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연재] 진짜 교회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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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

[장편소설 연재] 진짜 교회 (5)

by 브린니 2020. 7. 30.

 

 

진짜 교회

 

 

3 대화

 

 

 

김영수 목사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교회들을 차례대로 돌아보았다. 주일 저녁예배나 수요집회, 금요철야예배, 새벽기도까지 시간이 나는 대로 여러 교회들에서 예배를 드렸다. 자신의 선입견이나 편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스도의 생명이 흘러넘치고 있다고 느껴지는 교회가 거의 없었다. 그저 시간에 맞춰 예배라는 형식을 잘 이행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자신이 섬기는 교회가 다른 교회의 상황보다 조금 낫구나 하는 교만한 마음이 들 뿐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자신이 섬기고 있는 교회는 어떤 모습일지 정말 궁금했다. 김영수 목사는 다시 느헤미야 형제를 찾을 수밖에 없다. 이제는 거의 월요일마다 형제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우리나라 교회가 타락했고, 대형교회가 문제의 주범이고, 그 책임의 반 이상은 목회자에게 있다고들 합니다. 목사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느헤미야 형제가 김영수 목사의 생각이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대형교회 자체가 문제일까요? 사실 대형교회만큼 선교하고, 구제하고, 봉사하는 일에 초대교회를 닮은 데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는 대형교회에 더 있을지도 모릅니다. 성경공부에도 열심이고, 기도에도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형교회에는 은혜가 넘치는데 다른 데서는 은혜를 찾을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네? 그게 왜 문제인가요? 교회에 은혜가 넘치는 것은 좋은 것이고, 다른 교회가 그렇지 못한 것이 왜 대형교회의 문제입니까?”

“대형교회가 은혜를 독점하기 때문이지요.”

 

“네? 이것이 무슨 경제 문제입니까?”

“다르지 않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교회가 대형교회로 성장하면서, 대형교회로 성장한 교회만이 하나님이 특별히 역사하시는 교회라고 믿게 만든 것이 문제입니다. 대형교회 목사가 목회에 성공한 목사이므로 다른 작은 교회 목사들보다 더 신령한 목사로 여기도록 만든 게 문제입니다. 대형교회의 예배의식이 예배의 모델이 되고, 대형교회의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이 마치 모든 교회들이 따라서 해야 하는 것처럼 된 것이 문제입니다. 대형교회 목사의 설교가 가장 좋은 설교의 모범이 된 것이 문제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만약 누군가 죄를 지었다면 그 사람 개인의 문제이고, 개교회가 각각 자기 교회를 책임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엄밀히 말하면 각자 책임져야 할 개교회란 없습니다. 모두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이론상으로 그렇지요. 아무튼 저와 같은 대형교회 목사들은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 애쓴 것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문제란 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목사님들이 열심히 교회를 성장시켰다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뭐라고요?”

“교회 성장이 곧 부흥이라고 믿게 만든 게 문제라는 것이지요.”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부흥은 하나님의 통치가 해당 지역 전역에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형교회가 있는 지역은 타락하고 죄가 만연한데 교회만 성장하면 그것이 부흥이라고 가르치니 문제라는 것입니다.”

 

김영수 목사는 말문이 막혔다. 대형교회가 서 있는 지역은 타락했고, 죄가 만연하다는 말에는 뭐라고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지역에 교회가 서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요?”

“죄악이 만연한 세상 한복판에 교회가 서 있으니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이란 말씀인가요? 과연 그럴까요?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인데 교회가 과연 거룩하다면 그 지역이 그렇게 타락할 수 있을까요? 그 지역에 죄가 관영할 수 있을까요?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가 최소한 그 주변을 변화시키지 않았을까요?”

 

“지금 교회는 세상과 지난한 영적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잠자고 있습니다. 교회는 먹고 마시며 배를 두드리고 있습니다. 전혀 세상과 죄와 싸우고 있지 않습니다. 성전을 화려하고 크게 짓고 예배나 성경공부, 전도대회나 제자 훈련 같은 종교의식에 지나치게 열심을 내는 바람에 백성들의 상처를 돌보지 않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상처를 돌보지 않다니요.”

“대형교회는 사데 교회와 같습니다. 정말 살아 있는데 사실은 죽어 있습니다. 죽어 가는 영혼들은 대형교회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정말 살만한 사람들만 나오니까요.”

