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연재] 진짜교회 (8)
본문 바로가기
창작글(시, 짧은 소설)

[장편소설 연재] 진짜교회 (8)

by 브린니 2020. 8. 2.

진짜 교회

 

 

 

5 회개와 부흥

 

에스더 자매가 차를 내왔다. 장미차라고 했다. 붉은 장미 꽃잎이 서너 개 떠 있었다. 옛 아낙들이 선비에게 물을 대접할 때 나뭇잎 몇 개 띄운 것처럼. 장미향이 은은하게 났다.

 

“목사님, 이 땅에 하나님의 부흥이 오려면 무엇을 가장 먼저 회개해야 할지 고민해보셨나요?”

“글쎄요. 성도들 각자 개인적으로 회개할 것도 있고, 목회자가 회개할 것도, 교회나 교단이 회개할 것도 있겠지요.”

 

“오래전에 '어게인 1907'을 외치며 부흥이 다시 도래하기를 갈망하는 대규모 집회가 있었습니다. 교회의 머리라고 자부하는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대거 참석했지요. 그때 모여서는 무엇을 회개했습니까? 성도들은 목회자가 어떤 내용으로 회개하는지 궁금해 하는데 목사님은 무엇을 회개하셨습니까?”

 

“우리 시대의 타락한 신앙과 삶을 회개했지요.”

“개인적으로는요?”

“저의 온전하지 못한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요?”

“사실 그날 기도가 그렇게 구체적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부흥을 위해 기도하고 또 회개합니다. 마땅히 그래야지요. 그런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회개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김영수 목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돌이켜 보면 진짜 회개를 해본 적도 꽤 오래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쩌면 내가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까지 했다. 목회자로 살면서 별로 죄 지은 게 없고, 회개할 것도 별로 없다고 여기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어게인 1907에 모인 분들이 단상 위 센터 자리에 앉으려고 권력 다툼을 한 것은 잘 아시지요?”

“아, 그게 좀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이……”

“설마 그런 사실을 부정하시려는 것은 아니시겠죠?”

“아, 네. 그런 일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부흥을 갈구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목회자들은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싸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목사님, 제발! 그걸 핑계라고 대십니까? 결코 따라서는 안 될 것을 예수님의 제자들의 행동이라고 따라 하실 작정입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기적을 행하거나 순교하지는 않으십니까? 지금 문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목회자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마음 자체가 우상 숭배라는 것입니다.”

 

“네? 그게 어떻게 우상 숭배와 같다고 말씀하십니까?”

“성도들에게는 세상의 가치를 따르지 말라고 설교하면서 정작 목회자들은 가장 추한 세상원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큰 교회를 운영하면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대접받아야 한다고 믿고 있으니 우상 숭배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권력을 탐하는 것은 대표적인 우상 숭배입니다.”

 

김영수 목사는 아무 말도 못했다. 맘몬, 즉 돈을 탐하는 것을 우상 숭배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권력을 탐하는 게 어찌 우상 숭배가 아니란 말인가. 자신은 돈과 권력에서 비켜 서려고 노력했다지만 결코 자유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목회자들의 상식 이하의 범죄들에 대해 교회나 교단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회개한 적 있나요”

“여기저기서 작게는 실천하고 있는 듯 합니다만.”

 

“저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정말 구체적으로 목회자들의 비윤리적인 행태와 성범죄, 공금횡령이나 교회 세습 문제에 대해 교회나 교단이 나서서 잘못된 것은 잘못했다, 용서를 빌 것은 빌고, 고칠 것은 고치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나요? 그저 쉬쉬하고 넘어가지 않았습니까?”

“네. 그렇게들 넘어갔던 것 같습니다. 그런 문제들은 은혜가 되지 않는다고 대부분 유야무야 덮었던 것 같습니다.”

 

“일단 우리의 회개는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사실 회개는 구호뿐이고,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회개합니다, 회개합니다, 중언부언할 뿐입니다. 이런 문제가 터지면 교회 안에서 회개합시다, 하고 통성기도하면 다 끝나는 것으로 여깁니다. 죄를 짓고 와서는 회개한다고 소리를 지르면서 눈물 콧물 다 쏟고 나면 뭔가 시원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면서, 용서받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는 회개의 실상입니다.

 

이제는 그런 식의 회개를 더 이상 회개라고 불러서는 안 됩니다. 성도들은 우스갯소리로 일주일 동안 죄를 지었으니 주일에 교회 가서 회개하고, 또 일주일 동안 죄를 짓고, 그 다음 주에 회개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저 잘못했다고, 용서해달라고 비는 게 회개일까요?

 

회개란 무엇입니까? 잘못된 것을 고쳐서 다시는 그것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게 회개입니다. 그저 대규모로 모여서 부흥을 위해 회개하자, 하고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회개하는지조차 모르는 회개는 회개가 아닐뿐더러 무엇하나 고쳐서 바로 세울 수 없습니다. 잘못했다고, 용서해달라고 비는 회개는 더 이상 해서는 안 됩니다. 어찌 보면 용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셨습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진짜 회개는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입니다. 죄, 잘못된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 완전히 새로운 신앙과 삶으로 돌아서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김영수 목사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정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잘못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정말 주님만 바라보고 목회를 잘 해왔다고 생각해왔는데 뭐가 잘못 되었길래 회개를 다시 배우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김영수 목사가 따지듯 물었다.

 

“세상을 향해 회개하십시오. 교회의 잘못된 것들을 모조리 꺼내서 용서를 구하십시오.”

“교회의 죄는 주님께서 판단하실 것입니다. 굳이 왜?”

