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김소연 <그래서>
본문 바로가기
독서 리뷰

[명시 산책] 김소연 <그래서>

by 브린니 2020. 7. 22.

그래서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 지 오래되었어요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

 

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

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

 

죽음을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는 나비에게

빠삐용, 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남자애를 보았어요

 

꿈속에선 자꾸

어린 내가 죄를 짓는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민이 몸을 뒤척여 죄를 통과합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빨래들처럼

슬픔이 말라갑니다

 

잘 지내냐는 안부는 안 듣고 싶어요

안부가 슬픔을 깨울 테니까요

슬픔은 또다시 나를 살아 있게 할 테니까요

 

검게 익은 자두를 베어 물 때

손목을 타고 다디단 진물이 흘러내릴 때

아, 맛있다 라고 내가 말하고

나 혼자 들어요

 

                                                      ―김소연

 

 

【산책】

그래서, 뭘, 어쩌겠단 말인가.

사랑한다고 해놓고선, 버려놓고선, 이제 와서 잘 지내냐고 물으면 어쩌란 말인가.

 

나는 잘 지냅니다. 당신이나 밥 잘 챙겨먹고 잘 사세요. 내 걱정은 마세요.

이렇게 답할 수밖에. 그것도 당신에게 가 닿지도 않을 텐데, 나 혼자서 말하고 나 혼자 듣는다.

 

어느 때이던가. 한동안 혼자서 말하고 혼자서 듣고 혼자서 맞장구 치고

혼자서 화를 내고 욕하고 지랄하던 때가 있었던가.

 

아마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실연을 당해서? 배신을 당해서? 돈을 날려서? 회사에서 짤려서?

 

아무튼 오로지 혼자일 때가 있었다.

내일이 오는 것이 너무 싫었던 때가.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 지 오래 되었어요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 합니다

 

그런 때도 한때이고 다 지나간다? 정말 뭣 같은 소리다.

하지만 나중에 보면 그런 시절도 다 갔고, 나는 멀쩡히 살아 있다. 정말 멀쩡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꿈속에선 자꾸

어린 내가 죄를 짓는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민이 몸을 뒤척여 죄를 통과합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빨래들처럼

슬픔이 말라갑니다

 

인생의 어느 시기 단절을 맛보게 되면 어린 시절로 퇴행하게 된다.

행복했다면 행복 뒤에 숨고, 불행했다면 불행을 곱씹으며 오늘의 불행의 원인을 거기서 찾는다.

어린 시절의 죄가 불쑥 나의 심장을 찌르고, 내일이 없는 시절이 계속될 것처럼 압박한다.

희망이 없는 날들이 내일 앞에서 자꾸 쌓인다.

 

어린 시절의 죄가 발목을 잡고 울고 있다.

오히려 현재의 슬픔은 빨래처럼 말라서 없어지고 있다.

 

잘 지내냐는 안부는 안 듣고 싶어요

안부가 슬픔을 깨울 테니까요

슬픔은 또다시 나를 살아 있게 할 테니까요

 

잘 지내냐는 안부 인사는 슬픔을 다시 일깨우고 슬픔을 곱씹으며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다.

차라리 슬픔은 생명 연장의 좋은 도구이다.

 

슬픔도 메말라버리면 생명도 탈수될 것이다.

슬픔도 생명도 빨래처럼 바싹 말라버리면.

 

검게 익은 자두를 베어 물 때

손목을 타고 다디단 진물이 흘러내릴 때

아, 맛있다 라고 내가 말하고

나 혼자 들어요

 

자두가 검게 익기 전에 먹어 치우자.

빠알갛게, 아니 그전에 노오랗게 익었을 때.

 

사랑도 너무 익어 진물이 나기 전에,

사람 사이의 情도 검게 변하기 전에.

댓글