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노의 집에 놀러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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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일상생활

이응노의 집에 놀러가다!

by 브린니 2020. 7. 15.

고암 이응노 생가 기념관

이응노의 집

충남 홍성군 홍북읍 이응노로 61-7

 

 

비가 내리는 7월 일요일 오후,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날씨입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바다를 보러갈 수도 없고, 산을 기어오를 수도 없죠. 차를 몰고 좀 멀리, 조용하게 간 듯 아니 간 듯, 살짝 다녀오고 싶었습니다. 산도 있고, 물도 있고, 숲도 있고, 그 속에 커피 한 잔 할 만한 데도 있는 그런데 가서 산책도 하고, 잠시 쉬었다 왔으면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비가 오니까 좀 멜랑콜리해졌는지도 모르지요. 아무튼 무겁지 않은, 그렇다고 레저를 즐기는 것 말고 비오는 평화로운 오후를 느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는 데 어쩌다 이응노의 집이 나왔어요. 누구누구네 집에 놀러간다! 어릴 때 친구네 집에 놀러 가던 생각도 나고, 미술관 박물관 기념관 이런 것보다 그냥 이응노의 집이라는 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 집은 어떨까 궁금해졌습니다. 사진 몇 장이 올라와 있었지만 대충 보고 네비게이션에 이응노의 집 주소를 찍고 차를 출발했습니다.

 

이응노의 집과 가까워질수록 길은 좁아지고 구불구불 했습니다. 양 옆으로 야트막한 언덕과 나무들, 들판에는 발목만큼 자란 벼가 초록빛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빗방울도 초록빛을 띠며 영롱하게 찰랑거립니다. 차 안에선 Billie Eilish가 부르는 idontwannabeyouanymore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노랫말처럼 정말 더 바랄 게 없는 순간이라고나 할까.

 

드디어 이응노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주차장에 이응노의 집 철제 간판이 있습니다. 간판에는 이응노의 집 지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주차장에서 개울을 건너면 왼편 위쪽으로 기념관(전시공간)이 있고, 좀 더 위로 쉼터가, 기념관 아래쪽으로 북카페와 자료실이 있고, 그 맞은편엔 이응노 님께서 태어난 생가가 있습니다. 생가에서 좀 더 내려가면 연꽃밭이 있습니다. 지도를 볼 필요도 없이 주차장을 벗어나는 순간 이응노의 집,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이응노의 집, 지도

 

 

어느 쪽을 가장 먼저 둘러볼까 약간 조바심이 났습니다. 국도와 지방도를 타고 천천히 달렸더니 벌써 오후 5시가 되었으니까요. 일단 기념관이 문을 닫을지도 몰라 전시부터 구경하기로 했습니다. 물에 젖은 풀밭을 걸어 기념관에 도착했습니다. (사실 잔디밭으로 가면 안 되는 거였어요. 풀밭 사이로 잘 다져놓은 황토길처럼 보이는 진입로가 따로 있었거든요.)

 

기념관 앞에도 우스꽝스런 광대 철제 조각상이 서 있답니다. 양쪽에 벤치가 두 개나 있어도 앉을 수도 없이 늘 서 있기만 하겠죠.

 

 

이응노 기념관 전시 걸개

 

기념관 입구에 전시회 걸개가 큼지막하게 걸려 있습니다.

이응노의 문자추상 : 말과 글, 뜻과 몸짓

2020. 6. 16 TUE ― 10. 4 SUN

이응노 박선기 오윤석 연기백 이성민 이 완

 

전시관 유리문 앞에서 우산을 정리해서 우산바구니에 넣고 돌아서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고양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는 게 아닙니까. 전체적으로 밤색을 띠었는데 명도와 채도를 달리하는 여러 개의 브라운으로 어우러진 너무나 예쁜 고양이였습니다. 사진을 찍을까 하는데 전시실 직원이 나와서 앞으로 가로막는 바람에 나중에 꼭 찍어야지 하고 전시를 보러 들어갔습니다.

 

이성민 mother

 

 

전시실 입구에 들어서자 마자 서 있는 미술품은 이성민 작가의 mother라는 작품입니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있는 철제 입상입니다. 마치 자코메티의 조각상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자코메티의 조각상처럼 뼈만 앙상하게 야위고 뒤틀린 듯한 모습이 아니라 비록 몸은 야위었지만 평화로우면서도 풍부함과 너그러움을 지닌 듯한 어머니의 기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아마도 자식들의 삶의 안녕을 기원하고 계시겠지요.

 

몇 발짝 옮기면 박선기 작가의 An Aggregatuion이 걸려 있습니다. 치밀하게 계산된 3차원의 기하학적 입방체 작품으로 가늘고 엷은 라일론 실과 숯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술을 광활한 지성과 사유의 바다, 텅 빈 무한 공간에 풀어놓고자 하는 작가적 사유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박선기 An Aggregatuion

 

그곳을 지나면 이응노 화백의 초기 그림들이 걸려 있습니다. 서예화와 한국화 풍의 풍경화들인데 고향 홍성 마을의 모습을 그린 것들입니다. 그림이 매우 정감 있고, 옛 풍취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응노 풍경

 

 

이응노 화백의 후기 작품들은 점점 추상적인 면모를 띠는데 <구성>과 <군상>연작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문자추상을 시도하는데 동양의 상형문자와 금석문, 한자, 한글, 페르시아 문명의 쐐기문자, 아랍문자, 유럽의 전통 캘리그라피 등을 자유자재로 구성했습니다.