 

“정말 무슨 말씀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대형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명목 하에 궁전 같은 성전을 짓고, 화려한 성가대, 경건한 의식으로 가득 찬 예배, 영적 지식을 높이기 위한 성경공부와 각종 제자 훈련과 리더십 교육에 열을 올렸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갖가지 프로그램과 행사에 동원된 성도들의 영혼은 쇠약해져 갔습니다. 제자 훈련과 리더십 교육으로 만들어진 제자와 리더들이 지금 과연 진짜 제자와 리더가 되었습니까? 그런 성전을 짓기 위해 아낌없이 헌금하고 각종 훈련과 교육에 시간을 바치고, 교회의 관리와 운영과 행사에 적극 헌신과 봉사했던 성도들을 보십시오. 우리에게 참 평안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이 넘칩니까? 우리가 정말 경건하고 거룩합니까? 우리가 죄를 이깁니까? 우리가 정말 이웃을 사랑합니까? 교회가 교회 성장과 그 성장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성도들을 다그쳐서 만들어낸 것이 무엇입니까? 성도들이 곧 교회인데 교회는 건물과 제도와 조직이 차지하고 성도들은 그것을 유지하는 데 도구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성도간의 깊은 교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들이 백성들의 상처를 돌보지 않는 것이란 말입니까? 예를 들어 제자 양육 프로그램이 사실상 성도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까?”

“그것을 왜 실시하느냐고 문제입니다. 그런 프로그램들이 궁극적으로 교회 성장에 이바지하기 때문에 실시하는 것 아닙니까? 만약 교회 성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교회 중 몇 교회나 제자 훈련을 실시하겠습니까?”

 

김영수 목사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처음 시작할 때는 정말 순수하게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네, 제자 훈련을 처음 시행했던 교회나 목회자는 그랬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델이 되고, 브랜드가 되고, 교회 성장에 이바지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제자 훈련이 아닙니다. 그것은 처음 시작하신 분 가운데 한 분이 제자 훈련이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까? 왜일까요? 제자는 교회 프로그램이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자란 그리스도처럼 사는 자를 말하니까요. 어떤 훈련코스를 이수했다고 해서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김영수 목사는 느헤미야 형제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형제는 교회의 모든 활동들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반박할 말도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김 목사는 한숨을 내뱉듯 물었다.

 

“이삼십년, 아니 10년 안에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대형교회들은 더 확장되거나 최소한 현재 상태를 유지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것이 문제입니까. 교회가 문을 닫게 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나마 우리 같은 대형교회가 든든히 서 있다는 것은 다행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대형교회가 빨리 문을 닫는다면 많은 교회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돌아올 것입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씀만 하시는군요.”

“대형교회는 우리 사회의 모순과 같습니다. 대기업이 부를 독식하고, 그 부스러기를 중소기업에 조금 나누어주고 있고, 많은 시민들도 대기업의 부에 의존해 가정 경제를 꾸려갑니다. 대기업이 휘청하면, 중소기업은 물론이고, 시민 경제도 어려워집니다. 국가 경제도 마찬가지지요.”

 

“네. 그것이 우리 경제 현실이지요.”

“그럼 목사님은 현재 우리 경제가 건전하다고 보십니까?”

 

“건전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어찌하겠습니까. 대기업에 부가 집중되고 있는 것은 현실이지만 현재로서는 다른 대안도 없지 않습니까?”

“네, 그래서 대기업이 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해야만 우리나라 경제가 살아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기업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기업 위주의 경제는 결코 바람직한 구조가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화려한 궁전에서 밤마다 파티를 즐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지적은 많이 있지요.”

“그렇다면 대형교회가 성장할수록 작은 교회들이 죽는다는 의견에 동의하십니까?”

 

“글쎄요. 그건 좀…….”

“대형교회 때문에 개척이 잘 안 되는 현상은 인정하시나요?”

 

“어느 정도 그런 면이 있다고 봅니다. 사람들이 개척교회에 나가면 앞으로 성전을 지어야 하기 때문에 경제적인 부담이 있게 될 거라고 지레 겁을 먹고 피하니까요.”

“네, 그런데 왜 그런 현상이 생기게 된 것일까요?”

 

“글쎄요.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현상이 생긴 것이 사실이지요. 안타깝지만…….”

“그것이 바로 대형교회가 우리나라 교회의 모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왜 개척교회에 나가길 꺼립니까. 첫째는 교회 건축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개척교회는 교회를 건축해야 합니까? 어서 빨리 부흥해서 대형교회처럼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목사도 노회나 총회에서 대접받고, 지역에서도 인정받으니까요. 성도들 역시 나 이런 교회 나간다고 가오를 잡을 수 있으니까요. 이게 다 대형교회가 모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형제가 미리 결론 내고 꿰맞추는 게 아닐까요?”

