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秋史의 집에 머물다 ― 김정희 고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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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일상생활

추사秋史의 집에 머물다 ― 김정희 고택에서

by 브린니 2020. 7. 26.

 

추사 김정희 고택

충남유형문화재 제43호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 261

 

 

 

짧은 시간이나마 집을 떠나 여행을 다녀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모든 일에 의미를 따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냥 느낌대로 훌쩍 떠나고 돌아오는 사람도 있지요. 의미를 따지는 사람과 느낌대로 흘러가는 사람 둘이서 한 집에 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서로 의견이 달라 매일 싸울까요, 아니면 서로를 보완하면서 느낌대로 떠났다가 의미를 들고 귀가할까요? 느낌과 의미가 한 쌍으로 어울린다면 금상첨화 아니겠어요.

 

이번엔 추사의 고택을 방문하기로 했답니다. 이응노의 집에 놀러갔다 왔으니 그리 멀지 않은 추사의 집에 잠시 머무는 것도 퍽 즐겁겠다 싶었습니다. 화가의 집엔 느낌대로 가서 놀다왔는데 왠지 역사적 인물을 만나러 가자니 약간 심각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마냥 놀다오면 안 될 것 같은, 노트와 볼펜이라도 들어야 할 것 같은, 휴대전화에 사진과 정보를 잔뜩 담아 와야 할 것은 부담감이 밀려 왔습니다. 하지만 “느낌대로”를 외치는 사람, 호기 있게 일단 차를 몰고 떠납니다.

 

주말에 비가 자주 내립니다. 일요일 오후, 날씨가 매우 흐립니다. 집에서 만든 아이스커피로 오후의 졸음을 쫓으며 드라이브를 즐깁니다. 물기를 입은 초록 나무와 초록 들판이 마음을 상쾌하게 합니다. 길병민이 부르는 가곡을 크게 틀고 속도를 내봅니다.

 

길병민은 이태리 가요, 독일 가곡을 부를 때도 멋지지만 현대적인 팝을 부를 때도 빛을 발합니다. 길병민이 부르는 <러브스토리>는 이미 많은 사람들의 최애곡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가 부르는 우리 노래들도 멋집니다. <마중>, <시간에 기대어>, <별을 캐는 밤> 등등. 낮지만 또렷하고, 청량감 있게 귀를 울리는 길병민의 목소리에 많은 사람들이 힐링을 받는다고 합니다. 날카로운 테너보다 풍부한 저음의 베이스 바리톤의 음색이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며 위로한다고나 할까요.

 

<마중>을 부르는 길병민

 

아름다운 풍경, 아름다운 노래와 함께 드라이브를 하면서, 김정희 선생은 왜 자신의 호를 '추사'라고 지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가을 역사라니...... 가을은 결실과 풍요의 계절입니다. 곡식을 거둬들이고 추석에 잔치를 벌이면서 “한가위만 같아라” 하면서 인생의 즐거움을 노래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가을은 쇠락의 계절입니다. 무성했던 초록 나뭇잎이 노랗고 붉게 물들면서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땅에 뒹굽니다. 곧 겨울이 닥쳐 온 세상을 하얀 눈으로 덮고 만물을 얼어붙게 할 것을 예고합니다. 풍요의 끝, 쇠락의 시작! 우연의 일치겠지만 추사라는 호는 조선 후기 시대의 특징을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듯합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세한도歲寒圖>는 추사 김정희를 대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낙엽을 떨어뜨리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는 나무, 그러나 그 나무의 기품과 기세는 가히 하늘에 닿을 듯 합니다. 가을의 역사를 꿋꿋하게 몸으로 쓰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마치 자화상 같다고나 할까요. 자신의 얼굴을 그린 자화상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의 기상을 그린 그림 말입니다.

