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연재] 진짜 교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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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

[장편소설 연재] 진짜 교회 (3)

by 브린니 2020. 7. 28.

우리나라 교회의 현실을 보면서 진짜 교회의 모습은 어떠할까 상상하면서 장편소설 진짜 교회를 연재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가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을 함께 고민하는 기회가 되시길 빕니다.

 

 

진짜 교회

 

 

2 주와 함께하는 집

 

홀리 웨딩을 다 읽고 난 다음날 김영수 목사는 출판사에 전화를 걸었다.

“주와 함께하는 집입니다.”

중년의 남성이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OO교회를 섬기고 있는 김영수 목사라고 합니다. 홀리 웨딩을 쓰신 분과 통화를 할 수 있을까요?”

“네, 목사님. 무슨 일이신가요? 저에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남자는 겸손한 듯 하면서도 비즈니스적인 말투로 대답했다.

 

“아, 그래요? 지금 전화 받으시는 분이 저자이신가요?”

“네, 뭐. 저희가 만들었으니까요.”

상대는 좀 쑥스러워하면서 뭔가 썩 내켜하지 않는 말투였다.

 

“그럼 출판사에 계신 분들이 직접 원고를 쓰셨나요?”

“그렇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무슨 일로……?”

“저는 그저 저자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되죠?”

“목사님, 번거로우시더라도 출판사로 오시면 저희와 이야기를 나누실 수 있습니다. 저는 느헤미야 형제라고 합니다.”

 

“아, 목사님 아니신가요?”

“신학을 공부하긴 했습니다만 저는 평신도 사역자입니다.”

“여기 책에 있는 주소로 찾아가면 될까요?”

“네. 월요일 오후쯤 뵈면 어떨까요?”

“그래요. 목사들도 그때 쉬니까 좋습니다.”

 

김영수 목사는 점심을 간단히 먹고, 차를 몰아 주와 함께하는 집으로 갔다. 출판사는 서울에서 좀 떨어진 소도시에 있었다. 김 목사는 가는 동안 왠지 마음이 설렜다. 신앙서적을 읽고 저자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말로는 모두들 결혼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결혼을 거룩하게 여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루터조차 결혼을 성례로부터 떼어냈다고 한다. 요즘은 젊은 남녀가 만나서 감정적인 사랑에 빠지면 서둘러 결혼했다가 감정이 사라지면 가차 없이 이혼했다. 은혼, 금혼을 지난 노부부들도 결혼을 깨곤 한다. 결혼은 이미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도 아니고, 인간의 서약 역시 우스꽝스런 것이 되고 있었다.

 

출판사 ‘주와 함께하는 집’은 느헤미야 형제의 작은 아파트였다. 그의 집이 곧 출판사 사무실이었고, 교회였다. 에스더 자매라고 자신을 소개한 형제의 아내가 차를 내왔다. 잠시 모과향이 주위로 달콤하게 흐르다 사라졌다.

 

“일하시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김 목사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목사님 같은 분을 뵙는 것도 저희가 하는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느헤미야 형제가 웃음을 띠며 말했다.

 

“홀리 웨딩은 정말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많이 팔린 책이 아닌데 어떻게 읽으셨네요.”

“심방을 갔다가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교인들에게도 적극 읽으라고 설교 때 광고를 했습니다.”

“네, 그런 데까지 신경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오랜만에 귀한 책을 읽게 해주셔서 제가 더 감사하죠.”

“그런데 왜 저희를 만나자고 하셨는지요.”

 

“아, 뭔지 모르겠지만 그냥 만나 뵙고 말씀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이 책을 어떻게 쓰게 되셨는지도 궁금하고요.”

“참회록이라고 생각해주십시오. 제가 거룩하게 살지 못했습니다.”

“아, 그런 마음을 갖는 것 자체가 귀합니다. 요즘 시대에는 그리스도인이 거룩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하는 것 같습니다.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고 설교하면 겁을 먹고 고개를 떨구니까요.”

