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연재] 진짜 교회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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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

[장편소설 연재] 진짜 교회 (10)

by 브린니 2020. 8. 8.

진짜 교회

 

 

 

6. 1 돈에 대하여

 

날이 밝자 김영수 목사는 느헤미야 형제의 출판사를 찾았다. 느헤미야 형제에게 총회 차원에서 회개하는 모습을 공개적으로 보이기로 했다고 전했다. 느헤미야 형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우리가 또 회개할 것이 무엇입니까?”

김영수 목사가 물었다.

 

“우리의 삶 전부이겠죠.”

느헤미야 형제가 대꾸했다.

 

두 사람은 잠시 생각에 잠기면서 차를 마셨다.

 

“목사님, 십일조를 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시죠?”

형제가 대뜸 물었다.

 

“그렇지요.”

“그럼 목사님은 십일조를 잘 하고 계시겠죠?”

 

“네,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제대로 하고 계시나요?”

 

“그렇습니다.”

“도서비, 심방비, 활동비, 출장비, 회의비 등에서도 십일조를 구별하시나요?”

 

“그것은 사례비에 포함되지 않는 경비이고, 제가 직접 수령하지도 않기 때문에 십일조를 내지 않습니다. 저는 책을 사고 난 뒤 도서비를 청구합니다. 다른 경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먼저 쓰고 난 뒤 그것을 청구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은 그야말로 경비로 모두 지출되는 셈이군요.”

 

“그렇습니다.”

“목사님 교회는 좋은 재정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목회자에게 도서비와 기타 경비들을 일괄 지급하는 교회도 있을 테지요.”

“목사님이 섬기시는 교회도 몇 년 전까지 그렇게 하지 않았나요?”

 

“네. 그랬습니다.”

“그럼 그 모든 경비에 영수증을 첨부해 결산하셨나요?”

 

“아닙니다. 그냥 경비를 수령해서 은혜롭게 사용했습니다.”

“목사님 교회도 목회자에게 도서비나 목회비 등 경비를 일괄 지급했고, 영수증을 받지 않았습니다. 과연 목회자는 그 경비들을 전액 다 사용했을까요?”

 

“남았을 수도 혹 모자랐을 수도 있었겠죠.”

“모자랐다고요? 만약 모자랐다면 더 청구하지 않았을까요?”

 

“물론 청구했겠지만 교회가 재정이 넉넉하지 못했다면 어쩔 수 없었겠죠.”

“목사님, 저는 지금 미자립 교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도서비나 기타 경비를 충분히 지불할 수 있는 교회를 모델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경비를 지급했지만 영수증을 받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목회자들이 쓰고 남은 경비를 교회에 반납했나요?”

 

“그런 경우는 거의 없을 듯 합니다. 저도 그랬고요.”

“그럼 몇 년 전까지 대부분의 교회와 목회자들은 경비를 일괄 지급, 수령했으며 거기에 대해서는 영수증 처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목회자들이 그 돈을 자유롭게 썼지만 경비였으므로 십일조를 내지 않았고요. 맞습니까?”

 

“네.”

“그럼 마지막 문제만 남았군요. 목회자들은 그 경비를 항목에 맞게 적절하게 사용했습니까? 항목에는 맞지 않더라도 전액 다 경비로 사용했습니까?”

 

“그것은 경우에 따라 다르겠죠. 월별로도 다를 테고요.”

“아까 우리는 경비가 모자랐다면 재청구를 했을 거라는 데 동의했습니다. 목회자가 경비를 일괄 수령했으나 온전히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 돈은 남았을 것이고, 남은 돈을 개인적인 곳에 사용했거나 저축을 했다면 그것은 세상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횡령에 해당하지 않을까요?”

 

“횡령이라고요?”

“경비에 대해 재청구가 없었다면 딱 맞게 썼거나 남았다는 뜻이며, 남은 돈을 반납하지 않았다면 사사로이 사용한 것인데 이것은 세상적인 기준으로는 공금 유용입니다. 횡령까지는 아니더라도. 제가 법을 잘 몰라도 이건 상식 아닐까요?”