 

추사 기념관
추사 김정희 이야기 전시회 포스터
전시관 내부 포스터

 

추사 기념관을 먼저 들러보기로 했습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생애와 학문과 업적 등을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위대한 인물들이 태어났을 때 기이한 일들이 벌어졌다는 고사가 많이 있듯이 추사 김정희가 태어나던 날 말랐던 우물에 물이 돌기 시작하고, 말라버린 나무에 새 움이 텄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솜씨로 서예와 그림을 그렸고,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박제가 선생 밑에서 공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과거에 급제하여 암행어사로 활동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생원시권 : 과거급제 문서

 

김정희 선생은 고증학과 금석학의 대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증학이란 유교 경전을 실증적으로 연구하는 분야로 문헌 고증을 통하여 문자 음운 훈고를 연구하고 이를 통해 경전을 정비하고 해명합니다. 금석학은 고증학의 갈래로 금석문을 연구하는데 청동기, 철기, 비석 등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연구하여 문자를 판독합니다. 이를 통해 고전의 내용을 복원하고 옛 서체를 발굴하는데 이바지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전시장 곳곳에는 추사가 발굴하고 고증한 탁본이 많았는데 <진흥왕순수비> 역시 진흥왕의 것으로 밝혀내기도 했답니다.

 

경주 무장사아미타불조성기비 부기 : 추사가 1817년에 발견하여 고증함.
황초령 신라 진흥왕순수비
북한산 신라 진흥왕순수비

 

추사 선생은 서예의 대가로 일찍부터 중국의 학자와 명필가와 교류했으며 추사체라는 특유의 서체를 완성하였습니다. 그의 필체로 수많은 건물의 현판에 글씨를 남겼습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추사가 아버지께 안부를 여쭙는 편지였습니다. 간단한 편지였지만 부자간의 정을 느끼게 하는 사람 냄새나는 글이어서 가슴이 훈훈해졌습니다.

 

추사의 아버님 전상서
부자의 정情

 

기념관을 나오면서 세한도가 새겨진 머그컵 하나를 샀습니다. 단지 기념될 만한 것을 샀다기보다 세한도의 기상을 집에서도 느끼고 싶었습니다. 물을 마실 때마다 기품과 기개를 마음에 담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세한도 머그컵

 

휴~ 역사 공부를 끝내고 이제 추사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추사의 고택은 안채와 사랑채, 사당채가 있습니다. 18세기 중엽의 건축물인데 1976년 충청남도에서 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 고택 대문

 

고택을 둘러보며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방이 매우 작고 천장도 낮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느 민속마을에 갔을 때도 집이 너무 작고 방도 비좁아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어떻게 여기서 살았을까. 진짜 사람이 사는 집 맞나? 혹시 그냥 모형으로 지은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 집들은 중인들이 살았던 집이어서 부잣집이 아니라 집이 작은가, 했었죠. 그런데 한 시대를 풍미한 대감집도 별로 크지 않고 특히 방이 작고 낮아서 의아했습니다.

 

아마도 옛날 우리 선조들은 키나 몸집이 그리 크지 않았나 봅니다. 그래서 집이나 방들도 작고 아담하게 지었겠지요. 아무튼 옛날 집들이 아직도 원형을 지키고 있으니 고마웠습니다. 물론 복원한 집이어서 그런지 사람이 살았던 흔적들을 많이 느낄 수 없지만 이 집에 사람이 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추사 고택 안채
추사 고택 방 안 모습

 

이젠 제비들이 고택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답니다. 마루엔 온통 제비 똥이 떨어져 있고, 서까래에는 제비들이 집을 짓고 살고 있습니다. 제비들이 ㅁ자형 안채를 들랄날락 비행합니다.

 

지붕밑 제비집

 

안채 두 곳에 아궁이가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여기서 불을 때 밥을 짓고 사람들이 먹고 살았구나 하고 유심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궁이는 밥을 짓기 위해서 아니라 난방을 위해 불을 때는 곳이라고 합니다. 안채는 추사의 가문으로 시집온 화순옹주가 기거했던 곳으로 왕실주택처럼 건축되어 난방을 하는 아궁이와 부엌을 따로 두었다고 합니다.