 

부부는 김 목사를 향해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는 그들 부부가 행복해보이거나 특별히 경건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 부부를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해졌다. 오래된 친구를 만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호칭을 부르기가 애매하다고 하자 남편은 느헤미야 형제, 아내는 에스더 자매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그는 자매님, 형제님, 하면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학 시절로 돌아가 선교단체 동아리 멤버들을 형제, 자매라고 부르며 밤을 새우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요즘 교회에서는 청년들끼리 말고는 형제, 자매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는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성도, 이런 식의 직분에 따른 호칭이 있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계급에 따른 분류가 된 지 이미 오래인지도 모른다.

 

“여기 주일 예배를 드리십니까?”

김 목사가 물었다.

“네, 저희는 보통 사람들처럼 평일에는 일하고 주일에는 예배하고 이웃을 섬기고자 합니다. 남편은 얼마 동안 택배 일을 하기도 했고요. 이젠 출판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주일에 저희 가족과 이웃 몇 분이 함께 모여 예배하고 애찬을 나누며 교제하고 있죠.”

에스더 자매가 대답했다.

 

“예배는 어떤 식으로 드리나요?”

“가능하면 특별한 형식을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읽고 헌금하고 축도로 마칩니다.”

 

“설교는 누가하십니까?”

“아내와 저, 모두 신학을 했지만 누가 설교자로 나서지 않습니다. 모두 다 저마다 일주일 동안 주님이 주신 말씀을 묵상하고 삶에 적용하고, 그냥 그것을 나눕니다. 우리 가족 셋이서 예배할 때는 설교자가 셋이고, 다른 분들이 오시면 열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말씀을 나누지 않는 분들도 계시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시는 분도 계시지요.”

 

“예배 시간은 얼마나……”

“말씀 나누는 시간에 따라 다르지만 우리 가족만 예배할 때는 거의 1시간 정도 걸립니다. 대체로 여는 기도, 말씀 나눔, 기도, 축도로 마칩니다. 축도는 고후 13:13을 함께 읽습니다.”

“신앙고백이나 시편교독, 성가대 찬양과 같은 순서는 빠지는군요.”

“그것들을 순서에 넣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순서를 넣고 빼기보다는 우리가 은혜 받은 것을 함께 나누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할까요. 형식적인 순서는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요즘은 집에서 뜻이 맞는 분들이 모여서 예배하는 가정교회 형태가 많이 생겨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려운 점은 없나요? 아니면 더 나은 점이 있나요?”

“모두 다 자신이 경험한 실제 말씀을 나눌 수 있어서 좋습니다. 그동안 우리 성도들은 목사님이 깨달은 말씀, 그분이 경험한 말씀을 그저 듣기만 했습니다. 질문을 하거나 자신이 느끼고 깨달은 바를 다른 성도들과 나눌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성도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럴 경우 말씀을 삶에서 경험하기도 힘들고, 말씀을 통해 삶이 변화되기도 힘듭니다. 성도들의 교제가 없으면 성령을 체험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해집니다. 설교를 듣는 청취자가 될 뿐입니다. 순종이 가장 좋다고 하면서 무조건 목사의 말만 따르면 된다는 식으로 가르치니까 목사님이 요구하는 것을 적당한 수준에서 맞춰주는 식의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집에서 적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 말씀과 삶을 함께 나누다 보면 말씀이 실제가 됩니다. 어떤 말씀이 다른 사람의 삶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도 알 수 있고, 나의 경우에 어떤 식으로 말씀이 경험되는지를 나누면서 말씀이 삶 속에서 어떻게 역사하는지는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연히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교회란 일주일에 한 번 모여서 예배하는 어떤 장소가 아니지 않습니까. 성도들과 함께 모여 주와 함께 한 삶을 나누는 것이 더 중요하지요. 어려운 점보다는 즐겁고, 평화롭고, 자유롭고, 기쁨이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교회 운영이랄지 기타 다른 문제는 어떻게 처리하시나요?”

