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소설 연재] 진짜 교회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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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

[장편 소설 연재] 진짜 교회 (7)

by 브린니 2020. 8. 1.

진짜 교회

 

 

 

 

4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

 

김 목사는 차를 몰아 목양실로 돌아왔다. 서재와 연결된 기도소로 들어가 무릎을 꿇었다. 뭔가 응답을 원하는 기도 제목이 있으면 늘 이곳으로 왔었다. 그러나 아무런 주제도 없이 그냥 이곳에 들어온 적도 많았다. 주위에 아무도 없이 혼자 쉬고 싶을 때 이곳에 오면 마음이 편했다. 주님 안에서 안식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다리를 펴고 벽에 기댔다. 그는 벽에 걸린 십자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주여,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느헤미야 형제로부터 매번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갑자기 자기도 알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본 것 같았다. 자기도 모르게 감추고 살았던 마음속의 야망을 들킨 것 같기도 했다. 목회 40년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느낌을 견딜 수 없었다. 이제까지 목회한 것이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리스도와는 상관없는 일을 해온 것이었다니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목사의 양심을 걸고 솔직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있었다. 그가 자신의 목회 마지막 3년을 걱정했지만 그것은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거기엔 그리스도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다. 언젠가부터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내 교회, 내 사역, 내 목회, 내 양떼. 사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었다. 내 존재, 내 전부를 주께 바치겠다고 시작한 목회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은퇴를 앞둔 지금 그가 걱정하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과 자신의 목회뿐이지 않는가. 아,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김 목사는 서재로 돌아왔지만 생각을 정리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소파에 깊이 몸을 묻었다. 불과 몇 시간 동안 자신이 쌓아올렸던 목회의 업적 따위는 모두 날아갔거나 허물어져 버린 것 같았다. 부서진 잔해들을 긁어모아 다시 세우려고 한들 아무 소용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곧 열리는 브라질 선교대회가 걱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브라질 3개 도시에 지교회 10곳을 세웠고, 이번에 3개 도시 교회들이 연합해서 대규모 집회를 열기로 한 것이다. 거기서 그는 공로패를 수여받기로 되어 있으며, 2개 도시에 새로 교회를 건축하는 시공식에도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는 1년 동안 브라질에 체류하면서 파라과이와 볼리비아, 베네주엘라 지역교회들을 돌아볼 예정이었다. 그 지역에도 2곳 이상의 지교회들이 있었다.

 

그는 선교에 열정을 다 바쳤다. 그는 선교지에 어떤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았고, 전적으로 선교사들에게 맡겼다. 그는 지교회들을 다스리고 지배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곳은 우리나라 교회와 달리 부흥기에 있었고,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1970년대, 80년대까지 우리 교회들은 열심히 전도했고, 목숨 걸고 그리스도를 전했다. 그리스도만이 생명의 전부로 여겼다. 우리는 가난했으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고, 아는 것도 없었다. 그저 예수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다른 꿈이나 야망 따위는 없었다. 일본의 압제가 끝났지만 전쟁으로 다시 폐허가 된 땅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은 희망을 갖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잘 살아보겠다는 삶에 대한 의지 위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부어졌다. 거듭난다는 것이 영적인 의미만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두 번째 인생을 살기 위해 도시로 몰려들었고, 교회를 찾아들었다. 새벽마다 기도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굳이 전도하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되었다. 술과 도박으로 삶을 내팽개칠 생각이 없는 건전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인생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는 길을 예수뿐이라고 믿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지런했으며 바르게 살았다. 죄를 짓고 와서는 눈물 콧물을 흘리며 울면서 회개했다. 은혜가 넘쳤고, 성령의 은사가 곳곳에서 나타났다. 삶이 변하기 시작했다.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고, 가난했던 살림살이가 부요해졌다.

 

이러한 부흥은 80년대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90년대에는 교회가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부요한 삶에 만족하지 않고, 영적으로 경건하기 위한 갖가지 프로그램이 계발되었다. 영성훈련이나 묵상, 큐티 모임이 생겼고, 교회마다 제자훈련을 했다. 성경공부에 대한 열망이 커졌고, 각종 신앙서적들도 많은 부수가 팔렸다.

 

그러나 21세기는 오히려 희망보다 교회의 쇠퇴를 가져왔다. 1997년과 98년부터 구제금융이 시작되는 바람에 많은 가정이 파괴되고, 삶의 터전이 붕괴되었다. 사이비 집단들은 1999년 종말을 더 소리 높여 외쳤고, 밀레니엄이 오면 컴퓨터 서버가 정지하고, 종말이 닥칠 것이라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새로운 세기는 걱정과 기대가 교차했지만 교회는 영적으로 쇠퇴하는 쪽으로 돌아서고 말았다.

 

현재 신도 수는 거의 반으로 줄었고, 특히 이십대 이하 그리스도인의 비율은 5%대를 밑돌고 있다. 이삼십 년 뒤에는 많은 교회가 문을 닫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영적인 상태는 물론이고, 교회 경제도 무너질 것이라며 두려워하고 있다. 특히 성도 수는 급감하는데 교회마다 은행 빚으로 성전을 크게 확장하는 바람에 대출금을 상환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며 많은 교회들이 빚더미 위에 앉아 아우성칠지도 모른다는 예측이다.

 

느헤미야 형제가 교회문제가 경제문제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 이런 문제 때문이었던가. 우리가 지끔까지 목회한 것이 그저 교회 세우고 건축하고, 또 다시 더 크게 건축하기 위해 성장을 외치며 성도들을 몰아세웠던 것에 불과하단 말인가. 교회를 건축하지 못하면 도태되고, 교회를 멋지게 건축하고 교인들을 위한 복지를 잘 갖추면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성공적인 교회라고 믿게 만들었을 뿐이란 말인가.    

 

사실 현재 미자립 교회가 우리나라 교회 전체의 90%에 이른다. 그러나 대형교회는 작은 교회들을 돌아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점점 더 개교회중심으로 흐르고 있다.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고 외칠 뿐 대안은 없다. 이런 저런 의견들이 나오지만 이미 있었던 개혁들을 반복하는 수준이다.

 

지금 사태를 한순간에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은 하나님이 주시는 부흥뿐이다. 그러나 부흥을 기대하며 기도하고는 있지만 우리나라에 다시금 강력한 부흥이 올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고 있으며, 무엇을 회개해야 할지도 모르고 있다. 그도 얼마 전까지 자기 목회의 자랑거리를 세고 있지 않았는가.

 

느헤미야 형제가 저렇게 당당하게 외치는 것을 보면 뭔가 다른 대책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학자나 목사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해답을 찾은 것은 아닐까. 러시아에서 대륙간 열차를 세울 때처럼 단 한 획을 그음으로써 열차 전 구간을 통일성 있게 만든 것처럼. 느헤미야 형제에게 대안이 있느냐고 물어보면 대안보다 지금의 문제를 더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며 나를 몰아세우겠지. 더이상 치부를 들추기는 싫은데. 그저 빨리 대안이나 알려주었으면. 문제를 회피하는 게 지금 우리의 가장 큰 문제일지도 모르겠지만.

 

두통이 몰려왔다. 이번 주에는 무엇을 설교할지 벌써부터 가슴이 먹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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