 

“그렇다고밖에 할 수 없겠군요.”

“그럼 목사님 역시 몇 년 전까지 교회에서 목회자에게 지급한 경비 중 일부를 사사로이 유용한 것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겠군요.”

 

“따지고 보니 그렇군요.”

“저는 이단들이 하도 설치는 바람에 우리 교회들이 재정적으로 깨끗해진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들이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 재정적인 비리를 캐고 다녔기에 교회 재정이 예전보다 투명해진 것이 사실이니까요.”

 

“인정합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시대의 선지자와 제사장 역시 탐욕을 부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십일조에 대해 말씀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목회자가 돈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에 점검하려는 것입니다. 경비 처리 문제는 예로 든 것이고요.

 

어려운 시절 이 땅의 목회자들은 전 재산을 바쳤을 뿐만 아니라 목숨을 바쳐 주의 일을 담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예인 우리는 선배들의 열매를 따먹기만 했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온 지 100년을 전후로 목회자의 길을 걷는 2세대, 3세대 목회자들은 가만히 앉아서 선배들이 일구어놓은 땅의 열매만 따먹으면서 농사는 지을 줄 모르고, 심지어 토양까지 황폐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땀 흘려 번 돈으로 낸 헌금을 사사로이 유용하고도 당연히 받아야 할 사례비로 생각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현재 우리 교회는 세상의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형교회 목사들의 연봉이 수억 원대인 것도 모자라 각종 경비 명목으로 엄청난 교회 재정이 낭비되고 있는데도 회개할 거리를 찾지 못하는 게 우리 교회의 실정입니다. 어느 정도 재정을 자립하고 있는 중소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에게 들어가는 돈은 교회 재정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목회자가 생활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교회에서 책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칩시다. 다만 성경적 기준에 맞게 적정한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목회자도 다른 직업이 있어야 한다고 믿지만 말입니다.

 

목사가 삯군이 아니라 선한 목자라면 전 재산을 바치거나 목숨을 잃더라도 그것은 오로지 주님과 성도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늘어나고 교회 규모가 커졌다고 났다고 해서 거기에 따라 배당금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포도원에서 일한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침부터 일한 자도 1데나리온, 저녁 늦게부터 일한 자도 1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지금 목회자들에게 적용해봅시다. 양떼가 많은 자도 1데나리온, 양떼가 적은 자도 1데나리온이 맞지 않겠습니까. 그 비유의 참뜻은 누구든 주의 일을 맡은 자는 일의 크기나 경중에 상관없이 똑같은 상급을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까?

 

무디 선생과 빌리 그래함이나 김영수 목사님이 천국에서 각기 차이나는 상급을 받을까요? 모두 다 주의 종이니 천국 잔치에 참석해 같은 기쁨을 누리지 않겠습니까? 목사님과 개척교회 목사가 천국에서 다른 대접을 받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도리어 열악한 곳에서 선교하다가 핍박자들에게 죽임을 당한 순교자가 목사님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는다면 이해가 됩니다. 그는 이 땅에서 아무런 상급도 받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나 목사님과 같은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천국에 가면 주님께서 너희들은 이 땅에서 이미 충분한 상급을 받았으니 더 이상 줄 것이 없다고 말하시지 않겠습니까?”

 

김영수 목사는 또 다시 기가 막히고 가슴이 답답하고 말문이 막혔다.

 

“그것이 그렇게 심각한 것일까요? 주님께서 심판하실 때 저에게 아무 상급도 없다고 말씀하실까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다 주님께서 판단하실 테지요. 다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권능을 행한 자들이 모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저는 다만 우리의 행위를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개척교회 시절 교회에서 잔치하고 남은 음식을 집에 싸가서 먹으면 꼭 배탈이 났다고 합니다. 그 뒤로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답니다. 하나님의 것과 자기 것을 엄격하게 구별한 것이지요. 최소한 교회에서 받는 사례나 경비는 모두 주의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주의 뜻에 합당하게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나 교회의 재정을 맡은 자 모두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돈에 대하여 떳떳하지 못하다면 하나님과 물질을 겸하여 섬기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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