“아닙니다. 둘째 문제는 더 현실적입니다.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대형교회가 있습니다. 외국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 설교를 잘한다고 소문난 목사님이 있고, 멋진 성전이 있고, 정말 감동을 주는 성가대가 있고, 심지어 복지 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예배 후 차를 마시고 교제하는 것은 물론이고, 수영도 즐길 수 있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걸어서 3분 거리에 지저분한 골목 빌딩 3층에, 아니면 지하에 작은 개척교회가 있습니다. 목사님이라면 어느 곳으로 예배드리러 가시겠습니까?”

 

“저 역시 30분 거리에 있는 큰 교회를 찾아갈 가능성이 높겠군요.”

“그렇습니다. 좁고 열악한 장소에서 힘겹게 예배드리고, 예배 후에는 차 한 잔 마시며 교제를 나눌 만한 장소도 없고, 목사님의 설교도 그저 그렇고, 성가대도 제대로 없거나 화음도 잘 못 맞춘다면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대형교회는 이런 것들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으니까요. 재래시장은 죽고 큰 마트가 인기를 끌 듯 우리 교회도 그런 형국입니다.”

 

“그것 역시 이 시대의 흐름이지 대형교회의 책임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역사에는 반드시 쇠퇴기가 있습니다. 그것이 언제인지 아십니까?”

 

“나라가 가장 왕성한 뒤에는 쇠퇴가 왔었지요.”

“그렇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영화 뒤에 왕국은 분열되었고, 다시 그 영화를 되찾지 못한 채 분열한 왕국 모두 멸망했습니다.”

 

“그럼 교회도 성장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성장해서는 안 됩니다.”

 

“도대체 형제는 무슨 말을 하는 것입니까?”

“최소한 이렇게 커져서는 안 됩니다. 이런 식으로 성장하려면 성장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렇게 되려고 한 것입니까? 정말 주를 위해 일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성장했습니다. 그뿐이지 않습니까? 일부러 성장을 멈췄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아이의 키가 자꾸 크는데 어떻게 부모가 그걸 막을 수 있습니까? 일부러 음식을 먹이지 않습니까?”

“거인이 되거나 고도 비만이 되는 것을 막으려면 먹는 걸 줄였어야 합니다.”

 

“아니,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성도는 은혜로 자랍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가로막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교회가 성장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저는 성실하게 목회를 했을 뿐입니다.”

“네, 압니다. 많은 선배 목회자들이 피를 뿌리며 지켜온 교회입니다. 그러나 다 수용할 수 없을 만큼 성도 수가 늘어났다면 성도들을 양육해서 세상으로 파송해야 합니다. 더 큰 교회를 지어서 더 많은 성도들을 교회 건물에 가둬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들을 교회에 붙잡아두고 교인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그럼 교인들을 분기별로 몇 명씩 내보내야 한단 말입니까?”

“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방법이지 본질은 아닙니다.”

 

“방법이 아니면 더 큰 원칙이라고 있다는 말입니까?”

“진리에 대해 실천이지요.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가 실제 삶에서도 진리냐는 것입니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입니까? 목사님의 것입니까?”

 

“당연히 주님 교회지요.”

“그럼 목사님은 교회가 성장하는 동안 몇 번이나 교회가 이렇게 성장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 여쭤보셨나요?”

 

김영수 목사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교회 성장을 놓고 심각하게 고민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았다.

 

“그 문제를 놓고 기도한 적은 별로 없는 것 같군요.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늘 감사했을 뿐입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걸 문제로 여기고 하나님께 묻는 목회자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대체로 교회에 문제가 생길 때 엎드리지요.”

“그리스도의 교회라면 주님께 묻고, 주님의 뜻대로 교회가 나아갈 바를 정해야 합니다.”

 

“네. 저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묻습니다. 특히 교회 건축이나 교회의 큰 행사나, 선교 방향을 정할 때…….”

“혹시 늘 결론을 정해놓고 묻지 않습니까. 계획을 다 세워놓고 결재를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아니, 이미 하나님 대신 목사님이나 당회가 결재까지 다 해놓고, 주님께는 그저 보고하는 데 그치지는 않습니까? 정말 우리에게 아무런 계획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먼저 하라고 명령하신 일을 듣고, 그대로 행한 적이 얼마나 됩니까?”

 

“목회를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시작했고, 성경 말씀을 근거로 성실하게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늘 하나님께 묻고 그 뜻에 따라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사실 목회를 그런 식으로 일일이 묻고 하는 목회자는 별로 보지 못해서 말입니다. 다들 성장 못해서 야단인데 성장하는 걸 두고 옳은지 아닌지 묻는 목회자가 있을까요?”

“맞습니다. 그러나 물어야 합니다. 성경에 교회가 커야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구절은 그 어디에도 없으니까요.”