 

문자추상은 인간과 자연세계의 변화무쌍한 생성, 소멸, 순환의 원리를 형상으로 표현하는데 문자의 의미가 소멸하며 그림으로 생성되고 다시 그림이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며 끝없이 순환하는 자연을 표현합니다.

 

이응노 군상

 

전시를 다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현관 앞에 있던 고양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비는 계속 내립니다. 빗줄기가 굵지만 세차게 내리지는 않습니다. 가늘게 흩뿌리는 비는 아닙니다. 그저 내렸다 그쳤다 하기를 반복하면서 언덕과 숲과 이응노의 집, 사방을 적십니다. 기념관 앞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오니 생가가 보입니다.

 

이응노 생가

 

여기가 이응노 화백이 태어난 생가입니다. 그야말로 이응노의 집이지요. 사람들이 마루 한쪽에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멀리서 왔는지 이 마을 사람들이 마실 나온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집이니까 사람들이 와서 대청마루에서 떠드는 게 마땅합니다. 사진 찍는 데 약간 방해가 되긴 하지만요. 아무튼 그냥 집이어서, 사람이 와서 마루에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물론 복원한 것이겠지만 초가집 두 채가 한 채처럼 맞닿아 있고, 작은 마당과 나무 한 그루뿐입니다. 아, 한 채는 방이 있는 집이 아니라 헛간이나 창고 같은 느낌이네요. 거기에 뒷간도 있고요.

 

연밭

 

생가를 두고 길을 따라 내려가면 연밭이 나옵니다. 연꽃이 만발한 연꽃밭이지요. 연꽃은 물에서 피니까 연꽃 연못이라고 해야겠죠. 하지만 이응노의 집 지도에도 연밭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연꽃과 연꽃 사이에 땅이 있습니다. 길이라고 해야 할까요. 사실 물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연꽃이 물 위로 쑥 자라 있고, 가운데 땅이 있고, 그 옆으로 또 연꽃이 한창이니까 물은 없고, 갈라진 길을 사이에 두고 땅에 꽃이 피어 있는 듯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밭, 연꽃밭이라고 부르는 것이겠죠. 두 개의 연꽃밭에는 모두 흰 연꽃이 피어서 장관을 이룹니다. 흰 연꽃은 많이 보지 못했기에 더 멋있어 보였습니다. 연꽃 사이로 난 다리를 걸어보고, 연꽃밭 사이로 난 땅도 밟으면서 비오는 저녁을 걸어보았습니다. 연꽃잎은 정말 컸습니다. 그러니까 심청이를 태울 수도 있었겠죠. 비가 억수같이 내려서 세상이 물에 잠기면 연꽃을 타고 멀리 떠나려 갈 수 있으려나 상상도 해봅니다.

 

흰 연꽃

 

 

연꽃밭에서 놀다가 커피 생각이 간절해서 북카페로 가보았습니다. 아니, 기념관 앞에 앉아 있던 고양이가 여기 있는 게 아닙니까. 사진을 찍고 고양이와 함께 카페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고양이는 카페 직원에 의해 이내 밖으로 내쫓깁니다. 직원이 고양이털 알레르기라도 있는 게 아닐까요. 아마도 손님들에게 방해가 된다고 내보낸 것이겠지요.

 

카페와 고양이

 

 

카페는 생각보다 좀 작았습니다. 반쪽은 자료실 겸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었으니까요. 외관은 그리 작지 않았는데 반씩 나누어 놓았으니 카페는 정말 아담했습니다. 영업을 많이 하려는 욕심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카페 양옆으로 화려하지 않은 장정의 책들이 꽂혀 있고, 책장 끝자리에 선인장 화분이 3개 놓였습니다. 카페가 크지도 않고, 독특한 인테리어도 없어서 살짝 실망하기도 했지만 고암책다방이란 소박한 푯말을 보고 마음을 돌렸습니다. 여기는 이응노의 집에 붙은 다실이니까, 화려하지도 않고, 장사도 떠들썩하게 하지 않는다, 뭐 이런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북카페 고암책다방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통창으로 널찍한 풀밭이 보였습니다. 비 내리는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었고, 물을 머금은 초록 나무와 잔디가 눈을 싱그럽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힐링이란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더 좋은 게 있었습니다. 커피 값이 매우 싸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맛이 정말 좋았습니다. 쓰지도 신맛도 없이 깔끔하면서도 고소했습니다. 적당히 진하고 달콤한 커피였습니다. 가성비 최고였습니다. 비오는 풍경을 보면서 화가의 집에서 차를 마시는 기분이란 정말 모든 걸 다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너그러운 마음이 생기는 느낌이었습니다.

 

고암 기념관, 개울

 

노을이 물들고 저녁이 점점 짙어지는 시간 카페를 나왔습니다. 기념관을 돌아 나오는 길은 황토를 다진 듯한 길을 걸었습니다. 대나무를 두른 전봇대를 타고 넝쿨나무가 올라가는 모습을 보며 세찬 물소리를 내는 개울을 건넜습니다. 주차장에서 다시 한 번 이응노의 집을 돌아다 보며 안녕, 이라고 낮게 인사를 했습니다. 아마 빗소리에 묻혀 이응노의 집에는 들리지 않았겠지만 말입니다. 돌아오는 길 차안에서는 팬텀싱어3에서 관심을 모은 베이스 바리톤 길병민의 독창곡을 들었습니다. 노래 제목은 ‘마중’. 아마도 누군가 마중 나와 반겨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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