“우리 집에는 열두 명 이상 모이기 힘듭니다. 그 이상 모이면 좀 더 집이 넓은 평수가 큰 형제나 자매의 집에서 모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주와 함께하는 집은 몇 동 몇 호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삶을 사는 곳이면 어디든 교회니까요. 주와 함께하는 집은 출판사 이름일 때만 빼면 고유명사도 아니고, 브랜드도 아닙니다. 그저 일반명사입니다. 주와 함께하는 집이면 그만인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 교회는 따로 성전을 건축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많이 모여서 더 큰 장소가 필요하면 아파트 단지 내 있는 북카페나 회의실을 빌려서 예배하고 교제할 생각입니다. 아니면 단지 내 어린이집을 주일에만 빌려 모일 수도 있고요. 만약 더 많은 수가 모이면 그때는 30명 단위로 나눌 생각입니다. 15명 단위로도 나눌 수 있고요. 작은 교회로 나눌수록 교회가 더 커집니다. 우리는 30명 정도 모이는 교회 100개, 200개, 1000개, 2000개로 나누어지는 배가 운동을 펼칠 수 있을 것입니다. 굳이 수천 명이 한꺼번에 모이는 대규모 성전을 건축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대회로 모이라는 말씀도 있지 않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수많은 주와 함께하는 집이 1년에 몇 번 정도는 월드컵경기장 같은 곳에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평소에는 작은 지역교회로 모여 삶을 나누는 것이 더 진정한 마음의 예배가 된다고 믿습니다. 서로의 삶을 나누고, 서로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하며 서로의 어려움을 위해 기도하는 교제가 일상 속에서 일어나면서 주일에 함께 예배하며 떡을 뗀다면 더 아름답지 않을까요? 사실 대회로 모일 생각은 거의 없지만 말입니다.”

 

“재정은 어떻게…….”

“많은 분들이 개척교회를 하면 재정문제가 가장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목회자 생활비 걱정이 없고, 교회를 크게 짓겠다는 욕심을 버리면 재정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제 목회자들도 다른 직업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직업이 있었고, 바울도 그랬습니다. 가능한 평일엔 일하고 주일에 주를 섬기는 게 바람직하지요. 성도들도 그렇게 하니까요. 왜 목회자라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상가를 빌려서 시작하는 경우 월세나 기타 경비가 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굳이 교회가 따로 건물이 있어야 할까요? 목회자가 직업이 따로 있고, 교회를 자기 사업으로 하지 않는다면 건물을 얻어서 개척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와 함께하는 집은 저희 집이나 다른 형제의 집에서 예배드리기 때문에 따로 교회 건물 유지에 돈이 들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헌금을 하고, 그 헌금은 대부분 이웃들을 돕는 데 사용됩니다. 주민센터와 협조해 주위에 있는 어려운 분들을 돕고 있습니다. 십일조는 교회에 내지만 교회는 이를 성도들에게 나눠주어 각자가 생각하는 대로 사용합니다. 대부분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데 씁니다. 우선 각 가정의 나이 드신 부모님들을 먼저 돕습니다. 그분들이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다면 친척이나 친지 중에서 도울 분들을 찾습니다. 아니면 학교나 단체에 보낼 수도 있고요. 십일조는 정말이지 성도들 각자 원하는 대로 자발적으로 바치고, 교회는 이를 어려운 자들을 위해 마음껏 사용하도록 내어줍니다. 여기에 그 어떤 다툼도 없습니다.

 

우리 부부는 성도들이 헌금한 것에서 급료를 취하지 않습니다. 또한 성도 모두가 제사장이므로 모두 예배에 참여하고 모두 말씀을 전하고 모두 주의 일에 동역하기에 누가 대표로 목회를 맡아 할 이유도 없고, 따로 급여를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짐을 지는 동역자일 뿐입니다. 우리는 교회로 모여 헌금을 주님께 드리고, 주의 말씀에 따라 그 헌금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합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과 이웃을 섬기는 것이 하나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셀 교회는 결코 성령의 인도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말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럼 정말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십니까?”

