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잉게보르크 바하만 <유예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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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잉게보르크 바하만 <유예된 시간>

by 브린니 2020. 7. 24.

유예된 시간

 

     

보다 혹독한 날들이 다가오고 있다.

판결의 파기로 유예된 시간이 지평선에 보이게 되리라.

이제 곧 그대는 구두끈을 조여 매고 개들을 늪지로 쫓아버려야 한다.

물고기의 내장들은 바람을 맞아 차갑게 식어버렸으니

초라하게 루우핀의 빛이 타오르고 있다.

그대의 시선이 안개 속에 궤적을 남기니,

판결의 파기로 유예된 시간이 지평선에 보이게 되리라.

저편에서 그대의 연인이 모래에 묻혀 가라앉고 있다.

모래는 그녀의 나부끼는 머리칼까지 솟아오르고,

모래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아 침묵하라고 명령한다.

모래는 그녀가 죽어가고 있음을,

모든 포옹 후 기꺼이 이별을 감수하고 있음을 보고 있다.

뒤돌아보지 말라.

그대의 구두끈을 조여 매라.

개들을 쫓아 보내라.

물고기를 바다 속에 던져 버려라.

루우핀의 빛을 꺼버려라!

보다 혹독한 날들이 다가오고 있다.

 

                           ―잉게보르크 바하만 Ingeborg Bachmann (오스트리아 1926―1973)

 

 

【산책】

잠깐 멈춘 시간,

뱀의 아가리 앞에 놓인 개구리의 침 넣기는 시간 혹은 뱀의 혀놀림의 시간,

빌린 돈 대신 빌려 받은 시간,

판결이나 집행이 미뤄진 시간,

유예, 감시받는 시간, 누군가 지켜보는 시간,

시험당하는 시간,

등등.

 

유예된 시간은 해방의 시간이 아니라 불안하고 초조하며 도리어 유예의 끝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유예가 풀리고, 해방과 자유 얻기를 갈망하는 시간이다.

두려움보다는 불안의 시간. 기다림으로 초조한 시간이다.

유예된 시간은 안개의 시간이다.

 

유예된 시간 중에 가장 희한한 사건이 있다.

태양이 한 곳에 멈춰 하루의 시간이 24시간을 넘긴 적이 있었다.

 

구약성서에서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던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는 아모리 족속과 싸우는데 해가 모자라 적들이 도망가 숨을 시간을 벌게 된 것이다. 이때 여호수아는 태양에게 머물라고 소리친다. 달도 제자리에 멈추라고 명령한다.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춘 시간 동안 즉, 날이 밝은 동안 여호수아의 군대는 적들을 섬멸한다.(여호수아 10:12-13)

유예된 시간은 적들에게 죽음의 시간이었다.

 

이혼을 원하는 부부들에게도 유예된 시간이 있다.

법원에서는 4주 동안의 유예 기간 동안 마음이 바뀌길 기다린다.

 

유예된 기간 동안 부부들은 다시 사랑을 회복할 수 있을까.

4주 동안 그들은 부부인가, 아닌가.

 

유예된 시간 동안 그들은 부부가 아니라 연인으로 돌아가 옛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나 과거로 돌아간다는 것은 미래의 희망보다 더 힘든 일이다.

깨어진 사랑은 깨어질 때 한 번, 다시 붙이려 할 때 또 한 번 상처를 입는다.

고통에 고통을 더 한다.

 

혹독한 날들은 유예의 끝에 오는가.

이 유예의 시간보다 더 혹독한 날들이 있는가.

 

끝을 알 수 없는, 만질 수 없는 안개의 시간, 막연한 기다림과 공허의 시간

이 시간보다 더 처절한 시간이 또 있는가.

 

슬픔도 눈물도 없지만 결과도 과정도 아닌 시간

단절도 지속도 아닌 시간

시간의 중간의 틈, 깊은 구렁,

있으나 없는 시간,

결국 아무것도 아닌 시간.

 

판결도 집행도 없는 중간의 시간,

경제학자는 이 시간을 수익으로 잡을 것인가.

손익계산을!

 

없던 시간을 벌었으니 플러스인가.

없어도 될 시간을 살고 있으니 마이너스인가.

 

어차피 인간이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가고 있으니

삶의 시간은 죽음의 시간이며

삶이란 결국 죽음까지 가는 유예된 시간이다.

죽음의 집행을 미루면서.

 

아, 더 혹독한 날이란 죽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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