 

안채 난방용 아궁이

 

사랑채는 ㄱ자형 구조로 주로 손님을 맞을 때 쓰는 곳입니다. 문설주에는 명문들이 쓰여 있고 방문이 열려 있습니다. 저기 들어가 등을 대고 누으면 옛 조상들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사실은 등을 펴고 쉬고 싶었나봅니다. 고즈넉한 저녁을 느끼며 고풍스런 대감댁에서 쉼을 누린다, 얼마나 멋집니까. 그러나 문화재 보호를 위해 방에 들어가 눕는 등 실례를 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금지된 것을 선을 넘고 싶은 소망을 불러일으킨다? 얼른 여길 벗어나 다른 곳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추사 고택 사랑채

 

ㄱ자 사랑채

 

고택 위쪽은 추사의 영정을 모신 영당으로 '추사영실秋史影室'이라고 부릅니다. 추사의 아들이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만든 곳입니다. 영당으로 가는 길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추사 영당 가는 길
추사영실
추사 김정희 영정

 

고택에서 나오면 한옥 건물이 하나 더 있습니다. 여기는 고택 본채가 아니라 이곳을 돌보는 관리소입니다. 지붕 끝에 거미들이 거미줄을 쳐놓고 먹이감을 기다립니다. 오래된 건물이지만 살아 있는 것들은 생명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거미는 사람들 손길이 잘 닿지 않는 곳에 자기 집을 짓는 모양입니다.

 

추사 고택 뒤뜰

 

고택을 나오는 문

 

고택 주변으로 꽃과 나무들이 있습니다. 푸른 잔디가 펼쳐진 가운데 멋진 소나무도 서 있고, 내려오는 길을 따라 모과나무도 있습니다. 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잠깐 쉬어가라고 벤치가 있습니다. 나그네가 된 기분을 잠시 앉아 봅니다. 고택은 텅 비어 있지만 어디선가 옛사람들이 살아서 나올 것만 같은, 아니 걸어나와 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둘러보았습니다. 그냥 박물관이나 유적지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옛사람과 후세대가 만나 보다 더 가까이 호흡하는 곳이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추사의 집 뜰에 핀 연꽃

 

고택 앞 마당의 모과 나무

 

나그네를 배려하는 벤치

 

고택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화순옹주의 문이 있습니다. 시집을 와서 남편이 죽은 뒤 오랫동안 금식을 하다가 남편을 따라 세상을 떠난 화순옹주의 넋을 기리기 위한 곳입니다. 왕족으로는 단 한 사람 화순옹주에게만 열녀문이 내려졌다고 합니다.

 

화순옹주 문

 

그리고 그 옆으로는 추사가 25세 때 청나라에서 들여와 심었다는 백송이 있습니다. 심은 지 40년이 지나야 소나무 껍질이 벗겨지고 속살이 하얗게 드러난다고 해서 백송이라고 부르는데 마치 영험한 존재처럼 보여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추사가 25세 때 청나라에서 들여와 심은 백송

 

이제 추사의 집에 잠시 머물다 떠나야 할 시간입니다. 옛 문헌들을 발굴하고 고증하면서 서예의 필체를 개발하고 연구하여 선비의 전통과 학문을 새롭게 세우려고 했던 추사 김정희 선생의 곧은 신념을 느끼고 돌아가는 시간이었습니다.

 

고택에서 머물다 나오니 우리 가락을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차안에서 팬텀싱어3에서 국악의 힘을 보여준 고영열과 라비던스가 부르는 흥타령을 틀었습니다. 국악을 배우지 않은 3명의 남자도 우리 민족 속에 흐르는 흥興과 한恨이 있었나봅니다. 한이 철철 넘치면 흥이 한을 타고 넘습니다. 세상살이 다 부질없다, 노래합니다. 인생 다 부질 없다, 소리지릅니다. 백년 넘게 살아 있는 백송에게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부질없다, 정말 그게 무슨 뜻이냐고요. 역사에 이름을 남긴 추사 선생도 자기 삶을 부질없다, 느낄까요? 인생, 어떻게 살아야 저 부질없음을 넘어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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