“우리 교회가 셀교회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주와 함께하는 집으로 모이는 성도들은 말씀이 자기 삶의 실제가 되기를 원합니다. 말씀의 능력이 실제 삶에서 체험되기를 원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의 능력이 자기 삶에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분들은 주님의 축복이 자기한테 오면 그것을 두고 어떤 체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사업이 잘 되거나 자녀가 좋은 대학이나 직장에 들어가거나 투자한 돈이 큰 수익을 냈을 때 할렐루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정말 말씀의 능력이 우리 삶에 나타나는 좋은 본보기가 아닙니다.

 

찬송가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겸손히 주를 섬길 때 괴로운 일이 많으나…… 그러니까 주를 섬기는 축복을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괴로운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괴로운 일이 일어나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뭘 잘못해서 이런 일이 생기나 혹은 내가 그렇게 잘 믿어왔는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하나님도 너무하시네, 이런 식으로 반응합니다. 그러나 축복만이 주님의 은혜는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십자가에서 구원하셨기 때문에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주님의 십자가에 참여하라고 초대하십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라고 부르십니다. 바울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가장 큰 기쁨과 영광이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와 함께하는 집에서 일어나는 말씀이 육신이 되는 역사는 이렇게 나타납니다. 성도 중 한 분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관한 성경구절을 읽고, 이웃이란 어떤 대상이 아니라 관계성 자체임을 깨달았다고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강도만난 자를 두고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들은 강도만난 자와 아무런 관계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냥 지나치지 않고, 상처에 포도주를 붓고 싸매주고 여관에 데려가 돈을 지불했습니다. 모자라면 다시 올 때 갚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강도만난 사람과 관계를 맺었고, 이웃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관계를 맺고, 자비를 베푸는 진짜 이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 때 말씀을 나눈 성도는 아내와 함께 아파트 앞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공원 끝부분이 대형마트와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길을 걷다가 신기한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저것 좀 보라고 외쳤습니다. 초등학생 꼬마가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한 손으로는 커다란 피자박스를 들고 자전거를 몰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배달의 달인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비틀거리며 자전거가 비틀거리다 넘어지고 피자박스가 땅에 떨어져 먹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대형마트에서 파는 피자는 일반 피자보다 두 배쯤 컸지만 박스는 끈으로 묶여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죠. 꼬마는 어이가 없어 땅에 떨어진 피자를 멍하니 보고만 있었습니다. 성도 부부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아이 앞으로 지나던 사람들이 잠시 멈춰 섰다가 가던 길을 걸어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가족인 양 가까이서 아이를 향해 몇 마디 하더니 지나갔습니다. 꼬마는 몸을 굽혀 피자덩어리를 박스에 넣었습니다. 지켜보던 그 성도의 아내가 가까이 다가가 땅에 떨어진 피자 줍는 걸 도우며 어떡하니, 하면서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그 성도 역시 꼬마에게 다가가 피자박스를 받아 들고는 아이에게 어디 사느냐고 물었습니다. 꼬마는 근처 다른 아파트 단지에 산다고 대답했습니다. “아저씨가 피자 다시 사줄게. 가자.” 부부는 마트를 향해 꼬마와 함께 걸어갔습니다. 그의 아내는 꼬마와 쉴 새 없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꼬마는 친구들과 동아리 활동을 하는 중이었는데 동아리 회장 어머니가 피자를 사준다고 해서 자기가 마트에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도의 아내는 아이의 마음을 잘 도닥여주었고, 그 성도는 실제로 돈을 지불해서 꼬마를 위기에서 구해주었습니다.