 

“아닙니다. 교회의 죄는 천국에서 심판받을 사안이 아닙니다. 교회는 이 땅에 있고, 교회의 죄는 이 땅에서 벌을 받는 용서를 받든 해야 합니다. 땅에서 풀어야 하늘에서도 풀릴 것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뭘 해야 합니까?”

“교회나 총회나 교단이 모일 때 교회의 죄악들을 들춰내고, 세상에 밝히고, 그것들에 대해 하나님과 세상 앞에 회개하십시오. 단, 회개 집회를 열어서 떠들썩하게 통성기도를 할 게 아니라 기자회견을 열어서 정확하게 죄상을 밝히고,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면서 머리를 숙이십시오.”

 

“교회와 목회자가 세상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것은 좀……”

“목사님, 그러니까 목회자가 권력을 탐하는 자라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는데도 죄인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온갖 모욕과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것은 이 땅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당하신 것이 아닙니까? 그분이 죄 없이 당하셨는데 우리는 죄악에 쩌들어 있으면서도 세상 앞에 수치를 당하는 게 두려워 쉬쉬하면서 회개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교회에 숨어서 중언부언 회개 기도를 읊을 뿐이고요.”

 

김영수 목사는 문득, 언제나 교회가, 아니 목회자인 자신이 세상보다 위에 있다고 믿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룩한 교회가 타락한 세상을 향해 고개를 숙이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교회란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교회가 죄를 고백하고 세상에게 용서를 빌다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바로 그 일을 하라고 하다니.

 

“목사님, 제2종교개혁을 외치는 분들이 개교회 중심주의를 비판하는데 그 실체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여러 문제가 있지만 개교회로 흩어져서 통일된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교회들이 연합하지 못하고……”

 

“네, 물론 그런 것도 문제입니다만, 중요한 것은 교회에서 목회자의 우상화가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목회자들은 교회의 머리, 즉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하고 왕노릇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성도들이 목회자를 우상화하면서 뒷받침을 하는 것이죠. 더 이상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 교회 목사님 설교가 좋으니까 교회 나와서 들어봐, 이게 전도합니다.”

 

“그거야, 말이 그런 것이죠. 교회에선 오직 그리스도만 전하라고 가르칩니다.”

“그거야 말로 말이 그런 것이죠. 전도세미나에서는 4영리를 비롯한 전도프로그램들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전도하도록 가르칩니다. 그러나 현실에선 <우리 교회 나와서 우리 교회 목사님 말씀 듣고 은혜 받고, 목사님 말씀 따라 살면 복받는다>이런 식으로 전도합니다. 교회도 우상이 되고, 목회자도 우상이 될 뿐입니다.”

 

“그거야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로서……”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십시오.”

 

“많은 목회자들이 자기 생각을 덧붙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렇다면 최소한 누가 설교를 잘 하네, 못하네 하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뿐이니까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뿐인데 왜 설교기법이 필요하고, 설교를 잘 하고 못 하고 따질 필요가 있나요. 일주일 동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주일 낮에 그대로 전달하면 되는데 말입니다. 대언자란 그런 사람이 아닌가요?”

 

정말 말문이 막혔다. 느헤미야 형제는 궤변이 심했다. 매사에 어떻게 저런 식으로 비판만 한단 말인가. 그저 목회자는 성도들이 이해하기 쉽게 하나님 말씀을 잘 요리해서 전하는 것 뿐이다. 그것이 왜 잘못됐다는 말인가.

 

“각자 자기 교회와 목회자를 선전하는 것은 더 이상 전도가 아닙니다. 전도는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를 따라 살고 있으니 당신도 나와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지 않겠느냐고 권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이 아니라 삶으로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전도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바로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공동체이고요.”

 

“네, 맞습니다.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을 목표로 교회가 나아가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번에는 김영수 목사가 제법 당당하게 나섰다.

 

“그렇다면 왜 현실은 이렇게 암울합니까? 그렇게 살고 있는 게 맞나요?”

 

다시 할 말을 잃었다. 목적과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가는 것이 분명한데 현실에서 그것이 이루어지고 있느냐고 물으면 확신할 수 없었다. 뭐라고 말할 게 없었다. 그저, 그것을 목표로 노력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그저 우리의 대의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히 사는 것이라고 말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야 한다고 아무리 외쳐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도 그렇게 살지 않으니까요.”

 

김영수 목사는 느헤미야 형제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렇게 사느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느헤미야 형제는 그런 현실을 가슴 아파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신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러웠다. 자신이 일개 평신도보다 못하다는 사실이.

 

그리고 잠시 뒤 이래서 목회자가 권력을 탐하고 있다는 게 사실이구나, 하고 깨달았다. 누가 누구보다 더 낫다고 비교하고, 판단하는 것이 이미 권력에 쩌들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을. 자신도 이런 처지인데 다른 목회자나 성도들 역시 서로들 자기 자랑거리를 찾는 것이 분명했다.

 

“목사님,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를 내쫓고 목회자를 우상화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자신이 거룩하고, 능력있는 하나님의 대언자라고 감히 생각하면서 자신은 마치 죄가 없는 양 폼을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할 수 없고, 회개가 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당연히 고칠 게 없지요. 뉘우칠 회悔 고칠 개改, 이런 진짜 회개를 결코 할 수 없는 게 우리 교회 전체의 현실입니다.”

 

느헤미야 형제가 말을 마치자 김영수 목사의 몸에서는 진이 다 빠지는 느낌이었다. 뭔가 반박할 말이 머릿속에서 떠오를 듯 하다가도 순간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입가를 맴도는 말이 있을 듯 해서 입을 열려고 하면 곧 날아가 버렸다. 발끝이 자꾸 곤두섰다. 엉덩이에 땀이 찼다. 그러기를 한 시간, 그는 기진맥진해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힘겹게 일어나 차에 올랐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제가 어디로 가기를 원하시나이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