까. 아무런 열의도 없이

이해하겠어요, 이 작가의 콤플렉스를?

지루하게 외쳐대는 오후의 강의 시간에나

 

시인과 시인이 맞붙어 싸우는 이

암호부호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두터운

안경을 맞추어야 할까. 그리고 얼마나

마음 멍청하면 사게 되는 것이냐, 아무리 찾아도

국립극장 초대권 하나 붙어 있지 않은 것은

이 한권의 책을. 놔둬 버리지

서점의 제일 높은 판매대에 꽂혀

먼지가 만지도록 그냥, 놔둬 버리지

제일 아래쪽 밀대가 지나다니며

까맣게 구정물이 먹도록. 구석을 찾아

이리저리 천대받도록 그렇게 놔둬

버리지. 이따위, 엉터리의

 

                                                        ―장정일

 

 

【산책】

그러게, 왜 이따위 시를 쓰고, 또 시집을 출판하고, 그런데 왜 당신은 시집을 돈 주고 사는가.

그리고 지금 여기서 명시 산책을 읽고 있는 것인가.

인터넷의 바다에서는 대부분 정보를 검색하고 빠르게 페이지에서 빠져 나간다.

블로그에서 시를 읽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시를 좋아하는 사람?

시가 짧아서 빨리 읽기 좋아서?

시를 좋아하지만 시집을 사고 싶지는 않은 사람?

 

우리나라에 시를 쓰고, 시를 읽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

신기한 일이다.

신춘문예에 십만명 이상 응모한다고 한다.

어쨌든 시는 짧다는 특징, 장점을 갖고 있다.

그래서 사랑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짧지만 언어의 매력, 마력이 가득하고, 그것으로 독자를 유혹한다.

 

시집에는 아무런 정보도 없다.

하지만 인생도 있고, 인생의 감동이 있다.

그래서 시로 덮인 시집은 가끔 팔린다.

서점 한 모퉁이에 천덕꾸러기처럼 자리 잡고 있지만

확실한 존재감을 갖고 있다.

시집이 없는 서점은 없다.

시집이 없는 도서관도 없다.

북카페에도 시집 몇 권은 있기 마련이다.

당당히,

당당히?

 

세상에서 시인을 추방해야 한다고 소리친 철학자, 정치가도 있었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시인은 존재하고, 시를 쓰고, 시집이 세상에 나온다.

 

왜냐고?

 

지구에 사람이 살고,

사람의 인생이 계속되고,

인생의 깊이와 인생의 파란만장함과 인생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이 있을 뿐만 아니라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위로해줄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시가 인생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말의 도구라고 한다면 어떤가.

 

사람이 사는 한 시는 살아 있다.

시집은 요즘 얼마에 팔리는가.

시인의 밥법이와는 전혀 무관한 값에 시집이 가끔 한두 권씩 팔린다.

다행이다!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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