 

성도 부부는 아이에게 시간을 들이고, 피자 값을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꼬마를 그냥 지나쳐서 산책을 마저 하고 집으로 들어오면 됐을 텐데 말입니다. 말씀이 삶으로 들어오면 유익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을 남에게 내어주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교회에서 이런 일들은 잘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노숙자들 같은 분들이 찾아오면 교회 사무실에서 일정 금액을 받아가도록 했을 뿐 그분들과 어떤 관계도 맺지 않았고, 그분들을 위로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경우엔 서로 피하고 사무실에서조차 그분들께 돈 한 푼 주지 않고 돌려보내기 일쑤였습니다. 교회를 찾아와 손을 벌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가난한 자가 찾아오면 그분들을 돕기 위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아니, 그분들을 찾아가서 돕는 것이 마땅한 일 아닌가요. 성탄절 밤에 선물 보따리를 가난한 이웃들의 집 앞에 놓고 오는 행사를 벌이면서 교회에 찾아오는 어려운 분들을 내쫓는 것은 어떤 근거에 의해서일까요. 말씀이 우리 삶에 들어올 때 우리는 축복이 아니라 손해를 각오해야 합니다.”

 

김영수 목사는 이야기를 나눌수록 느헤미야 형제가 주일 저녁에 설교를 하면 많은 교인들이 은혜를 받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한 번도 평신도가 설교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느헤미야 형제 같은 분이 왜 목회를 하시지 않는지 궁금하네요.”

김영수 목사가 이렇게 말하자 부부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 참. 이분들도 주와 함께하는 집에서 목회를 하시지.

김영수 목사는 자신이 아직도 큰 건물이 있고, 제도와 조직을 갖춘 교회만을 교회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느헤미야 형제 부부는 곧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와 말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이 우리 부부를 문서사역으로 부르신 것 같아요. 교회에서 초청할 경우 말씀을 함께 나눌 생각은 있습니다.”

“아, 그럼. 간증집회 같은 걸 하면 좋겠군요.”

“저희 부부는 간증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간증이란 결국 자신이 하나님께 은혜 받은 것을 자랑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간증을 들으며 감동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진리뿐인 것 같습니다. 저희는 예수님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면 기꺼이 가서 서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고 싶습니다.”

 

“무엇이든 좋습니다. 우리 교회에 오셔서 나눠주시죠. 그런데 혹시 요즘 쓰고 계신 책이 있으신가요? 벌써부터 기대가 돼서 말입니다.”

“우리나라 교회의 현실과 다음세대에게 물려 줄 교회의 비전이 무엇일까 생각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정말 시대에 맞는 책이 될 것 같군요. 한국교회 100년 동안 지금이 가장 어려운 시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형제 부부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웃었다.

 

“아, 그런데 너무 비판적인 시각에서 쓰는 것은 아니겠죠? 요즘 교회를 향해 정말 심한 말들을 해서 말입니다.”

“제가 어떻게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우리나라 교회의 성도의 한 사람으로서 교회를 보며 가슴 아파하고 있는데요. 만약 제가 책을 쓴다면 그것 역시 참회록일 것입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히 살지 못해 우리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있는 것이니까요.”

“그게 어디 형제가 책임질 일입니까. 목회자인 저부터……”

 

“사실 선친과 조부 모두 목회자이셨습니다. 저는 지난 오십년 간 교회 안의 탕자로 살았습니다. 제 자신이 포도원을 허무는 여우였습니다. 이제 돌이켜보니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결과가 너무나 끔찍합니다. 교회가 이대로 허물어진다면 주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워하실까요? 저는 교회의 한쪽 모퉁이이라도 바로 세우는 데 힘을 보탤 수 있다면 제 남은 인생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이미 죄로 죽었고, 주의 은혜로 인생을 덤으로 살고 있습니다. 입에 발린 교리를 되뇌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주께서 저를 죽이려고 하셨지만 돌이켜 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형제님 속에서 주님이 행하실 일이 매우 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크고 작음이 문제이겠습니까? 주께서 주신 생명을 교회와 이웃과 나눌 수만 있다면……”

느헤미야 형제는 약간 떨고 있었다. 아직도 반쯤 죽은 상태에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번 주에 우리 교회에 오시겠습니까?”

“말씀 나누는 것을 좀 미뤄주시면……”

“물론입니다. 편하게 생각하고 오세요. 제 아내가 막 홀리 웨딩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만나서 이야기도 나눠주시고…… 또 우리 교회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이 있으면 말씀해주시고요.”

“네, 나눌 게 있으면 뭐든지 나누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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