 

“네. 그렇습니다. 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해 로마 교회는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 깨끗하게 교회를 지으려고 은행대출조차 자제했습니다.”

“네, 잘하셨습니다. 그러나 교회 건축 자체를 두고 기도하셨어야 합니다. 최소한 교회 건축이 끝난 뒤에라도 하나님께 물었어야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 건축이 끝나자마자 하나님은 그곳에 임재하셨고, 솔로몬과 백성들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나 곧 솔로몬을 다시 찾아와 경고하셨고, 그 경고 속에서는 왕국의 분열과 멸망까지 들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솔로몬이 성전 짓는 것을 싫어하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네, 그렇지요. 그 당시 이스라엘에는 성전이라고는 예루살렘에 하나뿐이었으니까요. 하나뿐이라면 하나님도 황금으로 화려하게 짓더라도 허락하셨겠죠.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네가 어찌 내 집을 건축하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성전에 가둘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성전 건축을 허락했지 친히 성전을 지으라고 명령하시지 않았습니다.”

 

“형제의 말씀은 좀 억지스럽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하셨고, 솔로몬의 성전을 기뻐 받으셨고, 지난 시대 유럽의 크고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들이 세워졌을 때도 기뻐하셨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성전을 크게 짓는 것만이 문제일까요? 어차피 크게 지어도 성도들을 다 수용할 수도 없는데 다른 지역에 사는 성도들까지 끌어 모으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대형교회가 작은 교회들을 일부러 잡아먹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대형마트가 동네 상권을 잠식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조금 전에 목사님도 인정하셨고요.”

 

“그렇긴 하지만 그것은 경제 문제 아닙니까? 그렇게 결론이 나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

“공의와 정의는 공정한 분배와 공정한 재판에 있습니다.”

 

“대형교회가 성장한 것이 분배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교인들이 무슨 분배해야 할 물건입니까?”

“90년대 초반까지는 교회 성장은 분배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1990년대 중반 이후 2000년대 대형교회의 성장은 분명 분배의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때부터는 새 신자가 등록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성도들이 수평 이동을 했습니다. 새 신자가 늘지 않은 상태에서 성도들이 수평이동을 했다면 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한국 교회의 성도 수는 해마다 줄어드는데 대형교회 신도가 늘어나는 현상을 무엇으로 설명할까요? 이것이 대형교회가 성도들을 독식하는 방식으로 성장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대형교회가 작은 교회의 신도들을 다 빼앗아 왔다는 것입니까? 그런 관점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실질적으로 교인을 빼앗아 올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런 분위기를 만들었을 뿐이죠.”

 

“아직도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시 교인들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라고 말씀하셨죠.”

 

“너무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 아닙니까? 정말 다 팔아서 주라는 게 아니잖아요. 율법의 정신이 그와 같다고 하는 것이죠.”

“맞습니다. 교인을 돌려줄 필요는 없겠죠. 그러나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시느냐는 것입니다. 대형교회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교회를 크게 성장시켰다는 사실에 기뻐할 뿐 그것 때문에 우리나라 전체 교회가 좋지 않는 풍토, 즉 작은 교회나 개척교회를 회피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에 대한 책임이 다른 목회자들이 능력이 없어서 교회를 크게 성장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런 측면도 없지 않습니다. 능력 있는 목회자는 지금 이 시대에도 교회를 부흥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목회자의 능력에 따라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 원리이고, 그것이 올바르다는 생각이 과연 성경적일까요?”

 

“그럼 도대체 뭘 어쩌라는 거죠? 전부 다 개척교회나 하란 말입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목회자의 능력으로 좌우된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이미 주님의 교회가 아니라 인간들의 힘겨루기일 뿐입니다.”

 

“목회자가 능력 있는 것도 죄입니까?”

“아닙니다. 아주 귀하지요. 다만 목회자가 능력이 있어서 교회가 크게 성장한 것이라고 믿는 것이 죄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크게 외치면서 사실은 인간의 능력을 높이는 것에 불과한 것이니까요.”

 

“형제님,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어느 목회자가 능력을 입었고, 그가 열심을 다해 목회를 잘 하니까 교회가 부흥한 것 아닙니까?”

“교회 성장과 부흥은 같지 않습니다. 진정한 부흥은 성도들의 삶이 변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삶이 변하고, 공동체와 지역이 변하는 것이지 교회에 성도들이 많이 모이거나 교회 건물이 크게 세워지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한국교회에 하나님의 강력한 부흥이 임하기를 갈망하는 것 아닙니까. 한반도 전역이 성령의 불길에 휩싸여 모든 교회들이 다 일어서도록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부흥은 회개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느헤미야 형제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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