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연재] 진짜 교회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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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

[장편소설 연재] 진짜 교회 (6)

by 브린니 2020. 7. 31.

진짜 교회

 

 

 

 

3. 2 대화

 

“목사님 한 가지 더 묻겠습니다. 목사님은 성도입니까? 목회자입니까?”

느헤미야 형제가 물었다.

“저는 물론 성도입니다. 사실 저는 하나님 앞에 설 때 목회자가 아닌 성도로 서고 싶습니다.”

김영수 목사가 대답했다.

 

“과연 그럴까요? 그럼 다시 묻겠습니다. 목사님은 목자입니까? 양입니까?”

“저는 목자이자 양입니다.”

“왜죠?”

“저는 양떼를 목양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목사이기 때문에 목자이고, 또 선한 목자 되신 그리스도의 양이니까요.”

 

“그럼 또 묻겠습니다. 목사님은 교회의 머리입니까? 지체입니까?”

“저는 지체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그리스도뿐이시니까요.”

 

“잘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목사님은 스스로를 성도, 양, 지체라고 말씀하시지만 목사님의 머릿속에서, 마음에서, 무의식으로 그렇게 믿고 있을까요? 과연 목사님은 성도로서 살고, 양으로서, 지체로서 행동하십니까?”

 

김영수 목사는 다시 묵상에 잠겼다. 원론적으로 자신은 교회의 성도요, 양이며, 지체이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목사였지 다른 그 무엇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저는 항상 목사였습니다. 목사라는 정체성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해 본 적이 없군요.”

김영수 목사가 솔직하게 말했다.

“목사님처럼 솔직한 목회자들만 있다면 우리나라 교회가 이토록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김목사는 느헤미야 형제를 바라보았다. 지금 누가 누구를 가르치고 권면하고 있는가. 그는 당장 가르치는 것을 그만두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가르치는 것은 언제나 목사의 몫이었지 평신도의 몫이 아니었잖은가.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로 목사인 그는 지금 평신도 형제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는 것이었다.

 

“프란시스 쉐퍼의 말처럼 지금 우리 교회들이 당장 고쳐야 할 것은 ‘분리’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분리의 영’을 쫓아내야 합니다. 가장 먼저는 영과 육을 분리하고, 교회와 세상을 분리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성도를 목사와 교인으로 분리하고, 교인을 다시 직분자와 평신도로 분리하고, 그 평신도를 가장 낮은 계급인 성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런 분류법은 도대체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요. 이런 식의 분리를 조장한 장본인이 누굴까요? 자신을 목자로, 머리로 세우고 나머지 성도들을 자기 밑에서 교회를 구성하는 교인으로 만든 것이 누구입니까?”

 

느헤미야 형제가 김영수 목사를 바라보고 묻고 있었다. 이것은 질문이 아니라 질타였다. 김영수 목사는 속으로 되뇌었다. 내가 목사가 아니라 성도요, 양이고, 지체란 말인가? 나 스스로를 목사라고 생각하고, 목사의 정체성으로 나를 규정한 것 자체가 잘못되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목사라는 직분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기름부음 받은 제사장으로서 목사라는 직분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 교회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성도요, 양이며, 지체라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오로지 사명자, 목회자, 사역자, 목사, 그리스도의 종으로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에 성도들의 종이 아니라고 합니다. 말은 종이라고 하면서 다스리고, 지배합니다. 목사는 양을 치는 목자입니다. 그러나 그 양은 자기 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양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또 목자는 양을 잘 알고, 양도 목자를 알고 목자의 음성을 따릅니다. 그런데 성도 수가 수만 명이라면 과연 목자가 양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요?”

 

김영수 목사는 생각에 빠졌다. 3만 명의 성도를 위해 새벽마다 기도하고 있지만 과연 그들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자신이 담임 목사이긴 하지만 많은 부분 부교역자들이나 구역장과 같은 사역자들에게 양떼를 나누어 맡기고 있는 실정이다. 과연 이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그동안 교회가 크니까 어쩔 수 없다고, 이렇게 목회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왔는데 목자인 나의 음성을 듣고 따라오는 양이 몇이 될까. 내가 직접 보살피는 양은 또 몇이나 될까? 나는 그저 교회라는 조직의 우두머리에 불과한 것일까? 나 대신 목자 노릇을 하는 부교역자나 구역장 들이 실질적인 목자들이 아닐까.

 

“목사님, 선한 목자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양에게 꼴을 먹이고, 쉴만한 물가로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는 것이겠지요. 한 마디로 말씀으로 생명의 양식을 먹이는 것이지요.”

 

“네, 맞습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궁극적으로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립니다.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지 않는 목자는 삯군 목자입니다. 그런데 요즘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목자가 있습니까?”

“요즘은 양을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할 위급한 상황은 잘 발생하지 않더군요.”

김영수 목사는 불편한 감정을 그런 식으로 에둘러 말했다.

 

“아닙니다. 수시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알코올이나 게임, 포르노그래피 중독에 빠지는 성도들이 늘어가고, 간음으로 가정이 파괴되고, 각종 범죄에 그리스도인이 연루되고 있습니다. 교인들은 세상과 죄를 끊지 못하면서 그저 주일에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신앙의 전부로 여기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성경적 원리가 통하지 않은 지 오래 되었고, 온통 세상 가치관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교회 안 구석구석에 병들어 죽어가는 영혼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그런 양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설교하는 것 빼놓고 말입니다.”

 

김목사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스텝들에게 보고 받기로 그가 시무하는 교회에도 각종 중독에 빠진 교인들이 여럿 있고, 가정이 깨진 경우도 많으며, 세금을 적게 내기 위해 헌금을 냈다가 도로 찾아가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아예 세금을 포탈하기 위해 교회를 돈세탁 장소로 이용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관행이 되어서 별로 관여할 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가정이 깨어지는 것도 손댈 수 없고, 각종 중독 역시 병원 치료가 필요한 질병이므로 굳이 교회가 나설 필요 없다고 내버려 둔 상태였다.

 

“목사님, 예수 그리스도라면 이런 아픈 현실을 두고 가만히 계셨을까요? 선한 목자이신 그분은 각종 중독자들을 위해, 범죄자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지 않았을까요?”

“그럼 대체 내가 지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겁니까?”

“먼저 중독자를 찾아 하나하나 돌보십시오. 상담하고 권면하고 가르치십시오. 또한 깨끗하지 않은 돈이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완전히 막으십시오. 선한 목자는 양이 이리에게 물려갈 때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것입니다.”

 

“목사가 그런 일까지 다 쫓아다니며 책임져야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목사님, 예수님이 목사님을 무엇 때문에 부르셨습니까? 설교하라고 불렀습니까? 교회 운영하라고 부르셨습니까? 양을 먹이고 치라고 보내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99마리 양을 두고 온 산을 헤맸습니다. 죄인 한 사람을 위해 시간을 낼 수 없을 만큼 바쁘신가요? 뭘 위해 그렇게 바쁘신가요? 설교와 교회 운영이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이라고 성경에 쓰여 있나요?”

 

김영수 목사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느헤미야 형제는 거의 억지 생떼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말이 틀렸다고 반박할 수만은 없었다. 정도가 심한 말들이었지만 그렇다고 귀를 닫을 수도 없었다.

 

“우리나라 목사는 자신과 교회를 한 몸으로 생각하고, 누가 교회에 대해 비판하면 마치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여기며 화를 냅니다. 교인들은 교회에 대해 비판할 수 없습니다. 교회 비판은 목사에 대한 공격이며, 모세에 대해 미리암이 품었던 망령된 생각이라고 여기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목사는 교회에 속한 직분이지 모세가 지닌 권위와 권세를 지닌 지도자가 아닙니다.

 

오늘날 목사는 교회의 직분 체계 가운데 하나로서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자일뿐입니다. 또한 목사는 장로들의 우두머리로서 교회를 다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도들의 대표 격으로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리스도가 머리이십니다.

 

목회자는 지체입니다. 머리가 아닙니다. 목회자는 지체 가운데 하나로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뜻을 받들어 지체들이 한 몸으로서 생명력 있게 살아가도록 돕는 자입니다. 그 자신이 머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교회들에서 목사는 늘 머리행세를 하고, 자신이 교회의 주인인 줄 알고 주인행세를 하지요.

 

특히 개척해서 대형교회를 일군 목사는 주인행세가 하늘을 찌릅니다. 자기가 돈과 노력을 투자해 교회를 크게 세웠다고 기업가처럼 자랑합니다. 당연히 교회 재산을 자기 것처럼 함부로 사용합니다. 이것이 개교회중심주의에 물든 대형교회 목사들이 교회를 자기 왕국으로 만들고 하나님 노릇을 하고 다니는 실상입니다. 대형교회뿐만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목사들은 교인들이 자기 말에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말 듣기 싫으면 다른 교회로 옮기라는 식이죠. 목회자의 뜻에 따르지 않는 양떼는 더 이상 자기 양떼가 될 수 없다는 식입니다. 자신의 목회관에 따르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다른 교회로 가라고 등을 떠밀고 있습니다. 교회가 문을 닫는 실정이기 때문에 교인들의 숫자에 연연해하면서 교인들을 왕처럼 모실 것 같습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교인이 몇 명이 남든 목사는 언제나 자기주장만 내세울 뿐 교인들의 심정을 결코 헤아리지 않습니다.

 

그것이 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자기 교회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교황이 무오설을 주장하며 자신의 명령을 모든 교회들에게 강요했던 것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교회의 머리인데 그리스도가 그 교회에 거하실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를 교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 교회가 타락하는 것은 가장 먼저 목회자들이 그리스도를 교회에서 몰아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없는 그 교회를 교회의 가장 성공적인 모델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교회로 모이라고 하고선 그리스도의 말씀이 아닌 목사 자신의 말을 들으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니 구제하고, 선교하고, 각종 봉사를 해도 결코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형제가 거침없이 쏟아내는 말 때문에 김영수 목사는 어안이 벙벙했다. 김영수 목사는 온몸에서 힘이 빠져 나가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아무리 새벽기도하고, 아무리 철야하고, 금식하고, 선행을 베푼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 대신에 목사가 주인 노릇하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가 아닌데 교회라고 우기면서 충성을 강요하고 있으니 현재 교회가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상 가장 타락한 교회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요?”

 

느헤미야 형제가 쐐기를 박았다. 김 목사는 더 이상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형제님, 다음날 다시 이야기 하죠."

김영수 목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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